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4:21~31)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성장, 즉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물론 질적인 성장을 등한히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적인 성장에 더 역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놀라운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최근 한국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즉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빠지지 않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크리스챤, 즉 건강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좀 더 철저하게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건강한 크리스챤입니까? 과연 우리는 건강한 교회의 지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볼 때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은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신약 교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기자도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을 “광야교회”(행 7:38 참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 즉 광야교회는 과연 건강한 교회였을까요? 오늘 우리가 본받고 싶은 건강한 교회였다고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광야교회가 건강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행복한 교회였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리고 그렇게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인도하셨던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광야교회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렇게 생생하게 경험한 교회는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광야교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린 교회는 없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그토록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오직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그 어떤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장자의 죽음 때문에 곡하는 대신에 생명의 찬가를 기쁘고 즐겁게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온 애굽 땅을 뒤덮었을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 노예들은 생명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생명을 되찾은 벅찬 감격을 안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를 섬기기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구원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광야교회는 그렇게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복을 받기는 했지만 받은 바 그 복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찮은 어려움 앞에서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의 기록을 보면 애굽의 병거들와 마병과 군대가 총동원되어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을 추격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총동원되고 뛰어난 지휘관들로 구성된 추격대가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뒤를 보면 애굽의 군대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또 앞에는 홍해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닥칠지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그 산을 넘을 수만 있으면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그 기도는 곧바로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다 죽었구나! 이제는 망했구나! 끌려가서 또 다시 노예로 살 수밖에 없구나!” 그들은 염려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곧 이어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에게 하신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안이었습니다.
“바로의 군대에게 잡힐까봐 너희가 불안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차분히 지켜봐라! 나를 신뢰하면서 조용히 있어라!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괜히 당황하지 말고 나를 바라보며 좀 가만히 서 있어라!”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해법이었습니다.
사실 히브리 노예들이 어떻게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까? 신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적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 하나님의 방법을 믿지 못합니까? 왜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까? 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해법은 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단단히 무장한 최정예부대가 추격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믿음은 문제가 없을 때에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은 믿음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이 강퍅해졌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새 그 벅찬 구원의 감격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문제가 있을지라도 좀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좀 조용히 있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문제를 풀기 위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괜찮다는 말입니까? 왜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가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으며 또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분명히 알게 하기를 원하셔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노예들을 친히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즉 광야교회를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 영원한 본향으로...
전에 이런 우스갯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열탕에 들어가 앉아서 말했습니다. “아이 시원해!” 아들이 물었습니다. “정말 시원해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시원하고말고... 너도 빨리 들어와!” 아들이 조심스럼게 발을 넣었다가 급하게 빼면서 외쳤습니다. “아이쿠 뜨거워!” 이어서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세상에 믿을 X 하나도 없네...”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약간 뜨거울지 모르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진짜 시원함을 맛볼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요즘 거여, 마천 지구가 온통 난리입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라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국을 투기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동산 정책은 대책없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미국도 집값이 요동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정부는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값이 결정되도록 시장 기능에 맡겨 놓습니다. 정상적으로 집에 투자한 사람들은 집값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투기 목적으로 과욕을 부렸던 사람들은 집값이 갑자기 많이 내리면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괜히 정부에서 간섭하는 바람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점점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는 시장 기능을 믿지 못하고, 그 결과 국민은 정부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왜 그들은 건강한 교회로 서지 못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또 원수의 세력이 뒤에서 맹렬히 공격할지라도, 그래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사랑으로 여러분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를 삼으사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뿐 아니라 마침내 영원한 하늘 기업을 유업으로 잇게 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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