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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집 나간 탕자! 돌아온 아들! (눅15:11-24)

by 【고동엽】 2022. 8. 31.

 집 나간 탕자! 돌아온 아들!  (눅15:11-24)

어느 모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의 열기가 최고조로 달했을 때에 한 중년 남자가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소! 누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나와 보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자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5분 내로 증명하겠소!" 그는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혹시 여러분 중에 날카로운 칼을 가진 분이 없습니까?" 누군가가 그에게 칼을 건네주자 그는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 내로 죽이시오! 만일 나에게 5분 내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요!"
  1분! 2분! 5분! 드디어 5분이 지났지만, 그에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더 당당해진 그 사람은 "이것 보시요! 하나님은 없거나 죽어버린 것이요! 만일, 살아 있다면, 또한 예수쟁이들의 표현대로 전지전능하다면 나 같은 사람을 그냥 놔둘 리가 있겠습니까?"
  모임이 끝나자 그 중년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을 합니다. "여보게 자네가 한 행동을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도 자식이 있나!"
  "물론 있지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가 아까 그가 들었던 칼을 쥐어 주면서 말을 하기를 "만일 자네 자녀 중에 한 명이 이 칼을 들고 '나를 죽여주세요!' 한다면 자네는 죽일 수 있겠나?" "할머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내가 네 아들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이요!"  그러자 할머니는 그에 손을 잡고 조용히 말을 합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 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그러면서 깨우쳐 주기를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얼룩진 인생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 시라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 곁을 떠나간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참으시며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답니다. /할/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노란 손수건>이라는 단편이 있었습니다.
  광활한 미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버스에 젊은이들이 가득 타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중서부의 한 정거장에서 웬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 한 명이 버스에 탔습니다. 청년은 버스 구석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습니다. 버스에 있던 젊은이들은 커피와 도넛을 나누어주면서 말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마음이 열린 그 청년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청년은 고등학교 때 집에 있는 돈을 다 훔쳐서 무작정 도시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타향 객지에서 금세 돈을 탕진한 청년은 그 뒤 먹고살기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가 마침내 도둑질까지 해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이 청년은 자신이 부모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비로소 깨닫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면서, 하지만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 용서해 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자기가 출옥하는 날 바로 고속버스를 타면 오후 몇 시쯤에 동네 앞 버스 정거장을 지나게 될텐데, 만약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그 정거장 앞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걸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추호도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난 젊은이들은 일순간 술렁대기 시작했고, 곧 청년의 고향 가까이 모두들 창에 매달려서 문제의 은행나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청년은 너무 떨려서 감히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서서히 커버를 돌면서 마침내 문제의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밖을 보던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청년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게 했습니다. 은행나무 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이 몇 장씩 매달려 있어서 은행나무 전체가 노란 잎으로 출렁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 앞에 웬 노신사가 엄청나게 큰 노란 깃발을 들고 버스를 향해 힘차게 흔들어 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버스가 멈추자, 청년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습니다. 젊은이들은 꼭 껴안고 울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오늘 본문에도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소개!▶

  눅15장은 주옥같이 귀한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7절까지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이고, 8-10절까지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꺼이 영접하는 어진 아버지"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본문의 비유를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선한 목자 되시는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고, '드라크마의 비유'는 '등불을 들고 찾는다고 해서 성령의 사역'으로 보았으며, 본문의 '탕자의 비유'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모두가 다 '잃었다가 도로 찾았고, 하늘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이야깁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고, 또한 여인은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습니다. 이 비유는 똑 같이 잃어버린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에 다른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은 가만히 있어도 된단 말인가?" 이런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죄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들 편에서의 결단을 상단부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회계하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회계에 관한 비유'라고도 합니다.

1.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분 깃을 주소서!" 그러니까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창25: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인 이삭과 그의 서자들에게 자기가 죽기 전에 그들의 분 깃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신21:17절에 보면 장남은 재산 분배시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을 것입니다. 재산을 분배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친이 자식에게 주는 은총이요 선물이지 권리가 아닙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살길이 막막해 졌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돼지를 치는 이방인의 집에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 즉 더부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마저 내주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은 잃은 잡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 많은 재산을 잃어버렸고, 그 좋은 건강도 잃어버렸고, 그 좋던 행복도 잃어버린 잡니다. 여러분! 사람이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픔이요, 고통이요, 괴로움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행여나 건강을 일어버렸습니까? 재산을 잃어버렸습니까? 명예와 인기를 잃어버렸습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행복을 잃어버렸습니까?
  잃어버린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믿/ 다 잃어버렸다 해도 예수님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언제 잃어버렸는지? 열심을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도하는 습관, 봉사하는 열심을 언제 잃어버렸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찾으십시다. 찾아야 삽니다. 찾아야 회복되고 일어섭니다. /할/
  오늘 집나간 탕자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창세 이후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탕자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주님을 의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잃어버리시고 슬퍼하십니다.
  본문의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항상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멀리 창세기 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났습니다. 사탄의 꾐에 넘어간 그들은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수치가 들어 나자 숲 속으로 도망갔습니다. 창3:9-10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지은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타락된 인간들의 삶 속에 날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사실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의 최대 효성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얻음으로 기뻐하지만, 부모님은 눈앞에 자식 그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자식이 없는 부모의 마음은 쓸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지금 아버지 앞에 바로 서 있는지, 아버지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아버지 앞에 떠나 있는 자식은 아닌지 우리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잃고 "내 아들아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며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아버지가 잃은 아들을 찾는데서 발견됩니다. 우리 주님은 양 99마리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죄인 하나가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을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아버지의 태도는 우리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표시한 것입니다.

2. 집 떠난 탕자!

  ①아버지 곁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
  먼저 먼 나라로 갔습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집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며 두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여기에서의 먼 나라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는 하나님의 품과 교회를 떠나 제 멋대로 살고 싶어 이 세상이라고 하는 먼 나라로 떠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교회생활 하면서 사는 것이 그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모르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 제 멋대로 살고 싶어 이 세상으로 떠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탕자의 근성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곁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으로 나가려는 죄의 유혹에 빠져 타락했습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 곁을 떠나려고 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보겠다는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자유가 없어지니 교회에 나가기 싫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주안에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그런데 사람들이 자유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제멋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에덴동산에다가 두었을까?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 글쎄 선악과를 만들었어도 따먹지 못하게 했으면 됐을 텐데. 왜 자유를 주어서 먹게 했을까?"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로버트처럼 만들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이 인간일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는 생명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기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면서 생명을 걸고 투쟁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가정생활을 해야하고, 자유롭게 직장 생활을 해야 하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 자유로워야하나 법도 안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법을 떠난 자유는 자유일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법도와 사람의 법도, 하나님의 질서와 사람의 질서가 있습니다. 창조주의 질서와 피조물의 질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도 목회자가 걸어야할 길이 있고 평신도가 걸어야할 길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지켜야할 법도가 있고 자식들이 지켜야할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파괴되고 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자유롭게 산다고 하면서 매사를 제 마음대로 한다면 그 가정은 깨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자유로워야하나 법도 안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기차가 레일 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레일을 떠나면 탈선하고 전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인간은 인간이 걸어야할 법도가 있는데 그 법도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거기서 탈선되면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법도를 떠나서 제멋대로 사는 것을 방종이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지금 방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 문제가 됩니다. 12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여러분! 모두가 아버지의 것인데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할 때, 탕자가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양을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주시므로 곡식을 익게 합니다. 인간이 수고하지만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열매를 맺게 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쌀 한 톨, 사과 하나 열매 맺지 못합니다. /믿/
  모든 물질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도 그렇습니다.
  신8:17-18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돈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여건도 주셨습니다. 건강도, 지혜도 그 분이 주신 줄 믿습니다. /할/ 그렇다면 그 물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신다면 하나님은 떠 크게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탕자는 자기가 그 재물을 소유하면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탕자처럼 아버지를 멀리하고 물질적인 부를 통하여 행복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리 풍부한 물질의 분 깃을 가져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②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낭비하는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찾아옵니다.
  그가 먼 나라에 가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니까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한 것'뿐입니다. 낭비의 인생, 허비의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난 아들들이 객지에서 자칫 잘못하여 못된 친구를 만나 물질을 낭비하면서 타락의 길을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부유층의 자녀들, 대학 입시 기피용 유학 때문에 교포사회에 심각한 문제들이 많답니다.
  큰아들의 말을 빌리면 탕자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탕진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여기 13절 "허랑 방탕하다'는 원어의 뜻은 '중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탕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날그날을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곧 탕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아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악 된 세상에 빠져 어두움의 일을 도모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가리켜 탕자라고 합니다.
  또한 세상에는 빠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만하여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인색함과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 불만 하는 태도, 아버지 앞에서 불순종하는 자녀가 탕자들의 모습입니다. 신21:20절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본문의 탕자는 하나님을 떠난 다음부터 소비의 인생, 낭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③탕자가 있는 곳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의 기근이 찾아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영 육간의 기근입니다. 이 사실을 안 미국 '윌리암 맥도널드' 감리교 목사는 찬송가 440장에서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처량하게 됩니다. 곤고하게 됩니다. 슬픈 인생이 되어 외롭게 정처 없이 헤매는 비참한 운명의 사람이 됩니다.
  암8:11절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 없이 살면 영육간의 기근과 궁핍이 온다고 했습니다.

  ④하나님을 떠난 탕자는 돼지처럼 살게 되었습니다(15-16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기에 그 고기는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그런 부정한 동물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습니다. 영광스런 아들이 짐승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시49: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탕자의 삶의 자리는 돼지우리였습니다. 더럽고 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자요 하나님이 주인이신 사업장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시84:10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할/ 하나님의 문지기로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자에게 최대의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탕자는 욕심으로 얻은 재산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라" 바로 이것이 자신의 분깃을 요구한 그 아들이 하고자 했던 일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 갔습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관심과 간섭이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기를 좋아합니다. 부모의 속박을 벗어나서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에 끌리어 젊은 혈기로 방종하기를 좋아합니다.
  모든 범죄는 하나님을 떠나는데서 시작됩니다. 이 먼 나라는 지금 우리들 마음에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있으면서도, 교회 일을 하면서도, 먼 나라의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안 된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허비의 인생이요 낭비의 인생을 살며 그곳엔 흉년이 오며 또 그 삶의 분위기가 돼지 쥐엄 열매를 먹는 불쌍한 존재임을 오늘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돌아온 아들!

  우리는 보통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과 자기 인생을 탕진한 집나간 아들을 향하여, 단 한 번도 '탕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탕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리켜 '둘째 아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큰 감동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복음이구나! 그러기에 우리가 아직도 소망이 있구나! 주님은 우리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구나!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한 번도 '탕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안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할 만한 가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야! 품꾼의 하나라고? 말도 안 된다. 나는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너는 내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내 아들'이다!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십니다. 그렇게 받아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①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역경에 처하면 두 가지 형태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가롯 유다 형으로 앞길이 담담하고, 캄캄할 때, 목매달아 죽으러 가는 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 형입니다.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불 신앙에 빠졌다 할지라도 돌이켜서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게 보시고 더 큰 믿음으로, 더 큰 은혜로 축복을 주십니다.
  은혜는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됩니다. 은혜는 자기가 자격이 있어서 어떤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은혜는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은혜는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이 이 은혜를 받은 잡니다.

  ⑴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는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이 길이 살길입니다. 탕자는 현재 자기의 처지에서 돼지 치는 일을 불평하거나 곁을 떠나버린 친구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먼 나라에 가도록 내버려둔 부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자기의 심령을 깨닫는 것이 살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풍랑을 만난 것이 자신 때문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요나는 거기서 스스로 돌이켜 큰 사명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
  ▶돌이켜 하나님을 찾는 길이 축복의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 없다고 외치는 자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55:6-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죄인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자가 망합니다. 사울 왕이, 헤롯왕이, 가롯유다가 회개하지 않아 망했으나, 베드로는 회개해서 대 사도가 되었고, 다윗은 회개해서 성군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정의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아는 것이 '지'요, 깊이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이 '정'이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의'입니다.
  
  ⑵탕자는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쳤습니다(17-19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탕자는 자신의 죄를 알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탕자는 아들 될 자격이 없는 허물 많은 죄인임을 깨닫고 아버지가 어떻게 대해도 겸손히 낮은 자리에 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눅18: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회개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구원에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믿/

  ⑶일어나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행함입니다(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더 이상 죄악의 길에 있지 아니하고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결단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만약 병원에서 병명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치료받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들면 세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어떤 아이는 불평, 원망을 하면서 도망을 칩니다. 또 고집 센 아이는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울기만 합니다. 그러나 착한 아이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이 심령을 때리면 목사가 설교로 나를 때린다고 불평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로 자신을 친다고 하면서 누가 이기나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도는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며 겸손히 뉘우칩니다.
  이런 사람은 축복 받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우리 성림의 모든 성도들은 다 이런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아멘!/

  ②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20절).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봤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일보 전진하면 하나님께서는 백보 달려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매일 고대하면서 기다렸기에 비록 아들의 모습이 변했고, 상거가 멀었으나 즉시 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아들은 서서히 걸어갔으나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동작은 느리고 하나님은 매우 빠르십니다.
  그리고 아들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벌써 아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입니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자마자 은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자마자, 우리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예수님을 향해 "주여!" 부르자마자 주님은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믿자마자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 현재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사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할/
  
4. 돌아온 아들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22-23)?

  ①제일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성경에는 옷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슥3:3-4절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롬13:12-14절 "빛의 갑옷을 입으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옷은 죄 사함을 받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영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옷이 바로 이 아들에게 입혀주는 옷입니다.
  사61:10절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옷 자랑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옷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옷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의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입혀진 옷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많이 자랑하고 사셔야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의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떳떳하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②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 징표는 신분의 확인이고 권리의 확인입니다.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내 아들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반지 사건도 많이 나옵니다. 창41:41절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다스리게 하리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바로 왕이 자기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준 것은 왕권을 나눠 준 것입니다.
  이 반지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우리는 권세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권세입니다. 형제를 위해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지자의 권세입니다. 악령을 물리치며 이 땅위에서 우상을 이기는 것은 왕의 권세입니다. 성도들은 제사장 권과 선지자 권과 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락지 이것을 또한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③발에 신발을 신겼습니다.
  탕자의 더러운 신발을 벗기고 깨끗한 신을 신겼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내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말씀은 '새로운 삶의 출발이요, 사명자의 발걸음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아들이 신은 신발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가라는 신발입니다. 엡6: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아직도 세상 길에서 헤매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할!/

  ④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온 이 아들을 위해서 거창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잔치는 축제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생명의 축제요 회복의 축제입니다. /아멘!/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집나간 탕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가정을 잃었고, 재산을 잃었고, 명예를 잃었고, 평안을 잃었고, 행복을 잃었고, 기쁨을 잃었고, 감사를 잃었고, 소망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자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가정을 찾았고, 재산을 찾았고, 명예를 찾았고, 평안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고, 기쁨을 찾았고, 감사를 찾았고, 소망을 찾았습니다.
                    

출처/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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