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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자화상으로 산다 (골로새서3:1-11)

by 【고동엽】 2022. 9. 9.

변화된 자화상으로 산다  (골로새서3:1-11)

1748년 3월 10일!
북대서양 바다 한 가운데서 노예상선 한척이 큰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선원들은 수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신론자였던 20대 초반의 청년 ‘존 뉴턴’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경멸했고, 거부했던
하나님이 만일, 살아 계시다면 나는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모독했고, 상대방의 신앙을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심한 폭풍우 속에서 과거의 죄를 뉘우치면서, 그토록 외면했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모두가 목숨을 건졌을 때, 뉴턴은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셨을 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성자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습니다. 노예상선을 계속 타면서 과거의 죄에 다시 빠져드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나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도저히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 악한 행동을 다시 시작하여 그 길로 달려갔다.”

이런 갈등과 번민 속에서 점차 믿음의 눈을 뜨게 되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자, 나의 마음에 그 분을 향한 사랑이 싹텄다.
이제 나는 그 분을 존경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과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그가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고 성직자가 됩니다. 그리고 후에 노예폐지 운동에도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찬송시를 작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405장 찬송은 1748년 3월 10일! 자신이 영적으로 거듭난 날을 기억하며, 1779년 작사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새로운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사람’입니다. 때때로 우리 의 과거의 모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하고 좌절도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자화상을 갖는 것입니다.  
  
1.예수 안에서 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3:1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새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5:17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한복음1:12,13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남달리 경건훈련을 많이 해서 자격증을 받듯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듯,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 역시 우리의 결단이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이며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예수 안에 있는 새 사람은 누구에게도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로마서8:1-4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전에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던 죄인이,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여 늘 죄책감속에 살았던 연약한 우리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던 옛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죽고 사셨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죽고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일서5:11,12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3)예수 안에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새 능력이 있습니다.  
에베소서1:19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4:13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9:23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 믿음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부수적인 은혜가 정말 놀랍습니다. 지극히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단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자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2.그러므로 새사람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습니다.(1,2)
골로새서3:1,2에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한 가지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먼저 버려야하는 땅엣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우리는 버린 땅엣 것들이 있습니다.
땅의 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죄의 지배를 받던 때의 삶의 가치관들입니다.
그것은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탐욕, 분노, 격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들과 거짓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지나간 옛 생활들입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삶에서 이런 요소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우리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그 가치관으로 살았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의 실수이며, 넘어짐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것을 회개하고 또 다시 은혜를 구합니다.
  
2)이제 우리는 자나 깨나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시때때로 기도합니다. 주일을 성수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또 회개하고 또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위엣 것만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습니다.
땅에 살지만 땅만 내려다보고 살지 아니하고 위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인간을 ?νθρωπο?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위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위를 바라보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립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붙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찬송합니다. 예배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주 위에 고정시켜두고 삽니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있을 때나 걸어 다닐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 은혜를 구하고 찾습니다.

3.위엣 것을 찾는 사람은 새로운 자화상으로 삽니다.  
골로새서3:1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여기서 세 번째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할 때에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56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 스데반의 순교를 일어나 받으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돌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어서서 그를 반기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죽는 자가 아니라, 산자입니다. 패배자가 아니라, 영원한 승자입니다. 고통스런 신음을 하는 자가 아니라 영광의 찬송을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새로운 자화상으로 삽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사람은 변화된 새로운 자화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자화상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꼬드겨서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등지게 만들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광야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너 하나님의 아들 맞느냐?” 실력으로 증명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단숨에 얻을 수 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네가 그렇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 예수 안에서 변화된 우리를 부정하게 합니다. 가장 큰 표적이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화상을 여전히 죄인이고 실패자라는 자화상으로 만들어서 형편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을 바꾸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부족한 우리의 행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혼자서 힘들어하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하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큰 사명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1:5입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든 것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세상에 누구도 너를 당할 자  없다.”

스스로 별 볼일 없는 무능한 존재라고 여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8:20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제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제자 되는 것은 자기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주님, 성령님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예수 없는 제자는 없습니다. 성령님 없는 제자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 별 볼일 없던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난 다음 세상을 바꾸어놓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의 권능은 성령님께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실력이 성령님께 있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힘이 성령님께 있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사람은 성령을 거듭난 새사람의 자화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그는 폐병에 걸려 고등학교 1학년 때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가난하여 병원에 입원도 못하고, 아무도 없는 빈방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누군가가 던져준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로 병 고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회자가 된 다음, 그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사단은 조목사님의 마음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너는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감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나? 사람들은 네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 어떻게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할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너의 말을 들으려고나 할까? 차라리 그만 두라고! 강단에 올라가지마! 창피해서 어떻게 그곳에 올라가겠어? 부끄럽지도 않나? 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저들은 다 너보다 나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열등감은 아내와의 관계도 어렵게 하였습니다. 신혼초기에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아내를 다그치며 빈정거렸습니다.

“내가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당신이 지금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군, 그렇지? 당신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요? 그래 당신은 잘났고, 난 못난 사람이요. 이제 기분이 좋소?” “당신이 나를 비웃는 거요? 당신 아주 잘났군.”

열등감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커다란 좌절감에 빠져 들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사단의 이 술책에 계속 눌려있었다면 오늘의 순복음교회도 조용기목사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예수 안에서 변화된 자화상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너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였으나,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 너의 능력은 세상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용하고 있는 거야! 좌절하지 마라. 너는 내가 서용하는 나의 소중한 도구란다.”

이것은 비단 조목사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실수해도 사단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연약하여 실수하면 사정없이 달려듭니다. 그리고 집중공격 합니다.

“너는 안 돼, 그렇게 살면서도 목사라고 할 수 있어! 그만두지, 이중인격자, 그러면서도 사람 앞에서 설교할 수 있겠어! 네 설교에 무슨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나?”

최근에 다윗의 삶을 중심하여 쓴 글이 있습니다. 유진소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쫓기는 삶 속에서도 승리하는 영성” 이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 이 책에서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다윗의 삶을 쫓기는 삶으로 이끌어 가셨을까를 묻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감이라고! 우리가 조금만 협조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가운데서도 우리를 성숙시킬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비록 쫓기는 상황에 들어가서 힘은 들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놀랍도록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쫓기는 삶 속에서 기도를 배웁니다. 겸손을 배웁니다. 믿음의 능력을 배웁니다. 예배의 기쁨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드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3:9,10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옛 사람과 옛 행실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곧 우리에게 행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해야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베푸신 그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는 옛 사람의 삶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끊임없이 예수 안에서 변화된 자화상으로 사십시오.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믿고 힘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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