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죽음과 천국 (요14장 1~3절,벧전1장 3~7절)
지난번에 3,000년 묵은 미라 속에서 완두콩을 발견하고 그것을 심었더니 3,000년이나 묵은 콩이지만 땅에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꽃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100년 미만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영원한 고통이 계속되는 지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1. 신자의 죽음과 천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혈과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blood and flesh)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셨 습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54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death has been swallowed up in victory). 고리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earthy tent)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또 바울은 육신으로 더 살면 주의 일을 더 하게 되니 그것도 좋지만 죽으면 내게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죽는 것과 사는 것)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2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복음 3장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우리의 참소망은 부활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천국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크리스천들까지 죽음의 문제,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세상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더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을 때 허무주의나 향락주의자의 말같이 느끼지만 그 모든 말씀은 결론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2. 천국은 어떤 곳인가?
① 천국의 소극적인 면(없는 것들)
⒜ 밤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밤이 없다는 것은 흑암과 죄악과 공포의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밤은 위험합니다.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에는 밤에 걸어다닐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범죄가 밤에 이루어집니다. 이런 죄악과 공포의 대상인 밤이 없고 대신에 주님의 영화로운 빛이 천국의 구석구석을 비취시므로 등불과 햇빛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과학과 의술이 발달해서 질병과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많이 생겼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온갖 고통과 불안이 꽉 차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암병, 신경통, 에이즈 등 온갖 질병과 고통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이런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 죽음과 슬픔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습니다. 슬픔과 죽음이 손 못 대는 가정이란 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웃어주지만 그 웃음 뒤에는 쓰라린 상처와 슬픔이 숨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희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입학 때문에, 등등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목사는 근심이 없을 것 같지만 목회하다보면 밤잠이 안 오고, 밥맛도 잃고, 어떤 때는 빨리 천국에 가고 싶은 때도 종종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돈도 많고 집도 좋고 온 가족이 건강하여 아무 걱정이 없어보이지만 탁 털어놓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더 큰 걱정과 근심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걱정과 근심이 어데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오직 천국에 가야만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 범죄케 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문명하고 살기 좋은 나라도 죄가 없는 곳은 없으며 마귀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하여 죄악 중에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죄악의 씨는 갓난아이 속에도 있어서 마치 독이 있는 꽃처럼 모습은 예쁘지만 죄악과 함께 자랍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의 유혹을 순간순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세상과 마귀는 우리를 대적하고 유혹합니다. 또 그 배후에 있는 엄청난 불행과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하며 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유혹이나 범죄함이 없습니다. 모든 마귀는 불못에 던지워지고,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 바다가 없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고 하셨는데, 바다가 없다고 했지 생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 폭풍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을 때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둘러싸인 바다에서 무서운 파도 소리와 울부짖는 바람 소리가 무섭게 그 귀를 때렸을 것입니다. 그는 폭풍과 같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생명수 흐르는 강물뿐이요, 그 무서운 폭풍의 바다가 없습니다.
◉ 바다는 고달픈 곳입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면 파도에 부딪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멀미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고해와 같아서 참 평안이 없습니다.
◉ 바다는 이별을 의미합니다
저 육지를 가로막아 쉽게 건너지 못하게 하는 이별의 장소입니다. 옛날, 사랑하는 식구를 바다 건너보낼 때에 얼마나 슬퍼하며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이별이란 없습니다.
⒢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해마다 조금씩 침식해 들어가면서 변해가고 있습니다. 대 애굽도, 바빌론도, 로마 제국도,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뉴욕도, 도쿄도, 서울도, 다 변하여 없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습니다.
② 천국의 적극적인 면(있는 것들)
천국에 있는 것들을 다 열거할 수도 없고 인간의 말로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천국을 사모한 나머지 세상 생활을 등한히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 아름다운 성이 있습니다
그 성벽은 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고 열두 진주문이 있고 그 길은 검은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된 것이 아니라 맑은 유리 같은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병원도 없고, 술집도 없고, 형무소도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이 있습니다.
⒝ 기쁨과 행복이 넘칩니다
천국은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항상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과일이 다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일의 천 배를 더한다고 해도 천국만 못합니다. ⒞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내 집, 내 가정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입니다. 세계를 여행 하다가도 내 집, 내 가정에 돌어올 때 제일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도 천국에서 가장 나쁜 집만 못하다고 봅니다.
⒟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순금의 거리가 있고, 열두 진주문이 있고, 각종 보석으로 된 성곽이 있고, 아름다운 집이 있고, 면류관이 있고, 별별 것이 다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했습니다. 꿈속에서 혹은 환상 중에 예수님을 한 번 뵈어도 평생 잊지 못하고 간증하는데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뵐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유명한 부흥사, Billy Sunday 씨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그 분을 만나 뵈면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려 나를 구원해주시고 사용해 주심에 대해 감사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3. 천국에 들어가려면
요사이 Haward Pittman이란 분의 간증책을 읽어보았는데 그 미국 사람은 경찰서장까지 지낸 분으로, 어느 날 동맥이 파열되어서 죽어 있는 동안 3층천, 천국을 다녀보고 왔고 2층 천의 타락한 천사들, 마귀들이 활동하는 것도 다 보고 온 분입니다. 그의 책 “플라시보”란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참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았거니 하고 다니지만 실상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내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 종교나 믿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 많이 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영접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신 대로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피로 죄 씻음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다음 기도를 진실한 마음으로 따라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 내가 주께 왔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김홍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요 11 : 17~37) (0) | 2022.08.31 |
---|---|
블라디에서의 만남과 나눔과 기쁨 (마28:9-10, 행2:42-47) (0) | 2022.08.31 |
그 뒤를 좇으라 (여호수아 3:1-6 ) (0) | 2022.08.31 |
다시 찾아야 할 것 (갈3:11~14) (0) | 2022.08.31 |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수준 (눅 19;1-10) (0) | 2022.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