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에서의 만남과 나눔과 기쁨 (마28:9-10, 행2:42-47)
저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지난 한 주간 동안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도 만남과 나눔으로 기쁨의 시간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현지 러시아 목회자 50여명과 한인 선교사 20여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기도와 교회 성장”이란 주제로 최복규 목사, 홍영기 목사, 김명혁 목사가 강사로 수련회를 인도했는데, 은혜와 감동과 기쁨이 충만한 유익한 수련회였습니다. 몇 가지 하이라이트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즐거운 만남과 나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월요일 오후 4시경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 현지 선교사들의 반가운 영접을 받고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블라디보스톡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에 들러 여장을 푼 후 정호상 선교사의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차를 타자마자 선교사 집에서의 저녁 식사를 취소하고 블라디에서 사역하고 있는 20여 가정의 선교사 부부들과 자녀들을 제일 좋은 식당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호텔에서 여장을 푼 후 그곳에서 제일 좋다는 한국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2시간 정도 전에 급하게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2,30여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46명 정도가 식당에 모여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들을 나누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한글, 영어, 러시아어로 부르고 간단한 인사의 말을 전한 다음 1인 당 10불 정도 하는 한정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
사모 선교사들이 “기가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주로 남자 선교사들끼리 모이곤 하는데 사모 선교사들을 함께 불러주어서 너무 좋고 신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원하면 목요일 오후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 거기 모였던 10여명의 청소년들(선교사 자녀들)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의 교제를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하는 지를 역력하게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싼타 도밍고에서 모였던 선교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잠간 전한 후 선교사들의 노고와 아름다운 협력 사역을 치하한 후 목요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목요일 오후 선교사 부부들과 몇몇 자녀들을 데리고 바닷가 분위기 있는 러시아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다시 가졌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저의 강의 시간을 줄이고 러시아 목회자들을 데리고 바닷가 러시아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는 하지 않고 선교사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만 나누어 먹으니 그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동우 목사님이 강조하는 대로 그리고 제가 깨달은 대로 선교는 설교나 강의나 전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노는 것도 선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보스톡을 방문 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몇 시간 동안 신나게 놀아 준 일이 있는데 그때 내가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 학생이었습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오후 블라디 공항을 떠나기 전 조그만 예쁜 나무 상자 3개를 사서 은덕이와 다혜와 고은이에게 전해주라고 선교사 한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선교도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별을 생각하든지 이별을 가상할 때마다 가슴이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 옛날 어머니와의 나의 이별을 다시 가상할 때도 그렇고, 선교사들의(고향 및 가족으로부터의) 이별을 내가 가상해 볼 때도 가슴이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주 찾아가서 자주 만나주고 위로와 사랑을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둘째, 블라디에서 ‘교회사 이야기’를 실험해보았습니다.
소련선교회 20년 역사상 현지 러시아 목회자들을 상대로 수련회를 개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지의 한인 선교사들은 이번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50여명의 러시아 목회자들이 거의 전부 러시아 침례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침례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과거 극심한 박해를 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예배 의식적으로 배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서를 지닌 러시아 침례교회 목회자들에게 강의나 설교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교회성장”을 소개하기 전에 쉬운 말과 편안한 자세로 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 후 “교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과 진리가 중요하지만 성경과 진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과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과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생각과 삶과 주장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는 ‘교회사적 안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초대교회의 300여년 동안의 역사를 살펴보면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교회들이 그들이 처한 지역적 환경에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 칼타고 교회, 비잔틴 교회 등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색깔과 입장이 각각 다른 교회들이 이단들이 아니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후에는 기독교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정교 교회와 개신교 교회로 나뉘어졌는데 그 세 교회들도 모두 이단들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도 배워야 하고 어떤 때는 정교회로부터도 배워야 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WCC 총회에서 개신교의 몇몇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발표한데 비해 정교회의 주교는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했는데 개신교의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보다 정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이 더 옳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러시아 침례교회 목회자들이 아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진지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좀 의아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잘 받아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장로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침례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순복음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칼빈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루터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웨슬레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제한되어 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 아니면 서로서로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흐믓해 하고 모두들 좋아하는 듯 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적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끊임 없이 대화를 하여야 하고 또한 미래와도 끊임 없이 대화를 하여야 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땅과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나 자신과 땅에서 벗어나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초연’의 자세를 지니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저 위에서 아니 저 마지막 종말의 정점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종말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도록 힘쓰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생각의 눈이 띄어지는 듯했습니다.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물과 같은 그리고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는 무상한 존재들이지만 영원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을 붙잡기만 하면 우리의 무상한 삶이 영원에 속하게 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종교라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플라토주의나 불교와 달리 영원과 연결되는 현재를 사는 종교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무조건 적대시하는 ‘배타적인’ 태도와 무조건 받아드리는 ‘적응적’ 및 ‘종합적’ 태도와 양자간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는 ‘이원론적’ 태도가 있는데,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부정을 거쳐 변혁을 시도하는 ‘변혁적’ 태도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거스틴과 칼빈과 요나단 에드워즈가 문화변혁주의를 가르쳤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교회의 기도의 인물들 길선주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김삼환 목사를 소개하며 저들의 처절한 회개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역 때문에 한국교회는 부흥과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세 가지 특징은 약함과 착함과 땅끝 지향적 주변성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의 모형은 하늘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성육의 사건과 성육적 삶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모두들 아주 좋아했고 모두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먹고 함께 강의하고 함께 지나면서 아주 가까워졌고 아주 친해졌습니다. 대신측 부흥사 최복규 목사님의 부흥회 설교도 잘 받아드렸고 순복음교회의 홍영기 목사님의 순복음적 강의도 대체로 잘 받아드렸습니다. 며칠 동안에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던 저들의 생각과 안목이 확 트여지고 넓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하루에 두 번씩 러시아 목회자들과 탁구를 열심히 쳤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번 내가 이겼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셔서 탁구도 잘 치게 되었다고 러시아 목회자들이 즐겁게 말하곤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교회사 이야기의 실험”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셋째,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우리가 목회자 수련회를 시작하는 시간부터 주 정부의 종교담당관이 비서 한 사람을 데리고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살피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주최측에게 참석자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최측도 러시아 목회자들도 모두 긴장을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꼬투리를 잡히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선교사들은 항상 그런 긴장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 종교담당관은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교회에 속해 있었을 것입니다. KGB 즉 정보부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말을 나중에 주최측이 나에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첫날 이야기식 강의를 열심히 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도 강의 시간에 맞게 일찍 나와서 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노트에 빼곡히 강의 내용을 적고 있었습니다. 셋째 날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최측이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 종교담당관이 저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갔습니다. “좋은 강의를 해 주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저의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나라와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힘과 정신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거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순교가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세미나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음에 다시 오시면 ‘물질 주의’ ‘진화론’ 등에 대해서 강의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좋은 모임이었습니다.” 너무나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주최측이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교회사 이야기의 실험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 이야기는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 저기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사의 이야기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주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성령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블라디보스톡 목회자 수련회가 은혜와 감동과 위로와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좋은 수련회가 되도록 새벽마다 기도해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힘에 넘치는 사랑의 헌물로 지원해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사님들을 마음껏 대접할 수도 있었고 몇 분들에게는 100불씩 격려금도 전달하면서 사랑과 위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풍성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의 쓸 것을 넘치게 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여러분들에게 감사, 그리고 현지에서 지금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교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선교 보고를 마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6-9) (0) | 2022.08.31 |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요 11 : 17~37) (0) | 2022.08.31 |
신자의 죽음과 천국 (요14장 1~3절,벧전1장 3~7절) (0) | 2022.08.31 |
그 뒤를 좇으라 (여호수아 3:1-6 ) (0) | 2022.08.31 |
다시 찾아야 할 것 (갈3:11~14) (0) | 2022.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