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3-22
전국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으로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성경적 원리가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종교개혁을 485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많은 도전과 각성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전국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종교개혁기념주일까지 지키느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물음에 대해 대답부터 한다면 종교개혁은 개혁교회, 장로교회에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인이라면 말하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지(無知)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해서 몰라도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장로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장로교회의 뿌리를 모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매년마다 종교개혁기념주일까지 지키면서 그 정신과 뿌리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철학이나 과학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삶의 척도요, 믿음의 본질이 되는 말씀에 따라 살게 될 때만이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가집니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리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방법으로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작금의 한국교회는 개혁교회를 표방하면서도 개혁교회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개혁교회다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개혁정신이 회복이 필요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지금 표류하고 있는 듯 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16세기에 개혁의 기치를 들고 세워진 개신교회는 18세기 이후에 밀어닥친 [근대과학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할 때에 여러 종류의 분파가 발생되었던 것처럼, 이제 21세기의 대변화의 시기를 맞아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개신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때에 현대교회는 도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대적 정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교회공동체는 반드시 시대에 걸 맞는 복음의 요람지(搖籃地)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대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빛 좋은 개살구]격으로 시대적인 사명감을 상실한 채 방향감각(方向感覺)을 잊어버렸고, [교인 늘리기]에만 급급한 채 빛과 소금으로서의 본을 보이지 못한 채 제자리를 걷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능력을 나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믿는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상 믿음의 내용(알맹이)를 갖지 못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것이 오늘의 실제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안에 교회 안에 세속화의 물결이 들어와서 상업주의,혼합주의,교권주의,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21세기 들어와서 건전한 정신문명이 결여되고 기계화, 정보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이 더욱 소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들까지도 황금우상주의, 과학우상주의, 기술우상주의로 인하여 성경적인 가치관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로 지금이 제2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때이다"라고 역설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Ekklesia semper reformanda)"는 명제 속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의 배경과 개신교회의 출발점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은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젊은 사제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서 지금부터 485년 전에 시작되었고 쟝 칼벵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개혁의 깃발을 높이든 것은 바로 부패의 온상(溫床)이 되어버린 로마 교회를 복음의 요람지(搖籃地)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시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성경적인 교회 상을 추구하고 복음의 요람지로서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띤 교회가 새롭게 태동되었는데, 그것이 개신교회입니다. 본래 [개신교]라는 말은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인데, 이 말은 16세기 변질된 로마교회에 대해서 반항하여 개혁의 기치를 들고 세워진 성경적인 교회 상을 추구하는 개신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16새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된 직접적인 발단은 [교황 레오 10세]가 [대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기금 조성을 위해 속죄표(면죄부)의 판매를 강매함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분위기는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를 바로 잡기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00년 동안 이끌어 온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1506년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속죄표 판매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 수입의 반액을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판매 책임자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당시의 판매 책임자인 [도미니칸 수도사 테첼]은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사면할 수 있는데,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에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텐베르크 시에는 속죄권 판매를 통해서 일확천금을 누리고자 하는 종교 모리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젊은 사제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을 통하여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 뜨거운 도전을 받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젊은 사제 마틴 루터가 개혁의 깃발을 드는 것이 어쩌면 무모하기에 이를 데 없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개혁자 마틴 루터의 팔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 속에서 급기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 앞에 95개조 선언문을 게재하고 반대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요지를 보면 ① 속죄권은 판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속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죄를 사할 수 없다 ② 교황은 죄사할 권세가 없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권한에 있는 것이다. ③ 속죄권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 교황은 죽은 자에게 권한이 미치지 못한다. ④ 사죄에 필요한 것은 오직 회개요, 돈이나 속죄권은 쓸데없고 교황의 중계가 필요 없다 등 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교황의 반성을 촉구하고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지 교황이나 카톨릭 교회에 반항하고자 하는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서 한 달 만에 전 유럽에 퍼져 각국에 큰 충동과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후 모든 주변 국가는 탄압을 하였지만 화란(네덜란드)만은 프로테스탄트(신교)를 환영하였고 이 결과 화란은 스페인과 30년, 100년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화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는 루터를 통하여 개혁이 되고 [쟝 칼벵]은 통하여 체계화 되었던 것입니다. 개혁 1세대인 루터는 원리 중심의 개혁을 했다면 개혁 2세대인 칼빈은 실천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개혁과 갱신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Reformed)란 말은 “무엇이든지 과거의 것은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의 뜻을 내포하는 단어는 요즘에 쓰이는 있는 갱신(Renew) 혹은 변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교회가 비본질적으로 되어진다든지 신앙의 내용이 선지자와 사도들이 증거 했던 성경 진리와 달라졌을 때 그것을 본래의 신앙의 원리대로 바로잡고 바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기본적인 명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늘 부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와서는 신학의 변질과 세속주의, 물질주의, 편리주의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실상 위기에 봉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는 ① 배금주의, 상업주의 ② 혼합주의 ③ 형식주의 등으로 인하여 개혁정신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였다고 하지만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많은 타락을 하였기에 불신자들로 하여금 믿음생활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2.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종교개혁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의 공생애의 첫 번째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상업화, 시장화 되었으며,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적 행동으로 과감하게 성전의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어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적 권위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와 제자들에게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놀라움과 충격이었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타락했습니다. 이미 상업주의가 강하게 침투되었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하나의 상업상의 대목 경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될 성전 안은 양과 소를 파는 우시장이 되었고, 관심은 오직 상거래뿐이었습니다.
종교가 세속화 될 때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재할 아무런 기력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타락했습니다. 금전 수수를 통해서 예물을 바치는 순서를 바꾸는 등 실로 원초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됐으므로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 2:16에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가 성전을 부패하게 했다는 예수님의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5년을 지난 지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참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교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급격한 교회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세계교회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수적성장은 질적인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면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급성장에서 찾기도 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혼돈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분석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수치요,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교회의 과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 위험수위에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① 교회내의 상업주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물질주의가 교회에 들어올 때 진리의 표준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수도원에서 시작하고 양곡장사와 모리장사를 동시에 함으로 외형적으로 교회당의 건물은 화려하고 크게 되었으나 교회는 냄새나는 타락하는 교회가 되고 결국은 비교회로 되어 생명없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제사 용품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터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도 했습니까? 금은 가장 값진 것이기에 하나님은 값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배금주의, 상업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두드러지는 윤리적 타락의 요소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분배의 수단임에도 오늘날의 현대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많이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의 순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재산축적은 중세 교회의 타락요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의 중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질적 타락은 윤리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되지 못하게 되는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② 교회내의 혼합주의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헤롯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당시 교권자들은 성전완공을 위해서 온갖 야합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사회적 방법이 판을 치는 종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이미 상실하고 정치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회적 공실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도 수없이 많고,교회의 업무를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교회 이름을 붙인 차들이 일반 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교통위반을 해도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방법은 적어도 사회의 방법은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 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함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③ 교회내의 교권주의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자리였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의 이권을 주었습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교권주의에 흐르게 되면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하고,성직자들이 타락하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윤리적 약점은 교권주의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로 흐르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윤택해짐으로 소명의식보다 직업의식이 앞서고 교회가 대형화됨으로 그 다음 순서인 명예심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도 박사인 목사를 원하며, 목사라는 직분도 시시하고 박사라는 칭호를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총회에서는 [장](長)자리에 대한 욕구로 수억을 주고 총회장 자리를 사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성직매매(聖職賣買)가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며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권주의 혹은 권위주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배격되어야 합니다.
⑷ 교회내의 형식주의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 앞에서 파는 제사용품은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일반인들이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 성전 앞에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이 있는 비둘기는 반액으로 깎아 팔고 제사장은 이들 상인들이 판 흠이 있는 것들도 제사용으로 합격시켜 주었습니다. 상업주의와 교권주의는 결국 교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고 주일에는 교인이지만 평일에는 휠씬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타락이 우리의 아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주의와 편리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 왔을 때,그것은 생명없는 종교로 시장화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을 때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운동,말씀운동이 약화될 때 요란하게 옷을 입고, 요란하게 책상과 의자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건물을 꾸미고 외형을 단장하는 형식주의가 일어납니다. 세속주의적인 편리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본래 멀리서 온 유대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성전 뜰에서 소와 양을 팔고 히브리 돈인 세겔로 바꾸는 편리한 제도를 만들었으나 결국 그것은 성전 안을 점령하고 깊숙히 세속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진리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반대로 노끈을 만드시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의 과제인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지정한 개혁은 언제나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는 진리와 은혜가 있는 교회로 겉모양보다 내용을 지켜 나가는 교회에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의, 형식주의, 유물주의, 편리주의 사상에서 깨어나 주님께 향하여야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교회란 가능성만 보려하고 진정한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버립니다.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원리를 갖고 선교를 해야만 인간이 자랑이나 공로가 들어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오직 주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드신 채찍은 마땅히 현대교회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주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①
복음 전파(행 5:42) ② 말씀을 가르침(행 2:42) ③ 성도의 교제(행 2:42-46) ④ 성만찬과 세례 집전(고전 11:23,24) ⑤ 권징(마 18:17) ⑥ 구제(행 6:1-3) 등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루터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로 돌아가려는 의도였습니다.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행을 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받으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의 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본문에서 행하신 것은 자기의 성전 청결사건은 구약의 약속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혁사실은 구약의 성취이며,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운동입니다. 요 217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는 말씀보다 다른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이름이,성경보다 돈이, 성경보다 사업이, 성경보다 사랑이, 성경보다 정의가 강조되어 집니다.성경보다 사람의 소리가,성경보다 전통이, 성경보다 이적이, 성경보다 꿈이, 성경보다 다른 무엇이 강조됩니다. 성경보다 전통과 편리주의와 의식주의가 강조되었을 때 천주교는 타락했고 18세기와 19세기 교회는 성경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유럽교회는 다시 멍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지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임을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요 2:22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개혁운동은 말씀을 성취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성경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중세교회가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가 썩어 냄세나는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교회는 깊은 타락의 구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정통신학자 사무엘 박사의 말처럼 "성경 없이는 교회가 없다. 성경이 없이는 오래 전에 한 이해할 수 없는 만화로 퇴화해 버렸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바로 선포되어질 때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참된 개혁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공로신앙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업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사건 현장에서 그의 개혁의 합리성을 따지면서 '무슨 표적(이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성전된 자기의 몸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을 제의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제시했습니다. 이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그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말미암아 성도가 살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어두워지면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연과학이 마치 신앙의 해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교회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은혜되게 할 때 참된 기독교는 지켜집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은총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 사상은 또한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자율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은총의 복음을 깨닫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 바로 선포되고 바로 믿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은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상업주의,혼합주의,교권주의,형식주의 혹은 편리주의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다시금 복음의 교회로의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려고 개혁을 시도한다면 급격하는 21세기를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는 다양화와 국제화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마땅히 이 새대적인 구조에 맞도록 다양한 길을가야 합니다. 국제화의 의미나 다양화의 의미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공동체를 파괴하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회복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지구촌의 교회가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공동체적인 의미의 연합사업에 동참하여야 하며,기독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한국교회의 큰 병폐 중의 하나인 교회가 사회에 대한 현실감각을 상실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21세기에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삶 전체를 복원시키는 구원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 운동(재소자의 교정문제,신체장애자,고아,과부,소년소녀 가장, 병든자,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인권문제(여성문제,정치적 탄압),국가문제(남북분단의 극복과 이산가족 문제,경제적 불평등 문제),신흥종교 및 이단종파 문제, 환경문제, 핵전쟁 문제 등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 아름다운교회가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아름다운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인상과 좋은 영향력을 미치도록 때때로 소리를 내고, 그들의 권익을 대신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내일의 아름다운교회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가 돈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지원하는 몸부림이 없으면 아무리 윤리적, 도덕적인 개혁을 외친다고 할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음에 무지한 자들에게 전달되기란 무척이나 많은 시간과 인내의 소요가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을 485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믿는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상 믿음의 내용을 갖지 못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실제 상황입니다. 아니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상황이 아닙니까? 바로 이때가 바울의 고백 즉 빚진 자의 고백을 요구하고 있으며, 과학 만능주의, 금전 만능주의 우상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문화를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성경적인 원리인
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②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③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④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Sola Scriptura)
⑤ 오직 은혜로(Sola Gratia)로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성경을 성경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운동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개혁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 자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개혁정신은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날 수 있으며 교회도, 사회도, 세계도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결코 완전한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Ekklesia semper reformanda)는 원리가 여러분의 신앙 원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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