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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는 새벽빛 같은 의인의 삶 (잠언 4:18)

by 【고동엽】 2026. 1. 18.

동이 트는 새벽빛 같은 의인의 삶 (잠언 4: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빛입니다. 아직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 공기는 차갑고 맑으며, 밤의 잔향은 조용히 물러갑니다. 그때 동쪽 하늘 끝자락에서 아주 가는 선 하나가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어둠이 더 짙어 보일 만큼 미미하지만, 그 선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빛은 늘,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둠을 뒤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밝아집니다. 바로 그 장면을 성경은 의인의 길에 비추어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18).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나, 인간의 자기계발을 부추기는 문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스스로 완전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며, 그 의로움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곧, 의인의 삶은 인간의 자력으로 쌓아 올린 공로의 탑이 아니라, 은혜로 시작되어 은혜로 자라가며 은혜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더 열심히 하면 빛날 수 있다”는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길의 성격”을 밝히 보여줍니다. 의인의 길이 왜 ‘돋는 햇빛’ 같은지, 왜 ‘점점 빛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지—이것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도의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잠언 4장은 삶의 길을 두 갈래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성경은 늘 길로 말합니다. 신앙은 단지 머릿속의 동의가 아니라 걸어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길은 방향이 있고, 길은 습관이 되고, 길은 결국 도착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의인의 길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왜 빛일까요. 빛은 드러냅니다. 감춥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길을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빛은 자라납니다. 새벽빛은 정오의 광명과 같지 않지만, 새벽빛은 정오로 향하는 빛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날은 미약하고,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구름이 덮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의 본질은 흔들림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의인의 길은 “점점” 빛납니다. 이것은 성화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은혜의 진행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의인의 길이 점점 빛난다고 할 때, 그 빛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외적 성공, 사람의 칭찬, 사회적 영향력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적 빛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함의 빛이며, 진리의 빛이며, 사랑의 빛이며, 십자가를 따라가는 자기부인의 빛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빛나는 인생’과 결이 다릅니다. 세상은 빛을 스포트라이트로 이해합니다.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 박수 받는 것, 이름이 알려지는 것, 눈에 띄는 것. 그러나 성경은 빛을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걷는 것으로 말합니다. 빛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달이 태양을 대신할 수 없듯, 성도는 자기 영광으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의 빛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는 하나님 중심성”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 아닙니다. 새벽빛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밤을 지나야 합니다. 의인의 길이 돋는 햇빛 같다는 말은, 의인의 길에도 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길에는 눈물의 밤이 있고, 기다림의 밤이 있고, 시험의 밤이 있고, 혼자 견디는 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 종종 그 밤을 단숨에 건너뛰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밤을 통과시키며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드십니다. 밤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워 새 빛을 채우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가끔 늦어 보입니다. 의인의 길은 때로 손해처럼 보입니다. 의인의 길은 세상의 속도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분명히 밝아집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 하나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점점 빛나서”라는 말은, 성도의 삶이 늘 상승 곡선만 그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화는 단순한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깊어짐입니다. 어떤 계절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많고, 어떤 계절에는 변화가 없는 듯 보입니다. 때로는 후퇴한 것 같고, 다시 옛 습관이 고개를 드는 것 같고, 믿음이 약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땅속에 뿌리가 깊어지는 시간은 겉으로는 정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장입니다. 어떤 나무는 겨울에 잎이 없지만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의인의 길이 점점 빛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빛으로 이끄시는 방향성이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넘어져도 일으키시는 은혜가 있고, 흔들려도 붙드시는 손이 있고, 어둠 속에서도 끝내 새벽을 여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잠언은 의인의 길을 “원만한 광명”으로 끝맺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완전한 밝음’이라는 의미를 넘어, ‘온전한 빛’ ‘흠 없는 빛’ ‘결핍 없는 광명’이라는 뉘앙스를 담습니다. 즉, 의인의 길은 중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은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성도의 생애는 어느 지점에서 끊기는 미완성의 이야기로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성화는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국 완성으로 데려가십니다. 이 완성은 우리의 노력의 총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성도의 견인, 곧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를 기쁨으로 고백합니다. 의인의 길이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이유는, 의인이 끝까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끝까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핵심이 빛처럼 드러납니다. 의인의 길이 빛나는 이유는 의인이 ‘빛의 근원’이어서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빛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은 십자가에서 가장 찬란합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빛을 승리의 자리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빛을 십자가의 낮아짐에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심판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몸으로 통과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정오에 어둠이 덮였고, 그 어둠 속에서 죄의 값이 치러졌습니다. 그 다음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동이 트는 새벽빛 같은 의인의 삶”은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자로 부름 받았고, 그 빛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영광입니다.

성도 여러분, 의인의 길이 빛나는 것은 결국 관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서 있을 때, 삶의 길이 바르게 정렬됩니다. 신앙은 단지 규칙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방향이 생깁니다. 사랑이 있으면 선택이 달라집니다. 사랑이 있으면 견딤이 생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으면 회개가 생깁니다. 의인의 길은 완벽한 길이 아니라 회개가 있는 길입니다. 악인의 길은 넘어지지 않는 길이 아니라, 넘어져도 돌아오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넘어져도 돌아오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자기 죄를 숨기지 않고 빛 가운데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빛은 죄를 드러내지만, 복음의 빛은 죄인을 정죄하려고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씻기고 회복시키기 위해 비춥니다. 그래서 성도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빛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지 않으려는 마음,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지 않으려는 마음, 죄를 미워하고 은혜를 붙드는 마음—그것이 의인의 길을 점점 밝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늘 묻게 됩니다. “정말 내 길이 점점 빛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젊을 때보다 열정이 줄었습니다. 예전처럼 뜨겁지 않습니다. 마음은 쉽게 식고, 기도는 짧아지고, 말씀은 멀게 느껴지고, 세상 염려는 더 커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고백 자체가 빛 가운데 있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어둠을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을 아는 사람은 자신 안의 어둠을 슬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슬픔이 은혜의 자리로 여러분을 데려갑니다. 신앙은 ‘내가 괜찮아졌다’는 감각에서 자라기보다, ‘나는 주님이 더 필요하다’는 깨달음에서 자랍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 빛이 너를 이끌고 있다.” 새벽빛이 처음부터 강렬하지 않듯, 성도의 빛도 때로 미약합니다. 그러나 미약함이 곧 실패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며, 근원이며, 붙드는 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언 4:18의 빛을 실제 삶에 연결해야 합니다. 의인의 길이 점점 빛난다면, 그 빛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그것은 먼저 마음의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자기 의를 붙잡던 마음이 십자가로 옮겨갑니다. 자기 주장으로 살던 마음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분노로 해결하려던 마음이 온유로 바뀌고, 미움으로 거리를 두던 마음이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두려움으로 움츠러들던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담대해집니다. 또한 그것은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느려지고, 이해가 넓어지고, 용서가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성도는 점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선택에서 나타납니다. 유혹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결단, 거짓 앞에서 진실을 택하는 용기, 쉬운 길보다 바른 길을 걷는 인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길이 되고, 그 길은 점점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의인의 길이 빛나는 이유는 단지 도덕적 습관의 누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씀 없이 빛은 없습니다. 성령 없이 빛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기 마음을 빛의 근원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변덕스럽고, 감정은 흔들리고, 의지는 쉽게 마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은 늘 말씀의 등불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붙드실 때, 우리의 길은 빛 가운데서 정돈됩니다. 그래서 경건은 기분이 아니라 훈련이며, 은혜는 게으름의 핑계가 아니라 순종의 동력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은혜를 강조하지만, 그 은혜는 결코 방종을 낳지 않습니다. 참된 은혜는 거룩함을 낳습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않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행위의 열매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빛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증거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생명의 향기입니다.

한 가지 예화를 나누겠습니다. 어떤 마을에 새벽마다 등불을 들고 길을 걷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어르신, 이미 익숙한 길인데 왜 매일 등불을 들고 다니십니까.”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길을 안다네. 하지만 내 눈이 어두워져서가 아니야. 이 등불은 내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혹시라도 밤길을 걷는 누군가가 이 빛을 보고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네.” 그 노인의 등불은 자신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이 점점 빛난다는 것은 단지 ‘내가 더 나아졌다’는 개인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도의 빛은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사랑으로 흘러갑니다. 가정의 어둠을 밝히고, 교회의 상처를 덮고, 이웃의 절망에 작은 희망이 됩니다. 성도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들고 걷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원만한 광명”을 바라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은 미래의 소망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도 자기 삶이 어둡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몸이 약해지고, 관계가 힘들고, 경제가 어렵고, 마음이 눌리는 계절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결국 원만한 광명에 이릅니다. 그 광명은 단지 이 땅의 형편이 풀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도 돌보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원만한 광명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완전한 빛, 새 하늘과 새 땅의 빛, 죄와 눈물과 죽음이 더 이상 없는 빛입니다. 우리가 그 빛을 믿기 때문에 오늘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미래의 빛은 현재의 발걸음을 밝힙니다. 천국의 광명은 오늘의 선택을 정결하게 합니다. 종말의 소망은 오늘의 거룩함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의 길은 ‘자기 힘으로 빛나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새벽빛처럼 처음엔 미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걸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한숨 섞인 기도도, 무릎 꿇는 회개도, 작은 순종도, 눈물로 드리는 예배도, 누군가를 위해 참는 인내도—그 모든 것이 빛 가운데 쌓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빛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빛을 선택하십시오. 어둠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붙드십시오. 사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넘어지면 회개로 돌아오십시오. 길은 점점 빛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만한 광명에 이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의인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입니다.


설교요약

의인의 길은 돋는 새벽빛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은혜로 점점 밝아져 마침내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이 빛은 성공이나 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함, 진리, 사랑의 빛이다. 의인의 길에는 밤이 있으나 하나님은 밤을 통과시키며 빛을 선명하게 하신다. 성도의 성화는 단선적 상승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깊어짐이며, 넘어져도 회개로 돌아오는 길이다. 완성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하나님이 끝까지 신실하시기에 의인의 길은 반드시 빛으로 마무리된다.

묵상 포인트

하나님의 빛을 나는 두려워합니까, 사랑합니까.
나는 빛을 ‘사람의 인정’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점점” 빛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 기준은 성경입니까 세상입니까.
내 삶에서 회개는 습관입니까 사건입니까.
내가 들고 있는 작은 빛이 누군가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까.

강해

잠언 4:18에서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으로 비유된다. 이는 의인의 삶이 빛의 근원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둔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점점 빛나서”는 성화의 지속성과 방향성을 나타낸다. 그 과정은 흔들림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삶이다. “원만한 광명”은 완결의 개념으로, 종말론적 완성—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영화—까지 시야를 확장한다. 따라서 본문은 윤리적 계발이 아니라 복음적 성화, 곧 칭의의 은혜 위에 세워진 거룩의 진전을 말한다.

주석

“의인의 길”(דרך צדיקים)은 삶의 방향과 습관을 포함하는 포괄적 표현이며, “돋는 햇빛”(כְּאוֹר נֹגַהּ, ‘빛의 광채처럼’)은 새벽의 점진적 밝아짐을 암시한다. “점점 빛나서”(הוֹלֵךְ וָאוֹר, ‘가며 빛난다’)는 진행형 동작의 뉘앙스로, 단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 과정임을 강조한다. “원만한 광명”(עַד נָכוֹן הַיּוֹם, ‘날이 견고히/온전히 설 때까지’)은 정오 혹은 완전한 낮을 떠올리게 하며, 빛의 충만함과 안정성을 나타낸다. 대조 구절(4:19)의 악인의 길은 어둠과 걸림으로 제시되어, 본문은 ‘길’과 ‘빛’의 대조를 통해 도덕적·영적 방향의 분기점을 드러낸다.

원어 주석 (히브리어-구약)

  • צַדִּיק (차딕): ‘의로운 자’. 단순히 도덕적으로 흠 없는 자라기보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자를 포함한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의인은 하나님 경외와 연결된다.
  • דֶּרֶךְ (데레크): ‘길’. 단지 노선이 아니라 삶의 방식, 선택의 연속, 인생의 방향을 뜻한다.
  • אוֹר (오르): ‘빛’. 진리, 생명,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폭넓게 사용된다.
  • נֹגַהּ (노가): ‘광채, 빛남’. 새벽의 은은한 밝음, 혹은 빛의 퍼져 나감을 내포한다.
  • הוֹלֵךְ וָאוֹר (홀레크 바오르): ‘가면서 빛난다’. 진행·증가의 뉘앙스가 있어 성도의 성화와 유사한 ‘점진성’을 연상시킨다.
  • עַד נָכוֹן הַיּוֹם (아드 나콘 하욤): ‘날이 온전히 설 때까지’. ‘나콘’은 견고함, 확정됨, 안정됨의 의미를 담아, 최종적 빛의 상태가 흔들리지 않는 완성임을 암시한다.

금언

빛은 자기의 크기를 주장하지 않고, 어둠을 물러가게 합니다.
의인의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끝까지 밝아지는 길입니다.
새벽의 미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방향이 곧 은혜의 증거입니다.
회개는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빛으로 돌아오는 문입니다.
완성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신학적 정리

의인의 길의 빛남은 칭의와 성화의 질서를 보여준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단번에 주어지며, 성화는 성령의 역사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은 성화의 점진성과 성도의 견인 교리를 함축한다. 궁극의 “원만한 광명”은 영화의 단계, 곧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행위구원이나 자기계발이 아니라,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완성되는 구원 서정 속에서 읽혀야 한다.

주제별 정리

빛: 하나님의 임재, 진리, 거룩함, 드러남과 치유의 상징.
길: 삶의 방향, 선택의 연속, 습관으로 굳어지는 영적 여정.
점진성: 성화의 과정, 때로는 더뎌 보이나 멈추지 않는 은혜의 진전.
완성: 원만한 광명, 종말론적 소망, 영화의 확실성.
대조: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빛과 어둠, 안정과 걸림의 대비.

목회적 정리

성도는 종종 자신의 미약함을 ‘빛 없음’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새벽빛은 미약해도 참빛이며, 하나님은 그 빛을 자라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고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방향성이다. 낙심한 성도에게는 “점점”이라는 약속을, 넘어지는 성도에게는 회개의 문을, 오래 견디는 성도에게는 “원만한 광명”의 소망을 붙들게 해야 한다. 교회는 서로의 빛을 비교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새벽을 지켜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오늘 내 삶에서 어둠과 타협하던 한 가지를 끊어내고 빛으로 옮기겠습니다.
말씀의 등불 아래 살기 위해, 매일 짧더라도 성경을 펴는 시간을 세우겠습니다.
넘어졌을 때 숨지 않고 회개로 돌아오며, 은혜를 구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내 말과 태도가 빛이 되도록, 정직과 온유를 실천하겠습니다.
나의 작은 빛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며, 사랑의 수고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원만한 광명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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