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귀한 일꾼 (딤후2:14-21, 사6장1- 8)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을 지향하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사명을 지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성공을 지향하는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지향하는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성공을 지향하는 길은 실패하면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해도 그 인생이 빛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지향하는 길은 성공하면 말할 것도 없고 실패해도 그 인생은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이나 세상적인 성공에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움직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뒤편의 24장로들처럼 우리를 가장 복된 존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그릇이 되려면
1.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여기서 ‘분변하다’는 말은 ‘똑바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마치 석공이 대리석을 바르게 자르듯, 농부가 쟁기로 밭을 곧게 갈 듯, 경주자가 운동장을 규칙대로 달리듯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지 말고 올바르게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논에 물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멋대로 언행을 일삼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뜻에 맞도록 오도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나의 뜻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야베스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에 관해 모르셔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혹시 우리는 말씀에 대해 편식하고 있지는 않은 지요? 듣기 좋은 말씀과 먹기 좋은 말씀만 암송하고 붙잡고 있지는 않은 지요?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 비춰 봐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도록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 4:6)라고 고백했습니다. ‘관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포도주를 붓는 제사입니다. 포도주는 제물의 악취를 제거할 뿐 아니라 완전 연소를 돕는 작용을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많은 후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를 기억하면서도 그를 가르쳤던 디 지오반니를 기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 지오반니는 훌륭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14세의 미켈란젤로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한편 재능이 많은 사람은 얕은 재주로 힘든 훈련 과정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디 지오반니는 미켈란젤로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작품을 망치로 깨뜨린 후 훈계했습니다. “재능은 값싼 것이다. 정말 값진 것은 노력과 헌신이다.” 그 후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조각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고된 훈련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 위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최고의 삶을 드리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19- 21)
2.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입니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차금지 구역에 잠시 차를 세우고 재빨리 식당에 들어가 속히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불법 주차 스티커가 붙어있을 경우입니다. 우리는 편의와 관용을 생각하지만, 교통 경찰은 원칙과 공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6절에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3. 죄악의 모양까지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악을 제거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의 마음과 모든 형편을 아시고 주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19절 말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에서 떠나자, 땅이 갈라지면서 반역의 무리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잠언 25장 4절에서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습관까지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쓰임을 받는 용도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될 때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 받고 용도에도 합당하게 되며 선한 일에 예비함도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요셉, 다윗, 바울 등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4. 깨끗함으로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어야 합니다.
21절 말씀에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항상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깨끗이 준비하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자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달란트를 받았든지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일을 맡겨주십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사람이 더 큰 일에 예비된 그릇입니다. 우리는 작은 임무에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직장, 사회, 국가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방법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을 끊어버리고 믿음으로 준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모든 말다툼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고 하나님께 귀하고 높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기 위해선 삶의 모습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충성된 군사, 규칙대로 경기하는 경주자,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비유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켜나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정받는 일꾼, 귀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소유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달음질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하지는 못해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귀히 사용하실 까요?
1. 하나님께서 스스로 깨끗이 하는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주인이 그릇을 사용할 때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습니다. 재질이나 용도에 관계없이 그릇 사용함에서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릇에 대한 깨끗함의 여부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고 천히 쓰시는 것을 결정하십니다. 내가 남자든 여자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릇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깨끗하게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 깨끗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19절입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교회)에 인을 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16장 5절에서 26절까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레위의 고라, 르우벤의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온이 반역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라며 항의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나고 악취가 심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그녀의 병원(病原)은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12년 동안 치유를 위해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에게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 감히 나아갈 수 없어, 몰래 뒤로 돌아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곧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만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몰래 주님의 능력을 빼앗아 치료받은 사실이 발각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모든 사연을 아뢰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며 축복하셨습니다.
2. 자기 안의 우상을 내버린 사람입니다.
이사야 6장 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간단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소명 받는 장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입니다. 당시 웃시야 왕은 청년 이사야가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대하 26:3),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결국 성전에서 쫓겨나고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대하 26:16-21). 이런 웃시야 왕의 비참한 죽음은 이사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슬픈 마음을 부여잡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그때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성전을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다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내가 우상처럼 여기던 '내 안의 웃시야'가 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주님!"을 간절히 불러도 내 안에 물질의 웃시야, 쾌락의 웃시야, 인기의 웃시야가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크게 보이는 웃시야가 죽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작게 보이고,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면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영안이 열린다!"고 하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웃시야만 죽으면 누구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 은혜 받는 삶,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 끊임없이 내 안의 웃시야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어떤 분은 축구공이 웃시야입니다. 조기축구를 하면 꼭 주일을 빠집니다. 어떤 분은 고기가 웃시야입니다. 낚시 가는 날은 꼭 주일을 빠집니다. 어떤 분은 바둑이 웃시야이고, 어떤 분은 컴퓨터 게임이 웃시야이고, 어떤 분은 사업이 웃시야입니다. 그런 웃시야가 제거될 때 우리는 보좌에 높은 앉으신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과 보좌 주위에 스랍 천사도 보였습니다. 스랍 천사는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았습니다. 이 천사의 모습은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저는 너무 부족한 존재입니다"라는 말이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린다"는 말은 "저의 가는 길을 주님께 온전히 맡깁니다"라는 말입니다. "두 날개로 난다"는 말은 "저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자기의 가는 길을 온전히 주께 맡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면 두 가지 큰 축복을 얻습니다. 첫째, 문제가 작게 보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크게 보면 문제는 작게 보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기초적인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축복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자욱한 안개가 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앞이 30미터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지만 목표지점에 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30미터를 가면 또 그 앞의 30미터는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앞만 바라보고, 보이는 만큼만 전진하니까 어느새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 안개가 낀 길을 달리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래도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앞만 바라보고, 보이는 부분까지만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비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내 앞에 산더미 같은 과제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면 그 해결한 일이 다른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을 암담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비전은 멀리 보되 문제는 멀리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보되 나는 작게 보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도 작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교만하면 아무리 은혜의 조건이 많아도 은혜라고 여기지 못하고, 겸손하면 아무리 은혜의 조건이 적어도 다 은혜로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일 것이고, 우리의 마음의 각종 상처도 다 씻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자신의 실상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사야 6장 5절에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처음 보인 반응이 "나는 망할 놈의 자식이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기도도 많이 하고, 성전을 사랑하고,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부족한 실상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바로 그때가 은혜 받는 때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합니까?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합니까?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만났어도 지금은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빛이 강해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흠과 티가 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에 가까이 가면 흠과 티가 적어도 잘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나의 흠과 티가 크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실상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연약한 실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멋지게 사용하신 이유는 사도 바울이 항상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문제가 풀리고 환경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남의 허물은 작게 보이고 나의 허물이 크게 보입니다. 문제가 내 남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과거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고, 환경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을 때에는 불평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나? 내가 왜 이런 남편을 만났나?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상황이나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달랍니다. "아!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어서 이런 환경을 허락하시고, 이런 선택을 하게 하시고, 어떤 일을 당하게 하셨구나!" 그렇게 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환경과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5. 언어가 정결한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어떤 말을 합니까? 이사야 6장5절을 보세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허물을 말하면서 특별히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랍 천사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특별히 입술이 정결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합니다. 말이 좋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임할 때 초대교인들의 입술을 붙잡아 천국의 방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함으로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방언이란 '못 알아듣는 말, 신비한 천국 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되고, 다른 나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 즉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말로 말씀화 할 때 그 안에서 능력이 나오게 되고, 그 안에 행복이 있고, 그 안에 성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생이 좋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면 다른 것보다 먼저 말을 바꿔야 합니다. 말을 행복의 말, 사랑의 말, 감사의 말로 바꾸면 인생도 반드시 바꾸어집니다. 또한 말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저주와 질병까지 물리치게 합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은 우리의 신앙의 말과 믿음의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증거이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 말한 대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6.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깨끗하게 된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신기한 일은 입술이 깨끗하게 되면 귀가 열립니다. 웃시야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 안에 웃시야가 계속 남아 있으면 마음에 굳은살이 끼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굳은살을 벗겨내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과 기대에 반응하고 부응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음성 들었다!"라고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고 실질적으로 자기의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자에게는 관심이 없으시고, 후자에게 면류관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오래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무감각한 사람, 미지근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굳은살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가끔 발에서 굳은살을 벗깁니다. 그래도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경이 없이 죽어버린 굳은살을 벗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나가 귀를 후벼줄 때 닿지 않아야 할 곳을 조금 살짝 스쳤는데 온 몸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귀 안에는 굳은살이 없어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신앙은 '발의 굳은살'처럼 되지 말고 '귀의 속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예민하고, 성령의 음성에 예민해야 합니다. 왜 요새 시험이 많고 실망도 많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의 음성에 대해 예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내 심정만 생각하니까 시험도 많고 실망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에 굳은살을 떼어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보고도 무감각하고, 가족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보고도 그저 무감각하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는 영적으로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섭섭한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는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스타를 꿈꾸지 말고, 하늘 나라의 스타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즉시 대답할 수 있는 하늘의 스타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 체험이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실천할 때 진짜 은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요구하실 때에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귀를 막지 않고 잘 반응하여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삼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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