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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6:9-13)

by 【고동엽】 2022. 8. 28.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6:9-13)


광복62주년이 맞는 주일입니다. 광복과 함께 민족이 분단된 지 62년이 흘렀습니다. 분단된 조국이 평화로 통일 되게 하소서. 북한이 복음화 되게 하소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목동이 매일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양을 많이 주세요.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느 날 한 성직자가 그 동내를 들렀다가 목동의 기도를 듣고는 기도가 잘못됐다며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동은 그 다음부터 기도를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새로 배운 기도를 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하던 기도마저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성직자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그 목동이 기도를 못하도록 만들었느냐?
나는 그가 드리던 기도를 아주 좋아했느니라.”
성직자가 목동을 다시 찾아 갔을 때, 목동은 전혀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 성직자에게, 지난 번 가르쳐 주신 그 기도를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에 하던 대로 하라고 했더니, 전에 뭐라고 기도했는지도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성직자는 목동이 본래하던 기도를 다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양을 많이 주세요.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여러 주 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기도의 생활을 좀 더 진지하게 잘 할 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혹시 기도의 가르침을 생각하다가 본래 하던 기도조차 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은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가르친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올바른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소기도하시는 내용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대개”라는 말은 기도의 이유를 가르치는 접속사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리고 “대개”로 이어집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 이라는 뜻인데, 기도를 이렇게 드려야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같은 말을 반복하여 암송함으로 자기를 최면 하여 그것이 신념이 되게 해서 무엇을 이루어 내는 “주문”이 아닙니다. 술사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주술적인 암송글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기도를 드리는 사람과의 깊은 인격적인 신뢰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하나님은 나라의 영원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에 사탄이 침입하여 잠간 동안 어둡고 혼란하며, 복잡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주권을 사탄에게 넘겨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친히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구약성경 욥기는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적인 일들 배후에 영적인 작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어느 날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갑작스런 환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왜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계속 묻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까닭 없는 결과가 없다며 망한 이유를 죄의 결과라고 말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지만 욥은 언젠가 자신 앞에 나타나 명백히 말씀하여 주실 그 하나님을 기대하며 고난의 세월을 참고 인내합니다. 그런데 욥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단이 욥을 시험하는 한계를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닥친 시련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고,(욥1:12) 그의 생명만은 손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욥2:6)
고린도전서10:13에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강력한 도전이 사실상 욥을 완전히 참패하게 할 것처럼 보이지만 욥은 그 고난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42:1,2, 5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때로는 어둠의 악의 영들이 온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어려울 때가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의 어두운 동체를 통하여, 밝은 세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어둡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입니다.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밝은 대낮에는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이라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밤에 새로운 하나님의 신비를 보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밤이 어둡다고 힘들어할 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겼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주권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백성들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라 늦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취소되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광야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방황은 의미 없는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그 백성들의 준비를 위한 값지고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소중한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게 억류되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상당한 아픔을 안겨주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고난의 세월들과 희생의 값을 결코 무산시키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많은 희생과 고난 가운데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러 선교팀들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당분간 그 곳의 선교가 어려워지겠지만, 하나님은 그냥 주저앉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금년 한국교회부흥100주년을 맞이하여 10만 선교사의 시대를 선포한 이래 처음으로 겪고 있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은 선교의 의지를 꺾어버리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무장시킬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영원한 권세자이십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에게 권세가 없다면, 그 나라의 통치는 뿌리 채 흔들리고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 라는 말은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하신 그 권능과 동일한 말입니다. 영어의 “다이나마이트”(dynamite) 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권세는 강력한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강력한 권세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집트로 이주해가는 야곱의 후손들을 보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에 후의에 의하여 애굽으로 건너가서 고센 땅에 정착하여 살아오던 그 백성에게 환난이 닥쳐온 것은 요셉의 시대가 끝난 다음부터였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들들이 태어나면 다 죽였습니다. 이 때 태어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각오하고 일어났습니다. 그 일이 탄로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 동안을 양을 치는 목자로 지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바로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왕을 움직이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하게도 하시고, 그의 마음을 마침내 돌이키게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곳에서 강력한 국민으로 번성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고난을 받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을 출애굽 하도록 역사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한 순간에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그들 중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의 샘물을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신발이 헤어 지지 않게 하셨고, 옷이 닳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력한 권세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십니다.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당신의 섭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원수들의 움직임까지 조율하십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판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희일비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내 생각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할 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지만, 모든 일들이 엉망으로 뒤틀리고 꼬이고 복잡해지면 이해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돕고자 하는 생각은 있는데 힘이 없어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의 현장 속에 신음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의 처형의 그 부조리와 폭도들의 아우성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을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재물로 받으시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보고 감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섬세하게 움직인 붓의 색깔 속에서 작가의 깊은 사상을 읽습니다. 가끔 비구상 그림을 보노라면 마치 장난을 하듯 물감을 풀고, 어지럽게 난장판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확신하기는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그 작품을 내걸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의 한 조각, 조각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조각이 그 작품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그림은 완성이 됩니다.  
가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때로 여기저기에서 하늘이 구멍이 뚫린 듯 집중 호우가 쏟아지고, 낙뢰로 사람이 죽어서 실려 가고, 무고한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죽거나 고생을 하고,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데 되는 것 하나도 없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방치하는 듯한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서, 당황도 되지만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능력으로 당신의 선하신 섭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땅에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때때로 상황이 어려워지고, 불리한 방향으로 계속 나가게 되면 이런 걱정을 합니다. “혹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영광이 치욕이 되도록 역사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다시 욥을 생각합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며 의롭게 산 그에게 다가온 시련은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사업은 하루아침에 다 망하고, 자녀들은 갑작스런 사고로 다 죽어나가고,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꼴을 지켜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입을 엽니다.
욥기2:9입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몰아붙이며 말합니다.
“죄짓지 않고 망한 사람 보았는가? 빨리 죄를 회개하라.”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자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던 욥에게는 이 고난은 실로 가혹하였습니다. 욥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상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 욥을 통하여 의인들의 고난의 대명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야고보서5:10,11의 말씀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여러분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보십시오.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욥을 고난과 인내로 복을 회복한 믿음의 본보기로 세우셨습니다.  욥이 당한 그 고난으로 하나님은 믿음의 승리자의 한 모델을 빗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손상함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요한복음17:1-5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기도의 핵심은 나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하셨고 마침내 그 놀라운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나타나는 현실이 영광의 노다지처럼, 보여 지지 않을 때가 많아서 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28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와 영광의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최후의 표현은 아멘입니다. 기도한 대로 믿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아멘”-아멘, 아멘.
하나님의 영광의 일들이 여러분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이 땅에, 우리에게, 우리 후손들에게 다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계속 되는 동안 승리도 계속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최이우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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