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12-15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많은 인물들 중에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드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그 마음이 순전했고 참신했고 하나님에게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사울이 점점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이 처음 마음이 없어지고 그 신앙도 마음도 생각도 점점 변질되어 갑니다.
사람은 처음과 같이 그 마음이 평생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참 참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 임금까지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마음은 간사합니다. 처음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하다가도 얼마 있으면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십니다. 마침내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이 버림을 받자마자 악신에게 점령을 당합니다. 사울이 그때부터 번뇌하기 시작하고 이성을 잃고 만용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삶이고 가장 두려운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부귀나 영화나 풍요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이고 은혜 되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미련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조건이 괜찮으면 신앙도 버리고 조건을 따라가기가 쉬운데 그것이 참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인생을 살되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당장 앞만 보고 살면 그런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조건은 좀 부족해도, 건강은 좀 부족해도, 오늘의 환경은 좀 열악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언젠가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새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삼상 16: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다윗의 집에 가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삼상16:7)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마음과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외모를 너무 중시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속습니다. 외모는 얼마든지 그럴 듯하게 꾸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화려하게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는 것입니다. 꾸밈이나 그럴듯하게 가꾸어진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포장문화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문화는 자꾸만 포장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물건도 포장합니다. 방석도 보로 쌉니다. 의자, 책상, 식탁, 이불도 보로 씌웁니다. 자동차도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오는데 또 보를 씌웁니다. 밥도 쌈으로 싸서 먹고 과자상자도 포장합니다. 책방에 가면 책도 포장해서 줍니다. 우리나라는 포장하는 것이 356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책을 포장하는 종이가 한사람이 일 년에 두 권을 산다면 한해에 1억 권 책을 포장해야 하는데 그 포장지만 400톤이나 되고 10년 이상 된 침엽수 1천 3백 그루를 베어야 한다고 합니다. 포장을 안 하면 일 년에 50억 원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건만 포장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얼굴도 완벽하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화장을 벗기고 나면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 겉모양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포장과 덮개를 여시고 그 속을 보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외모도 꾸며야 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정돈하고 꾸미고 포장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포장을 너무 지나치게 하면 내실이 빈약하게 됩니다. 우리는 외모를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면을 가꾸는데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내면, 마음, 중심, 생각을 중요시 합니다. 나의 내면을 더 가꾸고 채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으로 성숙해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실 때 그의 내면, 그의 마음, 그의 생각, 그의 정신을 보셨습니다.
예배 중심
다윗의 두 번째 특징은 예배중심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에 충실했습니다. 다윗처럼 예배를 중요시 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시 27:을 보면 “다윗의 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제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자의 기도“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시편 4절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구구절절이 성전에 대한 그리움, 사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평생을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는 삶을 살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지고 사울은 점점 쇠하여 갔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의 곁을 지켜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배를 거부한 사람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 한결같이 예배를 거부하고 핍박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고 교회 문을 닫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더니 망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가 독일교회로 하여금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하더니 끝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엊그제 월간조선 1월호를 보니까 북한에서 탈출한 어느 20대 여성은 온가족이 숨어서 집에서 예배를 드려왔는데 이웃집의 밀고로 발각되어 이 여성은 탈출하여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왔고 가족들은 광주리 같은 그릇으로 들어 올려야만 오갈 수 있는 열악한 처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북한이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얼마나 집요하게 방해합니까. 북한도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지자들이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창 4:5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면 가인은 예배를 뜻있게 다시 드려야 하는데 그만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예배를 방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결국 복을 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예배중심의 삶을 중요시 합니다. 신앙인에게 이 예배는 삶이고 생명이고 호흡입니다. 그래서 예배생활이 중요한 것임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야 은혜를 입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배를 아주 소홀히 여기는 시대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러 왔다가도 끝나자마자 달려갑니다. 약속을 해도 예배시간 끝나자마자 만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5분만 늦어져도 안달하게 되는 것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달하는 모습이 이 앞에서 보면 다 보입니다. 그러니 그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겠습니까. 예배드리는 동안에도 몸은 여기에 와 앉아있는데 마음과 생각은 따로 노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사한 통계를 보니까 예배시간에 딴 생각하고 앉아있는 사람이 31.5%나 된다고 합니다. 졸고 앉아 있는 사람도 13,8%이고 주보를 탐독하는 분이 11,2%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 “저 말씀은 박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지금 박집사가 어디에 앉아 있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들어야 하는 것을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참 가상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때로 불화가 일어나고 갈등이 야기됩니다.
얼굴은 고운데 이름이 삼순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이름 때문에 날마다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 여학생이 마침내 대학에 갔습니다. 대학에 가면 놀리지 않겠지 기대하고 첫날 미팅시간에 남학생들 앞에서 내 이름은 삼순이라고 소개하자 순간 폭소가 터졌습니다. 이 여학생이 너무 무안해서 그만 뛰쳐나와 울면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왜 예쁜 아가시가 우느냐고 하니까 “내 이름 때문에 아이들이 놀려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운전사가 말합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울고 그래요, 이름이 삼순이만 아니면 됐지.” 우리는 이웃, 너, 주위사람들에게 관심이 너무 지대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쯤은 그냥 생각 없이 건드리게 딥니다.
다윗은 예배 중심 자였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그 영향을 받아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왕으로 취임하자마자 예배부터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예쁜 짓을 하면 은혜를 입고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예배 중심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일평생 동안 그가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신앙인의 가장 소중한 삶은 예배생활입니다. 예배생활에 충실한 것도 복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
본문을 보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약궤는 일명 법궤라고도 말합니다. 그 속에 모세의 돌비, 아론의 지팡이, 광야에서 40년간 먹은 만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 언약궤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는 지성소에 모셔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성전이 없을 때라 변방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나는 궁궐에서 잠자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변방에 있어야 하는가”하고 늘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궤가 사람들에게 메워져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그때 모든 백성들은 모여서 나팔을 불고 환호하고 다윗은 그 백성들의 행렬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이 다윗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이 본문이 주는 주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한나라의 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성을 잃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뭇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출수 있습니까. 찬송할 때 박수를 차라해도 그것도 체면이 손상되는지 못하고 박수치면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이유를 달기도 하는데 다윗은 많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왕이 체통 없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것도 왕이 에봇을 입고 말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예복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입는 가운을 입고 여러분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값이고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이유입니다.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춤추는 일 아니라 더한 일이라도 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다윗은 그 보다 더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다윗은 손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도 기쁘게 감수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때문이라면 내 체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이라면 내가 손해 보는 일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이라면 내가 고난 받는 일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내 체면 때문에, 내가 손해 보기 때문에, 내가 더 놀기 위해서, 내가 더 편해지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피한다면 그 신앙은 더 수양이 필요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우리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행복해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다윗처럼 평생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혼할 때 평생 사랑하겠다고 서약하고도 사랑은커녕 매일같이 싸우며 살아가는 것은 내 노력이나 내 의지가 빈약해서 그렇습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 힘으로 무슨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평생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심도 건실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삼하 16:13절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의 집에 와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그 일 이후로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는 삶이 축복입니다. 다윗은 8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하나니은 그 막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첫째를 중요시 했던 시대입니다. 첫 열매, 첫 곡식, 첫 아들을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는가 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동시절에 맹수들이 양을 물어 가면 목숨을 걸고 쫒아가 맹수의 입에서 양을 뺏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목숨 걸고 나아가 싸웠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욕을 먹고 있는데도 사울을 비롯해서 누구도 두려워서 나가 싸우거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그 모습을 볼 때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분노를 느끼며 골리앗 앞에 나가 싸웁니다. 그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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