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가정과 교회와 신앙 (수24:15 행16:15)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기리며 가르치는 선생에 감사로 스승을 알게 하는 달로서 잃어진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5월5일 어린이 날 하루만 어린이에 대한 관심, 인격, 사랑의 표현으로 하루를 지내며 5월8일은 어버이날에 부모 공경의 태도 표현으로 카네이션 꽃 달아 드리며 용돈 드림으로 반짝 지키는 날로 습관 되어 내려오고 5월15일은 스승의 날로 선생의 고마움을 더 하는 날로 지키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한편 어린이가 없고 어버이가 없으며 스승이 없음을 반영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생각하면 5월의 가정의 달은 붕괴된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기에 가정의 달을 선포하여 지키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인류사회의 뿌리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단위이며 이 가정을 토대로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도 이루어짐을 안다. 가정은 인간이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살아가다가 삶을 마무리하는 터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정은 기도를 배우는 최초의 교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이며 말씀대로 행동하도록 훈련하고 실습하는 신앙교육의 현장이다. 신구약성서 시대에도 자녀의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먼저 실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교육의 책임 또한 가정의 부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마다 그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가정이 담당했던 신앙교육은 그 기능과 역할이 성전이나 회당 그리고 교회로 점점 옮기어 왔음을 알게 된다.
중세기를 지나 종교교육시대에도 가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부모가 자녀들에게 성서, 교리문답, 교회생활 규칙 등을 가정예배로 인도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발전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로 오늘의 현대 사회에서 더구나 산업사회와 도시화 현상으로 신앙교육이나 기능과 역할이 상실해 가고 있다. 물론 여기에 가정은 붕괴되고 이로 인한 가치관의 일탈현상과 가정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신앙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가정의 질서를 회복해야 할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정의 붕괴와 사회의 질서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가정의 비극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부재(關係不在)에서 오는 삶인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생활구조를 살펴보면 집은 화려하고 비싼 장식물로 꾸며지고 있는 반면에 커다란 집에 홀로 꾸민 각자의 방에서 소외를 느끼며 서로 다른 꿈과 생활을 다른 시간차로 따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대에 집(house)은 있지만 가정(home)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집과 가정 사이에는 무엇이 다른가를 알게 한다. 예컨대 빅토르 휴고(Victor Hugo)는 ‘집은 나무와 돌과 타일로 세워져 있지만 가정은 사랑의 행위위에 세워진다.
집은 몇 십 년 동안 지탱되지만 사랑의 행위에 세워진 가정은 수천 년 살아간다.’고 한 말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실감하며 생각하게 한다. 그 일례로서 옛 로마가 망한 이유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의 역사 교수인 크리스토퍼 도우슨 교수는 ‘로마의 귀족들은 가정을 가지면 가정에 얽매인다 하여 가정을 도피하고 식민지국에서 끌어 온 미모의 노예여인을 택하여 성적 만족을 취했기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가정이 붕괴되어 무너졌다.’고 하였다. 로마는 그들의 권력과 돈과 섹스로 가정이 병들어 무너지고 그로 인하여 로마사회는 붕괴되었음을 보았던 것이다. 고작 5월이 되어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가정의 달이 되어야 하겠는 가 생각하게 한다. 모든 가르침이 가정에서부터 이뤄져 왔음을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탈무드 교육이 전부이라면 가정교육의 불모지대가 되어버린 우리시대를 보고 성찰해야 하지 않을 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가정이 없다. 오히려 부모와 같이 살고 부모와 같이 나들이 하고 가정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쯤은 시시하게 보인다. 교회에서도 교회학교를 통하여 경험되어지는 신앙교육조차 어른들의 욕심으로 편협한 사고와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이 갖는 근본적인 교회관 신앙관이 잘못 받아진 관습으로 또 다른 교회공간이 문화나 놀이 공간 그 이상을 넘어 서기가 어려운 교회당(예배당 인식) 구조공간에서만 고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말만하지만 새 세기의 주인공을 위한 지금의 자녀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갖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유년, 청소년)을 보고 테크노댄스, 힙 핫바지, 염색한 머리, 귀걸이, 코걸이, 등이 신경 쓰여 지기도 하지만 그것만 을 탓 할 것인가? 그래도 내 자식인데 어떻게 할 가? 여기서 어른들이나 기성세대는 모두가 침착해야 한다. 모두가 내 가정으로 눈을 돌려 곧 기성세대들의 문제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문제는 내 가정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시스템이 문제가 되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심각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학교도, 가정도, 교회도, N세대 또는 디지털세대들에게는 어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인식도 기성세대는 알아야 한다.
가정을 가정되게 잘 꾸리지 못한 원인에 기인하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 인식은 관심이다. 그 관심은 포용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 공동체이다. 병들어진 가정 공동체를 치유해야 한다. 가정의 주인으로 살아온 어른들은 가정 붕괴의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의 신앙열심에만 주력해 왔던 교회의 생활이 곧 가정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교육이나 교회참여도도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한 교회의 전도나 선교의 자리로 자리 매김을 하고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가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의 원동력이 되는 인간을 가정에서 올바른 신앙으로 교육하고 성장해 가는 것이 기독교가정 임을 인식하고 부모의 책임과 임무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사회의 문제를 여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가정의 변화는 대부분이 급격하게 일어난 가정질서의 변천에 기인함을 본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모들이 현대 사회가 살아온 기존의 경건한 모양에 습관 된 신앙형태에 비교해서 반대하는 경향이 여러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받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행하는 심령부흥운동도 그 본래의 열정이 변질되어 깊이가 없고 기복적인 면으로 흘러 문질 만능의 기세로 몰아감도 문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정과 사회에서 신앙을 생활화 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임을 보아야 한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보다 생활로 은연중에 주는 신앙적 감화를 더 신뢰하고 말보다 인격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함을 아는 것이고 자녀들이 이를 본받도록 할 임무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생활에 있어 가족이 서로 연대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함에 유의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결단을 내리면 그것은 그 한사람만의 결단이 아니라 온 가족의 결단으로 인정함을 아는 것이다. 본문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이다. 또한 신약에서도 사도행전에 한 가족이 다 함께 세례 받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의 곁에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구가 있었고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도 감동되어 회개한 후에 곧 가족을 데리고 와서 믿음의 행동을 같이 하였음을 알게 되어 본 서울교회가 갖는 교회주제(가정과 함께한 교회)의 슬로건의 주제 본문(신명기12:7,사도행전 16:31)도 알게 되는 것이다.
유아세례의 제도가 교회 안에 있게 된 것은 가족들에게 신앙의 연대 책임이 있음을 알게 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유아세례는 부모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음과 또 자신들이 하나님과 일하는 자로서 아이들에게 대하여 어떤 임무가 있음을 알게 하는 의의(意義)를 갖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진리와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신앙의 진리와 임무를 가르쳐 주었다.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의 사역자로서 임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에 배신하는 결과가 된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결단은 자기 개인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가 거느리는 그의 가정 안의 모든 사람을 포함한 입장임을 아는 것이다.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들이 출생하면 그들도 기독교신앙에 근거하여 가정생활에 참예함으로 부부의 결합을 더 강하게 하고 또 모든 관계가 그의 출생 때부터 변하게 되는 그 이유로 그 책임소재를 파악하게 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에서 기독교신앙을 교육하지 않으면 그 가정과 부모의 신앙적 자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하나님은 인류사회의 기본 단위로 가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 귀중한 깨달음으로 5월에 푸르게 물들여진 자연과 함께 ‘가정의 달’이 되기를 기원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은 질서 안에서 남녀 관계의 건전여하(健全如何)와 부모와 성장하는 자녀들의 신앙적 건전여하 그리고 사회전체의 건전여하가 모두 포함함을 유의하는 필수적인 조건여하임을 알아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정과 교회와 신앙’에서 깨닫게 한다. 어린이가 없고 어버이가 없고 스승이 없는 공동체에 ‘가정공동체’의 귀중함을 새삼 알게 한다.
출처/배성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그루터기 (이사야 6:13~13) (0) | 2022.09.04 |
---|---|
축복의 열매 (시편 144:12~15) (0) | 2022.09.04 |
삶을 얻는 신앙 (요3:14~17 히11:6) (0) | 2022.09.04 |
a (0) | 2022.09.04 |
보혜사 성령 (요14:16) (0) | 2022.09.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