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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 주는 교훈/이사야 9장 6-7절

by 【고동엽】 2022. 8. 26.

성육신이 주는 교훈/ 20001213 삼일밤 예배

2001-12-08 17:58:03 read : 276

 

이사야 96-7

 

저는 성육신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그 성육신이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진정한 미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성육신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그 높은 벽을 누가 깹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그 엄청난 차이를 극복하고 누가 다리를 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성육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통이 사라지고, 흑암에 빛이 비추고, 땅이 영화롭게 되고,

흑암 중에 거하던 백성에게 빛이 비추고, 그들에게 즐거움이 넘치고,

멍에와 채찍이 사라지고, 싸움과 혼돈이 사라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6-7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예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심으로 빛과 평화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된 역사인지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깨닫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육신을 통해서 배우는 삶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순종했고,

요셉은 정혼한 아내가 잉태한 것을 알고도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데려와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십시오. 대개 아름다운 순종으로 그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교회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보십시오. 거의 순종의 결과입니다.

 

때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저렇게 형편과 처지에 맞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고 하는구나!"

그 순종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순종 자체가 큰 능력을 주기 시작하면서 은혜의 길이 활짝 열립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가 순종입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에서 간혹 자기의 방식만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 방식으로 믿고 교회생활을 하려고 하기에 부딪침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원리와 공동체의 원리를 따르면 사랑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과 평화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축복의 열매입니다.

 

신앙생활은 순종의 원리를 아는 인격이냐 아니냐에 상당히 좌우됩니다.

가끔 어떤 분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자식을 잃어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형편인데 감사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생각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에는 형식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가장 큰 위기는 지도력 부재의 위기인 것 같습니다.

그 지도력 부재의 원인을 능력 있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개 말합니다.

그러나 꼭 그 한 가지 이유 때문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능력 있는 지도자가 있어도 능력 있는 순종자가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리 귀한 정책을 내놓고 똑똑하고 도덕성 있는 지도자가 있어도

모두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어떻게 지도력이 생기고 어떻게 사회가 조화와 질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윗사람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펴도 아랫사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가 어떻게 되고,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뿐만 아니라 각 교회들도 그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세 때문이고,

소중한 가치 및 공동체의 원리에 순종하는 못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이런 무질서를 보면서 다시 한번 순종하는 인격의 중요성을 생각해 봅니다.

 

2. 구체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이라는 옷을 입는 것은 엄청난 헌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직접 몸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 우리의 헌신 생활도 이와 같은 구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아는 것에서 끝나고 말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의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태어날 장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님께 달려간 사람은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믿음이 믿는다는 생각에서 끝나고 아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헌신까지 나아가야 믿음이 주는 구체적인 은총의 맛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그 먼길을 달려와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 저희들이 1착으로 달려왔으니 듬뿍 은혜를 주소서!"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렸습니다.

어리석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현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가장 보람되고, 최종 승리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솔직히 체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드릴 때 더욱 삶이 풍요롭고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내 영혼에 사랑이 주어집니다.

10개를 하나님께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10개가 없어져서 허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린 것 이상으로 보이는 은혜와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어서

우리들의 영혼과 마음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우상화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 본능을 극복하고 헌신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헌신이 있어야 우리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다가오게 됩니다.

 

3.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기 전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어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결국 성육신 하셔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친히 계시하셨고

또한 인간의 죽음과의 감정의 고통까지 다 겪으시기까지 우리를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육신은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삶을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그릇인데 어떻게 내 생각대로만 그가 행동하기 바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른 그릇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항상 힘들어지고, 내 마음도 항상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성육신의 자세를 가지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지도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담임목사, 기관장, 성가대 지휘자, 그리고 지도자 모두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 성가대 지휘자와 가끔 대화를 했습니다.

성가대 지휘자는 보통 음악 전문가입니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성가대원의 수준에 맞추어 성가대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수준에 맞추면 자신도 힘들어지고, 성가대원들도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성가대원들도 너무 자기 수준에만 맞추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발전이 있고, 어떻게 내일의 소중한 열매를 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성도들의 입장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조는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성도들의 조는 것을 이해하는 편입니다.

저도 옛날에 너무 피곤할 때에는 예배드릴 때 조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졸음을 깨는 방편으로 항상 설교 말씀을 노트에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노트를 보면 졸았던 부분이 다 나타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고 때로는 하나님 일을 하다가 피곤해서 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 가지고 판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조는 것도 이해합니다.

졸지 않으면 좋지만 피곤하다고 집에서 잠자는 것보다

차라리 교회에서 졸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성도들의 처지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곳곳에 상처받을 일이 엄청나게 많고, 몸살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그런 대로 행복하게 목회하는 편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다른 입장에서 서로 하나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자극하면서 하나되기를 추구하는 삶이 바로 성육신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좋은 은사, 좋은 봉사일지라도 교회에 해를 끼치면 안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는 방향으로 자기의 것이 활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를 오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기쁘게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성도와 화목한 것입니다.

부모들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다른 효도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미워하면 됩니까? 그분도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데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나 자신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참고 계십니까?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참고 계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하시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성육신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 되지 못하는 데에는 대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2) 하나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할 것을 희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되기 위해서 성육신의 희생을 치룰 각오를 항상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하시는 일은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사단은 "어떻게 하면 나누고 분리시킬까"를 궁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일은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특징은 살리십시오. 그러면서도 성육신의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4.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이 태어난 시대는 팩스로마나(Pax-Romana)의 평화가 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유대 지역만은 독재자 헤롯으로 말미암아 흑암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두운 시대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어둡다고 시대를 탓하는데 너무 힘을 쏟아서는 안됩니다.

자기 환경과 처지가 너무 어려워 내가 이곳에 잘못 태어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두운 곳에 태어나고, 어두운 곳에 있는 이유와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한, 나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있는 처소와 형편에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특별히 그런 삶을 통해 영혼을 구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셨고,

또 하나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영혼을 낚는 낚시꾼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명을 따라 살면 감정과 기분과 정을 극복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정에 이끌리면 안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친척관계인 세례 요한이 그렇게 되었는데 주님은 돌보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주님을 영혼을 구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세례 요한이 이미 순교로 영광 돌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영혼을 사랑하는 모습과 정에 이끌리는 모습은 다릅니다.

영혼의 깊은 차원을 생각하지 않고 정이나 인간관계에 이끌리면

상대방이 자기가 기대한 인간상이 아니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슬퍼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헤어집니다. 인간적인 정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도 살펴야 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사명을 앞세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5.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광대함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고, 우리의 언어를 초월하고, 우리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전 크기로도 하나님을 다 채울 수 없는 그런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구유에 찾아오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오른쪽 다리를 다친 사람의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오른쪽 다리는 편히 지냈지만, 왼쪽 다리는 사랑의 수고를 2배로 했습니다.

그러자 오른쪽 다리는 더 약해졌고,

다시 스스로 활동하기까지 엄청난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왼쪽 다리는 더욱 튼튼한 다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영혼이 더 풍성해지고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신경을 더 쓸수록 영적 가치는 빈약해 질 것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풍부해지고, 안 하면 안 할수록 빈곤해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풍성하게 만드는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들이 노래를 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생각지도 않게 그들은 한결같이 사랑이 노래 잘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모르면 목소리의 빛깔이 죽는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은 초대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완료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핍박 중에서 천국의 삶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 미쳐 있습니다.

이웃 사랑에 미치기는커녕 마치 냉혈동물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어도 그 삶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육신의 사랑을 회복하여 영혼의 행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할수록, 그리고 깊이 묵상할수록 성육신에는 아주 큰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성육신의 원리를 최선을 다해 실천함으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영혼을 풍성하게 영위해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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