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축복 (요1:6-18)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6-18
인간은 만남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출발 자체가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모태에서의 어머니와의 만남, 출생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그 모든 것이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남 속에 행복과 불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일생이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을 잘 만나서 일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남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1. 나와 나와의 만남 속의 축복
그 어떤 만남보다도 나와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즉 자랑할만한 것이 있었습니다(빌3:4-7). 육체적으로는 그 누구도 바울을 따라 잡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교만할대로 교만한 사람이요 대단히 의기양양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기와 자기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사울이 바울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고백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0)." 이 만남은 누구에게든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거듭난 때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처음 믿음을 가진 때를 말합니다(딤전5;12). 처음 믿음이란 단순한 열심을 말하지 않습니다(롬10:2). 처음 믿음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때를 말합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을 처음 믿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처음 믿음을 가진 후에 열심히 주를 섬겼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고후5:13). 그는 중생의 체험을 한 후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고후11:23-27). 사람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족했습니다. 육은 물질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목마르면 마시면 되고, 추우면 입으면 됩니다. 물질만 있으면 육체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만족은 하나님과의 접촉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환경이 어려우면 영이 육에 정복됩니다. 배고프면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으면 환경에 관계없이 영이 육을 지배하게 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고후4:7-8).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도 기도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행16:25). 이것은 나와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와 나와의 만남이 있어도 갈등을 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은혜를 받고 많은 사람을 회개하게 했으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벧전2:11).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성령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하는도다"고 했습니다(롬7:15-19).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시107:1).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과의 만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나의 이웃과의 만남 속의 축복
우리는 눈만 뜨면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언제나 이웃과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이웃을 통해서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오는 것을 인복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잘 만난 복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며, 학생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스승은 학생을 잘 만나야 합니다. 백성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고 지도자는 백성을 잘 만나야 합니다. 서로가 잘 만나야 합니다.
만남 속에는 좋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만남이 있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놓고 누구를 닮아서 그러냐고 합니다. 자기 자식을 놓고 '저런 자식이 다 있느냐'고 합니다. 좋은 것은 자기 닮고 나쁜 것은 상대방 닮았다고 서로 싸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난 아들입니다(갈4:22). 곧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사라를 통해서 난 이삭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불행한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약속의 자녀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역사의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이 불행한 만남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이스라엘과의 싸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야곱과 에서의 만남이 불행했습니다. 그들은 쌍둥이로 태어날 때부터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싸웁니다(창25:22-26). 그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태어나서도 장자의 축복권을 놓고 싸우게 됩니다.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고 형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후에 가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에서와의 만남도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을 만나야 축복입니까? 그 어떤 만남도 진정한 축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남 속의 인간의 만남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의 만남이 불행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사위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보다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더 얻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죽이려고 합니다(삼상19:9). 그러나 다윗에게는 축복된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만남입니다(삼상19:1-7). 어쩌면 원수관계이면서도 그들은 아름다운 우정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요나단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만남도 불행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리지만 요셉은 그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자 애굽에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창45:5-8). 요셉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대성통곡을 하나 형제들은 자기들의 죄가 생각이 나자 두려워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의 불행한 만남은 요셉이 참고 인내함으로, 형제들을 용서하고 관용함으로,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임으로 행복한 만남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이 축복은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됩니다(창50:20).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갑니다(눅10:30-37). 이 때에 자기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갑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될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조금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과는 원수관계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와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웃을 만나기도 해야 하겠지만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복된 만남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3.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고 나옵니다. 만남의 축복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만남은 잠깐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만남은 영원한 축복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귀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모든 만남이 축복이 됩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외로운 한 밤을 지날 때에 하나님을 만납니다(창28:10). 그 후에 하란에서 20여 년을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얍복 강에 이르렀을 때에 앞에서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답답해 합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기도합니다. 사력을 다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두려운 만남이 행복한 만남으로 바뀌었습니다. 축복된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해하고 싶어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유익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얽히고 설킨 모든 만남이 풀어지게 됩니다. 만남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빠져버립니다(15).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서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후에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절대로 불행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행해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 속에서 만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은 응답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찬송 속에 만납니다. 우리의 찬송 속에 하나님은 화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속에 살아야 합니다. 기도 속에 살아야 합니다. 찬송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감사입니다. 감사를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남의 축복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만남의 축복이란 하나님을 만난 자를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매일매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에 만남의 축복이 여러분 위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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