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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종교 개혁 주일설교

종교개혁의 정신

by 【고동엽】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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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17

지난 주 한 일간지에 한 기사를 보고 매우 부끄럽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의원 조모 씨가 총회를 상대로 지난해 9월 총 회장으로 선출한 선거는 무효라고 소송을 내었는데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기독교 교리상 교회의 문제를 세속 법정에서 해결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문제를 세속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것"이라며 "분쟁이 일어난 경우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법정으로 문제를 가져올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소(訴)의 청구를 각하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가르쳐야 할 터인데 세상이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지금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의 교권을 둘러싼 이전투구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도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썩을 대로 썩어 있습니다. 지금 은행감사원을 은행강도원이라고 부릅니다. 은행비리를 들추어 개혁하라고 특별히 청렴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은행감사원 직무를 맡겼는데 그들이 앞장서서 뇌물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다닌 사람이 목사 사모님 이 모씨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번 옷 로비 사건 때에는 여 권사님들의 이름이 오고 가더니 목사 사모님의 이름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교회를 성스러운 곳이라고 불러 주겠습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8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때에도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매우 부패하여 있었습니다. 100년 이상의 공사인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게 되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황 레오 10세는 속죄표를 만들어 1506년부터 발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교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지금은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속죄표를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자리에서 사함을 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이 표를 사면 은화가 헌금 상자에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리움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털어서 교회에 바치는 등 호응을 하였습니다.

이 때 교황의 권세는 그대로 하늘의 권세였습니다.

모든 왕들은 그에게 머리를 숙였으며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은 오류가 없다고 하여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많은 권세와 부를 누렸습니다.

좋은 위치에 주교와 대주교에 오르기 위하여 돈 거래가  횡행하였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전형을 그들은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죄를 부인하였으며 마리아를 중보자로 숭배하였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마리아 상을 세워놓고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어느 곳에서는 마리아의 상에서 눈물이 나왔다고 수많은 참배 객들이 모여드는 등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그렇게 화려하게 꾸며진 교회들이 오늘날 텅텅 비고 관광객들의 관광수입을 벌어 드리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화려한 교회, 교황무오설, 성직매매, 속죄표 판매, 마리아 숭배, 선행은 구원의 한 방편이라는 주장 등 어느 것 하나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뜻 있는 주교들과 교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잘못된 교회관습에 대하여 걱정하며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비텐베르그 교회의 주교였던 루터입니다.

그는 로마 교회와 교황청의 잘못된 부분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95개조의 항목으로 만들어 교회의 게시판에다 게시를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교황을 배반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교회의 잘못을 걱정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교회와 교황에 대한 대단한 도전으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개혁의 시도는 생명을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교황청은 그를 1518년 11월에 파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대표인 알렉산더는 루터를 곧 처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후원자였던 프레드리히 제후의 간청으로 마지막 의회에서 변증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비록 신상의 안전은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친구들도 루터 자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그 곳에 참여합니다.

그 때 루터에 의하여 지어진 찬송이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떠나면서 믿음의 동역자 멜랑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내가 만일 나의 원수들이, 나를 죽여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군은 진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가르치라. 만일 군만 살아있으면 나의 죽는 것은 걱정할 것도 없는 것이다..... 비록 궁전의 기와장과 같이 많은 악마들이 나를 막을지라도 나는 단연코 보름스까지 가고야 만다"라고 말하면서 길을 떠났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교황청의 회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결코 취소할 수 없다. 교회의 총의회와 교황을 결코 무오류라고 할 수 있으니 나는 역사적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나는 변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를 이렇게 강하게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교황의 권위에 대하여 반대할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은 그에게 놀라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왜 교회가 타락합니까?

말씀의 권위와 살아 있는 신앙보다는 종교적인 전통과 인간들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관습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전통으로 예수님을 핍박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의 원인도 말씀의 권위와 순수한 신앙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든 교회의 전통과 사람의 권위를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루터와 캘빈 쯔빙그리 등은 철저한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들의 신앙구호는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있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는 말씀을 붙들고 개혁을 이끌어 갔습니다.

속죄표를 수 천장을 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교황이나 어느 주교도 교인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사제도 교황도 마리아도 아니오 선행으로서도 아니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믿음으로만이 용서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개혁은 성경연구와 성경보급으로 이어졌고 예배갱신으로 이어졌습니다. 화려하고 다양한 예배의식과 웅장한 건물을 탈피하고 예배를 말씀 중심으로 단순화 시켰으며 캘빈은 일반 교실과 같은 건물에서 단이 없는 탁자를 강단으로 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검소와 청빈과 절제와 솔직을 교인들에게 생활화 시켰으며 일곱 가지의 성례를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세례와 성찬만으로 축소하고 모든 성도를 제사장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들의 개혁은 독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로 퍼지게 되었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를 신교, 개신교, 개혁주의 교회 등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로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된 교회인데 오늘 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교권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적인 전통에 의하여 추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조롱을 받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갱신되어야 합니다.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살고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부터 갱신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갱신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듯이 우리 자신의 신앙적인 삶도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갱신하지 아니하고 타성에 의하여 조금씩 세속화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수 없는 나약한 신앙 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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