달리다굼 (막 5:35-4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한국 경제와 사회도 절망을 털고 다시 일어나야 하지만, 우리 교회도 이제 "나약함과 절망을 털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역시 같은 주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의 말씀은 오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살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오늘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달리다굼." 아마도 이 말은 히브리어 방언인 것 같은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볼까 합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써 12년 동안 앓아온 혈루증에서 고침을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이 이런 놀라운 은총을 경험한 것은 무례를 무릅쓴 그의 행동 때문입니다. "혈루증"이 무슨 병을 말하는지 현대인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여인이 비정상적으로 피를 자주 흘리는 여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여성이 생리일에 자연적으로 피를 흘리는 것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이 여인은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흘렸으니,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은 집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거나, 군중과 떨어진 곳에서 병을 고치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저자거리로 나왔으니, 얼마나 무례하고 뻔뻔한지 모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자기들까지 부정하게 만든다고 그 여인에게 심한 몰매를 가했을 겁니다. 이런 사정을 알 만한 여인이 군중 사이를 헤집고 드디어 예수님의 옷자락까지 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까지 부정을 타게 만든 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부정을 탔다고 화를 내시기는커녕, 이 사실을 아시고 오히려 칭찬을 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게 살아라."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시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혈루증이 든 여인이 길을 막고 뛰어든 것입니다. 오늘의 분문은 이 여인을 치료하자마자 갑자기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달려와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회당장은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 죽어갑니다"고 말했는데, 그의 집에서 온 사람은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실망하시기는커녕 도리어 회당장을 위로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혈루증이 든 여인이 큰 무례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여인은 "피를 흘리는 여인은 부정하니,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말아라."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물리치고, 그리고 "12년 동안이나 병을 앓았으니, 다시는 나을 수 없을 거야."라는 절망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갖다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인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태도를 높이 사셨습니다. 그 여인을 치료하신 후,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회당장을 위로하시고, 친히 집까지 가셔서 죽은 소녀의 딸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후, 그 소녀를 살려주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회당장은 그 당시 높은 신분에 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에 끌려간 후로는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회당에 모여 율법을 낭독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회당장이란 신분은 그 당시에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처럼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이 갈릴리에서 온 무식하고 수상쩍은 젊은이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오기 전에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온갖 노력을 다해도 안 되니,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달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유대 사회인의 높은 종교 지도자인 그가 유대인이 미워하는 예수님에게 달려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적극적인 태도를 높이 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용기가 절망 돋보이지 않습니까?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앞에 온갖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성급히 포기한다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발명과 발견, 불멸의 기적과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대개 용기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일어나려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안 돼, 너는 안 돼, 우리 교회는 안 돼!" 이런 편견과 절망을 떨쳐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말에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괜히 위로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직 용기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무슨 장애가 있습니까? 무슨 절벽이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두 사람은 모두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병자를 고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혈루증을 앓던 나약한 여인이 어찌 그렇게 용감하게 예수님에게 달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지 않았다면, 회당장이 어찌 그렇게 용감하게 예수님에게 달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만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내 능력이 병을 고쳤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막 5:34, 눅 7:50, 8:48, 17:19, 18:42)"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능력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9: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마 13:58).
병은 의사와 약이 고치는 것이지, 병자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낫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병도 잘 낫지 않습니다. 의사를 믿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은 예수님이 고치시는 것이지, 믿음이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능력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것은 전기입니다. 하지만 전기가 아무리 집안 구석구석까지 들어와도 콘센트를 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줄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살아나려면, 줄을 믿고 잡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의 근원은 아니지만,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할 수 없다. 너도 할 수 없다. 우리 교회도 할 수 없다." 이런 신세타령과 같은 말은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목자는 제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우리 교회를 능력있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과신하지도 말고, 미리 체념하지도 맙시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우리 주님이시니, 오직 주님을 믿기만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용감하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발, 예수님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맙시다. 실패한 일, 낭패한 일만 생각하지 말고, "잘 될까?!" 미리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믿고, 일어납시다. 믿음만 있다면, 기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즘 TV에서 방영된 "영웅시대"와 "신화창조의 비밀"을 보니까, 남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모두 기도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적과 요행을 바라고 하늘만 쳐다본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분에게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청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죽은 아이에게 가신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죽은 아이가 손을 내밀지는 못했더라도,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간청하는 손을 보시고, 딸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편에서 "손"은 도움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십니다"(슥 8:22,31, 눅 11:20).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시고 능력이 있는 손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고, 팔로 안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으로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사람의 편에서 "손"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손을 당신의 손으로 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손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한 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의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입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때,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 7: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야고보도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다"(약 4: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담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한숨을 쉴 숨이 있으면, 그 숨으로 기도하십시오. 울고 불평한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고, 만약 그 기도가 합당하다면,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12년 동안이나 고질병을 앓던 여인만큼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처한 형편이 아무리 암담해도, 다 죽어 가는, 아니 완전히 죽은 야이로의 딸만큼 그렇게 암담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왜 용기를 내지 않으십니까? 왜 믿지 않으십니까?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올해는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이, 우리 교회와 국가가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자면 용기를 내고, 믿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다시 힘차게 일어나 봅시다. 일어나, 걷고, 뛰어 봅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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