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누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가?/ 눅 2:1-14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주일입니다.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기뻐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수년 전에 아폴로 15호를 타고 우주 여행을 했던 우주 여행사 제임스 어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달에 착륙해서 그 마음 속에 끊임없이 외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편 119편을 외웠다고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말씀을 외우면서 하늘을 보고, 멀리 보이는 지구를 보고, 그 주변에 있는 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황홀했을 것 같습니다. 그 우주 속에서 새롭게 창조자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창문으로 내다 보이는 자그마한 공 같은 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였습니다. 축구공만한 별이 눈 앞에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윈의 마음 속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특별히 생각나고, 그 말씀을 외우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시여, 저 축구공만한 지구를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까? 이 우주 안에는 수억 만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 별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저 지구, 그리고 저 속에 우글거리고 살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특별히 기억하시고 사랑하셔서 자신이 사람이 되어 저 지구 속으로 들어 오셨다니,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셨다니, 저 지구가 어찌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인 것입니까? 크게 보인 것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지구 안에서 생각하던 성경 말씀 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동이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탄생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 뿐이고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하고, 우리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연구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문학적인 재능이 탁월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글, 그리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글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묘사해 놓은 것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렇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신비한 일이라서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족할 만한 어떤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그런 대로 무엇인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한번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창조자가 지구상의 피조물 가운데 한 부분이 되신다는 이 사실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도 견줄 수 없고 전혀 생소하며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춥고 어두운 어느날 밤 베들레헴 굴곡진 언덕 위에서 영계와 물질계가 극적으로 교차되었습니다.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께서 시골뜨기 아이가 되셨습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똑 같이 걷는 법과 말하기와 혼자 옷 입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음으로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결함 속으로, 약점 속으로 들어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전지하심은 당시 통용어였던 아람어 발음 하나하나를 배워야 하는 한정된 두뇌로 바뀌었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그의 편재하심은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나귀를 타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전능하심은 나무를 켤 정도의 힘은 있었지만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로 변하셨습니다. 한눈으로 온 우주의 별들을 바라보시던 그분이 나사렛의 좁은 오솔길과 유대 광야의 바위들과 예루살렘의 복잡한 거리를 쳐다 보셨습니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한 점이 되듯, 극작가가 자신이 쓴 연극 대본의 한 등장인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 대로 표현이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 와 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그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우리 마음에 그림처럼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서 빈 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 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소를 키워 봤기 때문에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압니다.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자기가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랑스런 파트너를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트너, 항상 보아도 사랑스럽고 기쁜 파트너, 하나님께서는 이 파트너를 가지고 싶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의도를 차 버리고 제 마음대로 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섬기기를 원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면서 살아도 나중에는 슬픔 밖에 남지 아니하는 허무한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산 죄 값을 짊어지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날마다 문 밖에 나와 기다리며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래 의도대로 우리 인간을 회복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섬기는 것을 가장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자들로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생각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까?'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 원래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바꾸어 거룩한 자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세상으로 가야 될 일입니다. 저 높은 곳에 앉아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결단하셨습니다. '내가 가야지.' 그리고는 그 거룩한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어의를 벗어 던지고 친히 베들레헴 말구유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 오셔도 누구나 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그도 흘려 보기를 원했고, 우리가 고통하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고,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나중에 우리의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이제 절망이 아닙니다. 희망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낙담이 아닙니다.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는 거룩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주시는 이가 오셨으니 어찌 큰 기쁨이 아닙니까? 어찌 우리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구주로 오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를 영접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아마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천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63개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고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자,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 받는 사람이요, 무시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후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도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시대를 초월해서 어느 곳에서나 이 현상은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받아 들인 사람들이 벼슬 하던 사람들이었습니까? 갑부들이었습니까? 유교 학자들이었습니까? 한 두 명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기댈 언덕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하루하루 살고 있던 처절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예수 믿고 목사가 되고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된 데에는 90여년 전에 증조부 할아버지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선교사가 와서 서툰 말로 예수 믿으라고 하는 말이 하도 신기하게 들려서 '나, 그 예수 좀 믿어 봅시다.' 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덥석 예수 믿겠다고 작정한 것이 그 후손들이 예수 믿게 된 기회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만석꾼이 되어 가지고 배부르게 살았다면 증조 할아버지가 예수 믿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하나님의 축복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인기를 누리고 또 사람들에게 유명해 지는 것이 나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 두십시오.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참으로 기뻐하면서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면 불가능합니다. 설혹 여러분이 성공하셨다고 할지라도 낮아 지십시오. 마음을 비우십시오. 설혹 여러분이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설혹 많은 재산을 쌓고 걱정 없이 사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헛된 것이요, 때가 되면 모두가 썩는 것임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리고 낮아지십시오. 가난해 지십시오. 그러면 말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이고,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경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절대 크리스마스 100번을 보내도 사람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그늘진 곳에서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짓밟힌 사람, 피지도 못하고 꺾인 사람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세상 구석구석에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자들인데, 아직도 예수님이 오신 그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해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못하고 방치된 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놀라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이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할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강남과 같은 호화로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형 교회들, 사랑의교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짓밟히고 악취가 나는 옷을 입고 누더기를 입고 저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진정 하나님이 찾는 거룩한 백성으로 알고 다가가는 심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갈 곳 없어 사창가를 헤매다가 예수님 이름 부르고 찾아오는 사람을 우리가 따뜻하게 맞아 들일 수 있는 품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것이 없습니다. 말구유에 계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에는 주님의 오심을 기뻐할 수 있는 순수한 간증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우리는 낮아집시다. 그래서 목자들과 함께 말구유 앞에 무릎 꿇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기뻐하는 자가 됩시다. 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꼭 들어야 될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데, 이들을 우리가 데리고 와서 함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자가 됩시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 누가 예수님을 진정 기뻐하고 찬양하며 영접할 수 있습니까?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경건한 처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원자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 모두가 평생 기도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구원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안나와 시므온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들도 이 세상에서 기댈 언덕이 없었기에 오직 자기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오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러나 여러분, 참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장 태어나셨다고 해도 세상적으로 말하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목자였습니다.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30년 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 일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구원자는 오셨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30년을 기다릴 동안 요셉도 죽었습니다. 사가랴도 죽었습니다. 엘리사벳도 죽었습니다. 목자들 가운데 여러 명이, 나이 든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얻지 못하고 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30년 후에 예수님이 드디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적으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세도가 당당한 권세자가 되었다는, 귀족이 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건강하고 장수해서 200살까지 살았다는 기록도 성경에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얻은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고통했습니다. 여전히 병들어 씨름하다가 세상 떠났습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성령이 강림 하시는 영광스러운 사건이 연속되는 그 당시에도 구원자가 오심을 기뻐하던 거룩한 백성들에게는 세상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자가 오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가 그들에게 베풀 그 마지막 천국의 영광을 그들은 내다보고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구원의 축복이 임하는 날을 날마다 기다리다가 그들은 갔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그 구원자를 찬송하고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로마서8장24절, 25절 보십시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기다리다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다리다가 '예수님' 부르고 다 갔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구원자를 발견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구원자가 준비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들은 갔습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특별한 사람들이 된 것 아니잖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금방 응답 받고 갑자기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병으로 인해 씨름하고 어떤 때는 탄식하고 잠을 못 자는 고통을 겪지만 기도했다고 금방 나아서 문둥이가 나은 것처럼 펄펄 뛰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 몇 명이나 됩니까?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갑자기 위로 하시느라고 더 높은 자리에 올려 주신 경험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놓고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이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이라도, 아무리 한 순간 우리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드는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다 없어집니다. 그런 것을 주려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헛된 것을 우리에게 안겨 주려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 없어지지 아니할 것,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자가 오신 것을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좋은 날은 앞에 있습니다. 가장 최고의 행복은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다 기다리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는 이렇게 감격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 구원하려고 말구유에 탄생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흥분하고 감격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을 우리가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다가 그는 목 잘림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이 볼 때에는 실패자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 앞에는 하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어떻게 사도 바울만의 신앙 고백입니까? 나 자신의 신앙 고백이지요.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 그 사람만이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낮아지십시다. 마음을 비우십시오. 말구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낮아지시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러면 그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구원을 기다리십시오.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기다리고 그 구원의 길을 날마다 날마다 인내하며 걸어 가십시오. 그러면 그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찬송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종려주일설교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0) | 2022.08.23 |
---|---|
고난.종려주일설교 :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0) | 2022.08.23 |
성탄절에 기억할 사람들 (마1:18-25) (0) | 2022.08.23 |
성탄의 축복 (마 1:18-25) (0) | 2022.08.23 |
성탄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 (마 2:1-12) (0) | 2022.08.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