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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시대를 사는 지혜 (딤후 3:1~5)

by 【고동엽】 2022. 8. 27.

악한 시대를 사는 지혜    (딤후 3:1~5)

금년 한 해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너무도 힘든 한 해였습니다. 우선 기록적인 재난이 있었습니다. 2월 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9월 12일 한반도 남부를 할퀴고 간 태풍  피해를 비롯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재난이 있었습니다. 또한 심각한 갈등이 우리를 힘들게 했습니다. 부안 핵폐기장 찬반 갈등, 이라크 파병 찬반 논란 등 심각한 갈등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00만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가 생겨났고, 청년실업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자살자들이 급증했습니다. 더더욱 정치권의 리더십 상실이 우리를 절망케 했습니다.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측근 비리 문제, 대선 자금을 위시한 정치자금의 부패상 등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가 국민들의 사기를 꺾고 그나마 희망마저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통계에 의하면 국민들이 작년보다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답한 사람들이 60%에 달했고, 고작 작년보다 덜 받았다는 사람은 7%에 불과했습니다. 한 마디로 금년 한 해는 우리 모두가 고통 받은 한 해였습니다. ‘정말 금년 같으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단순한 푸념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던 한 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큰 고통을 겪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무엇일까요? 금년에 우리가 겪었던 그런 고통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의 고통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의 헬라어 칼레포스(calepov")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견디기 힘든”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고통은 삶의 무게에 눌려 겪는 고통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갖가지 질병 때문에 겪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또한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특히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겪는 고통을 말합니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힘든 것 하나는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길거리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습니다. 차도 자전거도 사람도... 자기들끼리는 “무질서 속의 질서”랍니다. 저렇게 무질서해 보여도 사고는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방인인 저는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것에서 정말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습니다. 비싼 돈을 주고 비행기를 타는데도 줄을 무시하고 아무데서 막 달려들어 밀고 들어갑니다. 오랜 시간 줄을 서있다가도 어느새 줄이 두 줄, 세줄 늘어납니다. 아예 줄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래 줄을 섰던 사람들은 너무 화가 납니다. 그래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습니다. 역시 무질서 속의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제게는 너무도 큰 고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됐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사람으로 살려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에게 새사람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큰 고통이 됩니다.
본문은 이런 고통하는 때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라”
본문 1절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때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어 성경을 보면 이것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일이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 “마지막 때에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아두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세가 임할 텐데 그 때 믿는 성도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말세는 언제입니까? 지금이 말세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말세는 멀었습니까?
말세라는 말은 신약 성경의 헬라어 에스카토스 헤메라(e[scato" hJmevr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마지막 날”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좁은 의미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마 24:3-14에 보면 말세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역사를 끝내시는 그야말로 종말의 날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구름타고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고, 마지막 남은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날 바로 그 날이 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날 말세를 기다립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로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히 1:2을 보면 이미 주님이 초림하신 때부터 말세는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세란 종말론적 시점으로 주님께서 오셔야 할 날이고 성들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날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두 번째 의미로 말세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초림하신 날부터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라는 종말론적 시간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종말론적 시간은 치열한 영적 싸움이 벌어지는 시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하려는 세력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 사이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성도들은 이 영적 싸움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좁은 의미에서 말세는 아직 아닐 수 있어도, 넓은 의미에서 말세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 16:2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주님께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한강변에서 살았습니다. 가끔 강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헷갈릴 때가 있었습니다. 밤섬을 마주하고 있는 마포 쪽 강변은 강이 휘돌면서 수심이 무척 깊습니다. 그래서 물이 와류를 형성하면서 때로는 상류 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바람까지 동쪽으로 불면 강물에 떠있는 배나 부유물들이 상류 쪽으로 떠내려갑니다. 영락없이 물이 상류로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 저 깊은 곳에서는 한강은 여전히 도도한 흐름으로 하류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깊은 역사의 흐름을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말세를 살고 있음을 봐야 합니다. 믿음 지키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영적 전쟁이 어떤 형태로 치러지고 있는지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반하나님적 흐름에 가담하여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기독교 전도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를 잘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돌아서라”
본문을 보면 말세에 마귀의 궤계에 휘말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무려 19가지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여본다면 사랑의 왜곡입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 말씀에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기심이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가운데 “태형”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비좁은 감옥 안에 40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수감되어있습니다. 비좁고 악취가 가득하여 숨쉬기조차 힘든 열악한 상황 속에 죄수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태형을 언도 받고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이 감방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판결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마땅히 상소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상소하라 거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소한 노인을 매도하여 태형장으로 내몹니다. 한 사람이라도 없어져서 조금이라도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는 죄수들의 이기심이 들끓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이런 이기심에 편승해서 노인이 태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조금 뒤 태형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노인의 비명소리가 감방 안에 울려 퍼집니다. 비명 소리마져 그치고 노인은 숨을 거둡니다. 감방 안에는 긴 침묵이 흐릅니다. 주인공 ‘나’는 견디기 어려운 양심에 가책에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차라리 노인처럼 매를 맞는 편이 나을 정도의 큰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것 같지만 자기를 비롯한 모두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둘째, 돈을 사랑합니다.
이 말씀에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에 집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주의 배금사상에 젖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서점엘 갔다가 깜짝 놀랄만한 책을 본 일이 있습니다.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열두 살 소년 펠릭스는 돈 때문에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것을 보고 스스로 돈을 벌어 부자가 돼 보겠다고 다짐합니다. 용돈을 모두 은행에 저축하면 돈이 빨리 늘어날까 하는 생각에 은행을 찾지만 작은 이자에 실망하고 돌아섭니다. 이후 친구 페터와 함께 잔디 깎기와 빵 배달을 하면서 나름대로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뒤늦게 합세한 친구 잔나와 하인첼 꼬마들이란 회사를 차리면서 좀더 효과적인 수입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잔디 깎기와 달걀 팔기를 하며 나날이 늘어나는 금액에 흐뭇해할 즈음 악기점 주인 슈미츠 아저씨가 구입한 중고 클라리넷상자에 든 금화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갑자기 생긴 목돈을 이용해 주식시장과 선물거래라는 것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돈벌이의 요령을 가르쳐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돈벌이에 인생의 목적을 걸게 하고 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게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세로구나!”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어려서부터 돈버는 법을 배워야 할 정도로 돈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돈에 집착하고 돈 그 자체가 우상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주는 그런 시대입니다.

셋째, 쾌락을 사랑합니다.
이 말씀에서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쾌락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에 젖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 적당한 즐거움은 필요합니다. 재창조(re-creation)를 위해서 쾌락은 큰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쾌락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우리 삶에 청량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은 적당히 받아들이면 약이 되지만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화투놀이를 재미삼아 해 봅니다. 재미삼아 돈을 걸고 합니다. 판돈이 점점 커집니다. 돈을 따기 위해 본격적으로 도박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도박에 발을 들이게 되고 돈 잃고 패가망신하여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쾌락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제를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브레이크 파열된 자동차가 언덕을 내려가듯이 절제 없는 쾌락은 위험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정말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요즘 매스컴 보도를 보면 정말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쾌락에 깊이 빠져있고 중독되어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이 국치일로 여기는 지난 9월 18일 만주침략 72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본인 관광객 380명이 중국여성들과 광둥성의 한 호텔에서 단체 섹스관광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한 노래방에서 4상의 부부가 서로 부부를 바꾸어서 성관계를 맺은 스와핑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스와핑을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회원이 6000쌍으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말세로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쾌락지상주의가 하늘을 찌르는 이런 때 경건한 삶을 살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세적 현상 가운데서 돌아서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르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잘못된 사랑 왜곡된 사랑을 버리고 우리가 올바로 찾아나서야 할 사랑은 무엇일까요?
마 22:37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 몸을 아끼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겪고 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에서 돌이켜서 진정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자라로 나아와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말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과 진정 사랑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이 말세에 고통이 따르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가야합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고, 여기에 진정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박봉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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