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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종려주일설교 :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by 【고동엽】 2022. 8. 23.

요 19:23-27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년간의 공적생애를 무사히 마치고 이번 주간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제물 되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성공스럽게 사역을 잘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한마디로 만족함을 나타내고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만족스런 고백입니까. 이렇게 인생이나 사역을 끝까지 잘 마치는 분을 보면 참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사람들이 정년을 잘 마치고 은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중에 낙오되고 오점을 남기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아주 성공스럽게 마치셨습니다. 우리들도 인생이나 사역이나 이렇게 잘 마쳤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어두운 모습은 사람이 죽는 모습일 것입니다. 죽음은 무서운 장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를 꺼려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곳에는 반드시 꽃을 갖다 놓습니다. 그곳 분위기가 삭막해서 중화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밤을 새워 줍니다. 모두 무서운 마음 때문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무섭다기 보다는 처절했습니다.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곁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군병들”이 있었습니다.

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악역을 담당했습니다. 그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군인은 좋은 일이나 싫은 일이나 위에서 시키면 해야 됩니다. 전장에 누가 나가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명령받으면 가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입니다. 여기 로마 군병들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위에서 시키니까 뭔지도 모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일에 관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도 어떻게 보면 영광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예수님 몸에 못을 박았으니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영광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던 로마 군병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그들은 아무리 위에서 시켰어도 최소한의 양식도 없는 군인들이었습니다. 보면 본능만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행동했습니다. 이 군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이 옷을 누가 가질까 하고 찢으려 하다가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자기들 눈앞에 있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밑에서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우연인지 몰라도 시 22:18절에서 그렇게 하리라고 예언한 그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 군인들이 그 예수가 누군지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그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좋은 기회, 역사적인 현장체험을 했으면서도 그 값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무지가 죄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역사적인 현장에 아주 무지한 로마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두 강도” 가 있었습니다.

이 두강도의 이름이 밝혀졌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왼편의 강도는 “게스타이”라는 사람이고 우편의 강도는 “데스마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영광이었겠지만 예수님은 더 비참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이 흉악한 두 강도 틈에 끼워 죽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더 욕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를 욕되게 하려고 모든 모욕스런 방법을 총동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곁에서 함께 죽어가던 그 강도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욕을 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이렇게 처절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백부장”도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의 현장 지휘관이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니까 그날 백 명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못 박고 나서 예수님은 6시간동안 아무 말 없이 그 고통을 다 겪어 냅니다. 한마디 변명도 항의도 없이 묵묵히 견디어 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조용히 숨을 거두십니다. 그 모습들을 이 백부장이 말없이 그러면서도 아주 예리하게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태 27:54절을 보면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태어날 때도 참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기다림 속에 환영받으며 태어나야 합니다. 또 살아가는 과정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아주 건전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잘 죽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아주 멋있는 메시지를 남기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구차하게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 예수님이 죽는 모습에서 아주 강렬한 메시지가 남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했습니다.


또 십자가 주변에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제자들이 다 도망한 중에 예수님이 홀로 죽어갈 때 그 곁에 여러 여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이었습니다. 특히 여기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렸다가 예수를 만남으로 고침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인은 평생 예수를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참 헌신적인 사람들로 제자들 보다 훨씬 나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 생존시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갈 때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는 온종일 그곳을 지켰습니다. 또 예수님이 땅에 묻혀 있다가 안식 후 첫날에 첫 시간에 동이 트자마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제자가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자마자 제일 먼저 이 여인들부터 만나 주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당연히 부활의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났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세계에는 여인들이 주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간문에 보면 전도에 앞장섰던 여인들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 브리스가,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고 부른 루포의 어머니, 자주장사 루디아 등 많은 일꾼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디두모, 도마, 바돌로매, 다대오, 유다 같은 제자보다 훨씬 나은 여 제자들입니다. 오늘도 보면 교회마다 여전도회가 일을 참 많이 합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구진 일도 참 많이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주변에는 이 여 제자들이 끝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 중 유일하게 “사도요한” 이 있었습니다.

26절을 보면 제자 중 끝까지 남아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본 제자는 사도 요한 한사람뿐입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서 죽으심의 고정을 지켜본 유일한 제자입니다.  아주 의리 있고 용기 있는 제자입니다. 수제자라고 자처하던 베드로도 도망 중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운명 직전에 사도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위탁했습니다.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했습니다.

다 자기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입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도 탓할 수가 없습니다. 왜 수제자가 도망갔느냐 하고 탓하기 쉽지만 그도 도망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우리 같았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누가 당당하게 맞서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젊은이가 입사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시험장엘 가 보니 차를 세울 곳이 없었습니다. 15분간이나 빙빙 돌아보았지만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차를 세울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세워놓고 쪽지를 붙여놓았습니다. “저는 이 구역을 15분간이나 돌았습니다. 여기에 주차하지 않으면 저는 일자리를 잃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시험을 치고 나와 보니까 차에 딱지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메모가 붙어있었습니다. “나는 이 구역을 15년째 순찰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이 딱지를 떼지 않으면 제가 일자리를 잃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사람은 다 환경에 따라 사정이 있고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도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베드로를 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사도 요한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에게도 그런 자기입장과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나와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자기입장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기의 처지를 극복하고 자기의 피치 못할 사정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보다 요한이 더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나머지 제자들 보다 아주 탁월한 복을 받습니다. 우선 그는 유독 제자 중에서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리고 살다 죽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들어보면 그를 죽이려고 끓는 기름 가마에 던졌는데 그만 죽지 않고 튀어나와 살려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에베소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분부하신 대로 마리아를 에베소에 모시고 와서 말년을 돌보면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복은 사도바울도 죽고 제자들 모두 순교해 죽은 후에 남은 그리스도인들이 허전하고 기댈 곳 없어 흔들릴 때 요한은 에베소에 남아 그리스도인들을 아우르고 용기를 주고 영적 기둥과 같은 역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쓰고 요한 계시록까지 써 놓았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비교하면 또 다른 면모를 갖춘 대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호쾌하게 장담을 잘 했습니까. 그런데 그는 호쾌한 만큼 또 너무 허무하게 넘어지고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이 늘 앞서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진지한 사람은 말이 적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요한은 말이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위기 시에 예수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고난의 길을 다 따라가며 직접 목격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복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사도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모친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여기 마리아라는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 여인 중에 말 그대로 영욕을 함께 경험한 여인의 대표일 것입니다. 이 마리아가 시골 베들레헴에서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네 몸에서 예수가 잉태하리라는 통고를 받습니다. 아닌 밤중에 처녀가 아이를 잉태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이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당합니까. 처녀가 애를 가졌으니 그것도 시골에서 얼마나 찢고 까부르고 조소했겠습니까. 그리고 태어난 그 예수가 오늘 십자가에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 예수가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이 마리아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찍이 예수님이 결례를 받기 위해서 성전을 찾았을 때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예수를 보자마자 예언하기를 “장차 이 아이로 인하여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갈 때 마리의 마음이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예언한 것일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것 보다 더 비참하게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부모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지금 전장에 나가있는 아들을 둔 부모님들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지금 내 아들이 전장을 헤매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힐 것입니다. 우리교회 젊은이 하나도 이라크 전장에 나가서 싸우고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미국 뉴저지에 사는 어떤 분의 아들도 이라크 전에 파병되었는데 전장에 나간 후 소식이 없어 매일 아침 기도만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떠나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하고 떠났는데 지금 부모는  기도 말고 아들을 위해서 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TV만 쳐다보면 안타깝고 사상자가 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했습니다. 특히 그 아들은 해병대 특등 사수라서 특별 임무를 맡을 가능성이 많아서 더욱 가슴이 졸인다는 것입니다.

부모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로 아들딸이 죽어간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구덩이 속에서 울부짖는 내 아들 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오죽 하겠습니까.  오죽하면 기절하고 정신을 잃겠습니까. 내 아들 딸들이 지하철에 갇혀서 수백 도나 되는 열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정신을 잃지 않겠습니까. 지금 마리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들이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참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사람이 더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중요한 한사람이 더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로마 군인들도 있었고, 여인들도 있었고, 강도와 백부장도 있었고, 제자 요한도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나도 있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뜻을 되새겨보고 그 고난의 예수를 전하고 간증하고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의무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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