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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성결 (요 14:6-7)

by 【고동엽】 2022. 8. 26.

조작된 성결   (요 14:6-7)

지난 주간 모처럼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 갖고 그 시간에 책 한권을 읽었습니다. 그 책은 일본의 내촌감삼의 “구안록(求安錄)”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내촌이 신앙에 입문하고 예수를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설명한 신앙고백서입니다. 내촌감삼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학자이고 사상가이고 교육자입니다. 내촌은 일제 때 일본에서 신사참배를 혼자서 거부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내촌은 일본에서 혹독하게 핍박받았고 직장에서 쫓겨났고 수난 당했던 유일한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이 책에서 내촌이 예수를 구체적으로 알기까지 무척이나 갈등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촌감삼은 처음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기독교에 입문했습니다. 처음 기독교를 접한 내촌은 기독교의 고상한 교리, 깊은 도덕성에 감탄합니다. 그리고 그 교리에 비추어 본 자신을 볼 때 자신의 불결함, 불완전을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순간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이 교리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결심하고 완전해지자 그리고 남을 흉보지 말고 정욕을 억제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겸손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극장구경도 그만두자, 그리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자”하고 다짐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한 다짐이고 결심입니까. 이 다짐을 혼자하면 힘이 없을 것 같아서 친구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결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나는 철저하게 그렇게 살겠다고 하늘과 땅에 맹세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짐을 들은 스승도 친구들도 모두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철저한 다짐이고 회개이고 각오입니까. 그러면서 내촌은 속으로 “나는 이제 철저하게 거듭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듭나고 성결 하는 일이 그렇게 다짐하고 각오한다고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다 거듭나고 성결했을 것입니다. 성결이 그렇게 쉽게 주어진다면 신앙생활하기가 참 편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짐도 하고 각오도 하고 결심도 많이 합니다. 사실 그 결심 자체만도 위대한 것입니다. 각오했다가 또 넘어질지라도 각오하고 다짐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내촌이 친구들과 스승 앞에서 다짐한 것을 보면 아주 무섭게 결심한 것 같습니다. 내촌이 결심한 후 한동안 그대로 실행해서 참으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며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길게 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말에 무게가 있어졌고 어제까지 떠버리가 오늘은 갑자기 심각한 사람이 되었고 말에 눈물이 있고 말할 때는 성경을 인용하며 말했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이 정도면 그 신앙이 상당히 깊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내촌은 스스로 “나는 지금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단단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짐하고 각오한 내용들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다짐이나 각오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래서 작심삼일입니다. 이 내촌이 그렇게 무섭게 다짐하고 결심한 내용들이 어느 시기부터인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언행들이 다시 뒷걸음을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3개월이 못되어 결심이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내촌이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데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갈증은 더 깊어져갔습니다. 나의 죄의 문제, 평안의 문제, 영적 갈등의 문제를 어디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쌓였습니다. 내촌은 마침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부흥회 참석

부흥회에 참석해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찬송하며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설교자는 열정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것 때문에 귀가 열리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탈감에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학문연구에 몰두

내촌은 스스로 이론과 이성이 가르치는 방법으로 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연구에 몰두함으로 죄를 잊어버리고 고민을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죄를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학문은 고통위에 고통을 더하여져서 고통만 가중시켜 주었습니다.

어느 통계학자가 독일에서 자살자가 발생하는데 왜 자살자가 많이 발생하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연구 결과 노동자는 천 명당 4명꼴로 자살하였고 학자는 천 명당 16명이 자살해서 노동자에 비해서 학자들의 자살률이 4배나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결국 지식이 자신으로 하여금 더 회의감을 느끼게 해서 자살하게 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무식”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입니다. 학문은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니고 더 밝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촌이 학문 연구하는 일을 그만두고 자연을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자연연구

자연을 연구에 몰두하면 우울증이나 회의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맑아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들어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몰두했습니다.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했을 때는 큰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헝클어진 마음도 풀렸고 마음과 생각이 아주 단순해졌습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자연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자연연구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연은 즐거운 사람에게는 더 즐겁게 하고 슬픈 사람에게는 더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마음의 법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활도 포기하고 또 다른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자선사업

내촌은 나 차원을 넘어서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할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은 곧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19:21절을 보면 “나를 따르려거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약1:27절을 보면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습니다. 자선사업은 너를 좋게 하고 나를 완전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촌은 뜻을 정하고 하던 일을 다 포기하고 자선 사업하는 병원으로 들어가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내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주어졌고 환희가 주어졌고 뭔가 길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환자들을 씻겨주고 종 된 마음으로 일하고 급한 성미를 누르고 자만심도 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이상한데 가 있습니다. 그렇게 봉사하면 마음에 기쁜 마음만 있어야 하는데 마음에 불필요한 공명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내가 가장 선한 체 하는 마음이 발생하였고 스스로 위선자처럼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칭찬해주기 바라는 마음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위험을 느끼면서 이 방법도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촌이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섭니다.

전도자의 길 투신

내촌은 평소 하나님으로부터 목사가 되라 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목사가 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다른 직업은 다 순종하고 마차꾼이 되라 해도 순종할 것이니 목사만은 싫습니다” 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방법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목사가 되라 하시는 것을 회피해 온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내게 평화가 주어진다면 목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하고 순순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자선봉사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신학교에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단식하는 동안 처음으로 영적인 쾌락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고요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강의를 들으면서 영적인 깊은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길을 찾고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도 얼마 못가서 점점 신선미가 떨어지고 그 길에서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길에서도 죄로부터 해방이 되지 않았고 그토록 찾고자 했던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방황 대다가 내촌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정 평화

그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그곳에서 평안을 찾아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가정은 희망을 제공해주는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어 그곳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몽상이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가정이 진정한 가정이 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런 가정이 몇이나 있습니까. 세상에 불만 없는 가정, 한숨 없는 가정, 근심 없는 가정은 한가정도 없습니다. 먼저 내가 완전하지 못하면 내 가정도 완전해 지지 않습니다. 가정은 행복을 저장하는 곳이지 행복을 파내는 곳이 아닙니다. 얻기 위해 이루는 가정은 곧 무너집니다. 주기 위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데 오늘 많은 남녀가 그 환상에 속아 결혼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정들이 파선하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해 보니까 가정도 불안전했습니다.  

그래서 내촌은 고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길이 있다는 말인가. 과연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내 마음에 강같이 흐르는 평화는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마음에 죄를 없애고 참 평안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고민이 길을 찾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외치기를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고민했습니다. 이 고민은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영적 고민입니다.                                

내촌이 그렇게 괴로운 나날을 살았습니다. 마음에 심한 갈증을 느끼며 고뇌를 느끼며 목마름에 시달렸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끼게 되면 진정한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촌이 그렇게 심각한 갈증과 목마름을 느끼며 밤잠을 설치고 있을 때 그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느냐”(사 49:15).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요 3:16)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들으며 내촌이 마침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순간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에게서만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내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도 드릴 선행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지금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과 깨진 영혼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또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위로부터 은혜가 임하더니 곧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의 기도가 받아들여졌느니라, 이제 너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내가 너를 위해서 준비한 의의 옷을 입어라“. 그 음성을 듣고 내촌이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의 종이 여기에 있나이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그러자 그동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평화와 환희와 감사가 번갈아 가면서 충만해지더니 그 평화의 요소들이 전신에 스며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촌은 마지막으로 고백하기를 “신앙의 근원은 조건이 아니고 방법이 아니고 수단이 아니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바울 되기 전에는 모세의 율법으로 몸을 두르고 다녔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엄격하고 청렴하고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죄로부터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고뇌하다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바울도 예수를 만나고 그 앞에서 참회하고 다 버리고 난 후에 전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평화를 얻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큰 뜻을 품고 로마로 갑니다. 나이 30세에 로마에서 학문으로 웅변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명성들도 그를 영적인 번뇌에서 구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씩 첩을 얻고 불륜자식까지 낳고 방탕하다가 어느 날 아침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성경구절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롬 13: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그때 어거스틴이 영적으로 깨어나 마침내 이 세상에 어거스틴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도 아버지가 법률가가 되라는 강요를 뿌리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단식하고 수도하면서 평안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고뇌만 깊어져 갔습니다. 그때 스승 슈타우비츠가 한마디를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젊은이여 헛된 것을 구하지 말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 한마디에 변화를 받고 이 세상에 루터라는 신앙의 위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스펄젼은 총을 메고 사냥을 하다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느니라.” 그 한마디를 듣고 스펄젼은 길가에 있던 교회의 들어가 무릎을 꿇고 감사와 눈물로 기도할 때 그 모습을 본 교회 담임목사로부터 한마디 조언을 듣게 됩니다. “청년이여, 자기를 보지 말고 십자가를 처다 보라.” 그 한마디가 이 세상에 스펄젼이라는 위대한 설교자를 태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길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 찾아보면 길은 오직 한길 뿐 입니다. 그 길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의 길을 가지 않고는 그 어떤 길로도 문제를 풀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열쇠는 예수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알되 더 깊이 알고 더 뜨겁게 알고 더 감동적으로 믿고 중심 있게 순종하는 주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아가 전도할 수 있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이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 전파할 수 있게 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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