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피하지 말라. (창 4;23-24)
죄에는 벌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죄는 용서하시지만 벌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회개하면 용서를 받지만 보응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피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둑이 양품점에 들어 갔습니다. 돈을 빼앗고 달아 나려고 하자 주인이 결사적으로 달려 들었습니다. 도둑은 격투를 하다가 본의 아니게 주인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도둑이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가족이 비명을 듣고 달려 왔습니다. 내친김에 도둑은 일가족 모두를 몰살시키고 말았습니다.
경찰은 진범이 아닌 사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얽어 매어 사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진범은 그 후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2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정말 끝난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여유있게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어느 날 그가 런던 고급 상가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호르라기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 놈은 도적이니까 꼭 잡아라.>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닌 데도 그 도적은 온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수하고 말았습니다.
경찰에 끌려 가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불안하였습니다. 이제 시원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벌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하여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달게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라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런 벌을 주었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
죄와 벌은 손바닥의 등과 앞과 같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서 두 가지를 박탈하였습니다. 하나는 먹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할 곳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필요하였습니다. 가인은 드디어 용서를 바라는 복음의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
가인은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염치불구하고 매달렸습니다. 철판깔고 뻔번하게 빌었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애걸하였습니다. 드디어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 4;15)
그 후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가인의 6대 자손 가운데 라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을 한 가인에게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라는 벌을 내리셨습니다(창 4;12)
그런데 유리하는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누아>입니다. 이 말은 어디엔가 정착하지 말고 떠나 다니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벌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6대 손인 라멕시대에 와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이 주신 벌을 거절하고 한 곳에 정착하려고 시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가인부터 유리 방황하지 않고 정착하여 살려고 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거절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가인은 에녹성을 쌓았습니다(창 4;17) 에녹성을 쌓았다는 말은 이미 유리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지 않고 모여서 살려고 시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에녹성은 인류 역사상 최초 도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6대 손인 라멕에 가서는 오늘 날 도시 형태를 이룬 것같이 성경은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세밀히 들여다 보면 그런 추측을 낳게 합니다.
라멕의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 아들 야발
야발은 육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창 4;19-20)
목축을 하였습니다. 목축은 한 곳에 머믈면서 있어야 합니다. 농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아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 4;21)
유발은 오늘 날로 말하면 전문 음악가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도시화되었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농업이나 목축만 하지 않고 제3업종인 음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가 이루어졌음을 역역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차 산업뿐만 아니라 써비스 업이 생기기 시작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서 상업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아들 두발가인
두발가인은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창 4;22)
기계란 무기입니다. 날카로운 기계입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기입니다. 벌써 살벌한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무기 제조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살벌한 도시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점점 세상이 험악하여 가고 있습니다.
딸 나아마
라멕에게는 딸도 있었습니다. 나아마입니다. 나아마라는 뜻은 <즐겁다. 재미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도시 문화에 젖어 재미있게 즐기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라멕 당시 분위기를 라멕의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멕의 자녀들의 이름이 풍기는 냄새가 있습니다.
도시가 살벌하였습니다. 살상 무기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여기 저기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라멕 시대에 벌써 도시는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쾌락과 음란과 광란의 도시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벌을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
그러나 떠돌아 다니지 않았습니다. 모여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시화를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거절하니까 더 큰 벌이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거절하려는 시도는 결국 파멸이었습니다.
위너 감독은 그의 설교집에서 이런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의사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던 중 긴급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환자 하나가 죽어 가고 있는 데 병원까지 데리고 갈 수 없는 형편이라 빨리 왕진와야 살 수 있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는 긴급히 달렸습니다. 신호등에서 걸려 서있을 때 총을 들이대고 차에서 내리라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 타고 급히 환자를 찾았습니다. 그 환자는 이미 20분전에 사망하였습니다. 조금만 일찍 와서 긴급 치료를 하였으면 살 수 있는 환자였습니다. 의사는 환자 방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회색 모자와 누런 점퍼 차림의 남자가 바로 이 환자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바로 2시간 전에 자기 차를 강탈한 범인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고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심는 대로 거두게 됩니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났을 때 불륜으로 태어난 자녀를 하나님이 데려 가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아 드렸습니다.
죄를 범하고 그 벌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벌을 거절하고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큰 죄악으로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라멕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내를 두 명 거느린 남자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류는 늘 일부 일처제였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멕이 처음으로 두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창 4;16-19)
라멕이 맞아 들인 두 여자의 이름도 뜻이 있습니다.
첫 아내 아다
아다라는 뜻은 <장식하다> <꾸미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치장술, 화장술이 대단히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여인들을 책망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국문하려느냐 그러면 그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으며 이외에도 그들이 내게 행한 것이 있나니 당일에 내 성소를 더럽히며 내 안식일을 범하였도다.
그들이 자녀를 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당일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서 그렇게 행하였으며 또 사자를 원방에 보내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베풀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그 무리와 편히 지꺼리고 즐겼으며 또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을 청하여 오매 그들이 팔쇠를 그 손목에 끼우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웠도다.
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피차 행음하는도다.
그들이 그에게 나아오기를 기생에게 나아옴같이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나아왔은즉 의인이 음부를 심문함같이 심문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심문함같이 심문하리니 그들은 음부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니라>(겔 23;36-45)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행음하였습니다.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습니다.
안식일을 범하였습니다.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였습니다.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베풀었습니다.
무리와 편히 지꺼리고 즐겼습니다.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을 청하여 팔쇠를 그 손목에 끼우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이런 범죄를 하니님은 미워하셨습니다. 그 중에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하니님은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의 첫 아내는 장식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벌써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도시는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장술이 너무나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신혼부부가 호텔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화장을 지우고 세수하고 나오면 신랑이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렇게 화장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그대로를 좋아 하십니다. 화장 그리고 성형 수술의 근원은 라멕의 첫 부인 아다입니다.
둘째 아내 씰라
라멕의 두 번째 아내는 씰라였습니다. 씰라라는 뜻은 <어둡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멕은 어두운 여자를 좋아 하였습니다. 밝은 여자를 좋아 하여야 하는 데 반대였습니다. 음침한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음침한 문화입니다.
언어도 음침하고 행동도 음침합니다. 라멕은 도시의 음침함을 좋아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라멕의 행동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들도 딸도 아내도 다 그 모양 그 꼴이었습니다. 라멕은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성경은 라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 4;23-24)
라멕은 살인하고 자랑스럽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23절은 라멕의 노래입니다.
라멕의 노래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 내 아내 아다와 씰라여!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련다.
내가 오늘 길을 걷는 데
젊은 놈이 하나 오더니 시비를 걸었지.
엎치락 뒷치락하다가 그 놈을 혼내 주었지.
온 몸에 상처를 내주었지.
그리고 조금 후 그 놈을 죽여 버렸어.
우리 조상 가인을 해친 녀석은
벌이 7배라지만
감히 나를 건드리는 놈은
77배로 갚아 주리라.
하하하하하......>
라멕이 왜 살인을 하였을 가요? 살인 후 두 아내에게 살인한 것을 자랑한 것을 보면 두 아내를 얻은 것은 잘못이라고 빈정된 것같습니다. 라멕은 그래서 그 사람을 죽이고 무용담을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말한 것같습니다.
라멕은 무기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누가 만든 무기일가요? 아들 두발가인이 만든 무기로 죽였을 것입니다. 온 집안이 살인 집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안 받으려고 몸부림치던 라멕의 가정은 온통 살인 협조가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도시는 온통 쾌락, 음주, 범죄로 그득합니다. 온갖 죄악의 온상이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시작하여 라멕에서 완성된 도시 문화입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피하였기에 더 큰 문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받아 드려야 합니다.
금세기 일본 최고의 작가는 엔도 슈사꾸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바다와 독약>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2차 대전 당시 후방 기지병원 군의관으로 있던 로데 라는 젊은 의사입니다. 그는 일본 군부의 명령으로 미군 포로를 잡아다가 마취시켜 생체 실험을 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군 포로를 잡아서 간단한 진단을 하는 척 합니다. 그러면서 살그머니 병균을 투입시킵니다. 그리고 병들게 합니다.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핑계로 미군 포로의 몸을 해부해서 폐를 잘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폐가 어느 정도 남겨졌을 때 사람이 얼마 동안을 살 수 있는가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리를 잘라 봅니다. 피를 흘리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피가 흐르면 죽는가도 실험하였습니다. 그 때 젊은 군의관 로데의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두 가지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런 소리였습니다.
<죽였다. 죽였다. 네가 죽였다.>
다른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죽인 것이 아니야. 그 누가 네 처지가 되어도 그렇게 안 할 수 없어. 너는 책임이 없어.>
양심에 가책을 받던 그는 어느 날인가는 하나님이 자기를 벌하실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데는 잘라낸 미군 포로의 폐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죽이다 보니 조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의 폐를 보고도 도무지 감각이 없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진 자기 마음을 보고 미쳐버린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차라리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가슴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쳐서 미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못하고 죄를 지을 때 벌을 주십니다. 그 벌을 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 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다가 받는 벌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0
요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그대로 받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고래 뱃속에 나와 큰 선지자가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살아가면서 종종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다가 주어지는 벌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은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출처/강문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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