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 온 떡 (요한복음 6:56-59)
미국의 6대 재벌 총수들이 1923년 어느 날 시카고 호텔에서 회합을 했습니다. 당시 이들 재벌의 돈은 미 재무청에서 관리하는 돈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수년 동안 신문과 잡지에는 그들의 성공사례가 실렸고, 미국의 언론들은 젊은이들에게 그 재벌 총수들의 삶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 모두 비참하게 말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최대 제철회사 회장이었던 ‘찰스 슈타브’는 말년에 남의 돈을 꾸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무일푼으로 초라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최대 투기업자였던 ‘아서 커튼’은 사업에 실패하여 고생하다가 외국에서 죽었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 이사장이었던 ‘리챠드 휘트니’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최후를 보냈습니다. 미 재무성의 재무장관 출신인 ‘앨버트 폴’은 감옥에서 특사를 받아 그나마 집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국제 개발은행장이었던 ‘레온 프레이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거부였던 ‘아이바 크로이거’도 같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모두를 한 때는 미국 경제를 주름잡았던 쟁쟁한 인물들이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부유함이라는 것은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확인하고 허탈해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름 있는 재벌들의 말로를 보면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자살 하고, 어떤 이는 다 망하고 투병생활로 생을 보내고 있고, 어떤 이는 파산하고 외국에서 떠돌다가 돌아와 재판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부자가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 두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앞에서 말한 몇 몇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난달에도 한 번 설교했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경제 문제들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들은, 예수를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로 여기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경제 문제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최대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선다면 그의 인기는 금방 치솟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가 삶의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결코 삶의 전부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떡을 구하기 위해서 몰려오자 일부를 전체로 생각하고, 수단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요 6:27)는 것입니다.
실상 경제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문제’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경제 문제가 더 귀한 것 같지만,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경제적 부유함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내일모레 이 세상을 떠날 사람에게 많은 재산과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참된 행복은 생명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1. 우리는 영생의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던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로마로부터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고,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해방자, 메시야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이 가버나움에까지 예수를 찾아 온 것은 그러한 자신들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백성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적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모세가 만나를 내려 준 것 같은 기적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세상에 생명의 떡을 주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기대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육신을 배불리게 하는 떡이었는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떡” “생명의 떡”을 말씀하시자, 백성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 떡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요 6:34).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을 들은 무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이런 이상한 소리가 있느냐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41절). 그 중에는 예수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어떻게 자라났는지도 알고 있는데, 뚱딴지 같이 자기가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냐고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찾아왔던 무리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야말로 자신들의 빵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빵문제는 신경도 안쓰고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떡”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은 육신의 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 곧 ‘영생’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여기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입시와 취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도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며, ‘떡’ 문제를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떡인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직도 ‘빵’ 문제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있다면, 먼저 예수를 믿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육신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2.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같은 떡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즉, 육신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육신의 양식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었던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먹은 보리떡도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음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잠깐의 허기를 면하게 해준 음식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은 만나도, 보리떡도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의 살과 피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림으로써 인류를 구원을 해 주셨음을 믿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씩 둘씩 그의 주변에서 떠나갔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제자 앞에 떡을 가리켜 내 살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가리켜 내 피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의 희생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그 희생이 없이는 참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도 예수의 희생이 없으면,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이 양식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성만찬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므로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 됩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그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같이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고귀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예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철학과 종교가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성인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영생을 얻은 우리가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주변을 돌보기보다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전혀 자기 주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을 돌본다든지 이웃의 형편을 돌보는 일은 희귀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얻은 자는 자신 만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보잘것 없는 소년이 부잣집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 식구들은 다 크리스찬이었고 그 소년도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그 심부름꾼 소년을 친 아들처럼 생각하고 대학도 보냈고 나중에는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주인집 딸과 결혼하여 귀족이 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은 세상을 떠났고, 모든 재산은 그 소년이 물려 받았습니다. 그 소년은 부잣집 주인이 되었고 예쁜 아내도 얻었고, 정말 횡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쁜 아내가 첫 아들을 낳다가 그만 정신 이상이 되었습니다. 밤마다 벌거벗고 밖으로 뛰어 나가기도 하고 창문으로 뛰어 내려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남편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앞에 있는데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하면서, 남편을 찾아내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돌봐 주었습니다. 아내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아내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정신이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위해 정성을 다하며 기도한 지 12년 만에 아내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여보”하고 부르며 남편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남편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제 정신이 들어온 아내를 더욱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의 신분으로 영원한 형벌아래 놓여 있었지만, 예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먼저 우리의 가족들에게 이 사랑과 정성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별볼일 없는 남편이라 해도, 보잘것 없어 보이는 아내라 해도, 남들보다 못해 보이는 자녀라 해도, 무능해 보이는 부모라 해도,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복임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쉼없이 기도하고, 끝없이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양식보다 생명의 양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한알의 밀알’로 살 때,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끝없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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