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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석양길에서 만난 그분 (눅 24: 13-24 )

by 【고동엽】 2022. 8. 21.
 

 석양길에서 만난 그분   (눅 24: 13-24 )

사람마다 그들이 좋아하는 날이 있고 싫어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날은 자신들이 살아오는 생의 여정에서 특별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어떤 좋은 사연이 있는 날입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은 그들의 지나온 생에서 아픔이나 슬픔이 있었던 날입니다.

서구 전통에 따르면 금요일은 그렇게 좋은 날이 아닙니다.

서구 사람들은 금요일에는 행운보다 액운이 많이 생기는 날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금요일은 거룩한 날로 들어가는 준비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에 안식일을 대비해서 일상적으로 해오던 모든 행동을 서서히 마무리하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나서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특별히 연중 한번 맞이하는 유월절 안식일 10일 전부터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위한 준비에 온 정성을 다 쏟습니다.

유월절 안식일 전 날인 금요일은 평소 때의 금요일 보다 더 고무된 감정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안식일을 지난 일요일은 연중 생활을 새 마음과 기분으로 시작하는 새해와 같은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예루살렘의 유월절 안식일은 끝났고 들떠 있던 사람들의 삶이 제자리고 돌아온 그 어느 해의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유월절 축제가 끝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지만 엠마오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정상적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전 날인 금요일은 좋은 날 거룩한 날이라기보다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죽는 날이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은 그 어떤 것도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깊은 실의, 절망, 아픔, 혼란 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날들이 슬픔과 비애의 날이 된 것은 그들의 친구요, 스승이며 동시에 그들의 생의 희망이며 생의 의미 전부였던 예수께서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난 날, 그 소문의 주인공과 함께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소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에게 사실여부를 물어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루머와 같은 소식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보다 더욱더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안정과 평화, 희망을 안겨주는 도시라기 보다는 아픔, 혼란, 고통을 가중시켜주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평소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이야기 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빠져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엠마오였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작은 마을로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엠마오 쪽으로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쓸쓸한 석양길은 실의와 좌절, 혼란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더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들은 소문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의 대화에 갑자기 한 낯선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그들과 동행이 되기를 원할 뿐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신들이 길 가면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은 그들의 대화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 낯선 사람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일어난 일을 어찌 혼자만 알지 못합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 낯선 사람이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며칠새 되어진 슬픈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뿐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대로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그 낯선 사람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그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그분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그들이 여인들의 증언이나 빈 무덤에 대한 말을 믿지 않았다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엠마오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엔 이상하게도 그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세 사람은 동네 밖에서 멈추었습니다. 해는 그들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언덕들이 있는 지평선에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그 때 낯선 손님은 계속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머무는 곳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앉았을 때에 그는 빵을 들어서 축복하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바라본 낯선 사람은 예수였습니다. 그들이 알아보는 그 순간 그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망, 실의, 혼란 가운데 있던 두 사람, 그들의 삶이 거의 무너져 내려 무너진 잔재들과 먼지들로 가득차 있던 그들의 삶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 빛은 그들의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절망의 터널을 빠져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굴복하거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일어나서 석양길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비애와 슬픔, 상실의 장소가 아닌 새벽으로 가는 희망과 은총의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들의 마음에는 새로운 생의 계획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엠마오에서 그들이 아주 짧은 한 순간의 부활하신 예수의 체험은 그 후 그들의 평생동안 새로운 생의 목적과 의미를 갖고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좌절과 같은 어둠과 절망에 묻혀있는 사람들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부르심이 있었고 새로운 생의 목적과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무엇 때문에 누구로 인해 어떤 상황 때문에 생을 비관하고 포기해야하는 나약함이 그들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길로 상징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연민, 슬픔, 좌절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긴 상태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로 걸어가는 우리를 주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그러한 인생의 길에 낯선 분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엠마오 도상에서 만나는 주님은 우리에게 누가 전해 주는 말을 왜 믿지 못하느냐, 그 어느 누구가 행하는 이적, 방언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왜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왜,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너희의 생을 포기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죄절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회의에 찬 내면의 대화에 개입하십니다. 어떤분에게 주님은 평생 낯선 분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사람에게 그 낯선 분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구주가 되십니다.

엠마오 도상에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의지하고 신뢰했던 모든 희망의 내용이 무너져 내린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너져 내린 생의 잔해들 틈에서 뿌옇게 솟아오른 먼지 속에서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함 가운데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부활의 새 생명의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사업가가 불경기로 인해 더 이상 사업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날 이른 아침 그는 집을 나와 회사에 가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불러놓고 회사가 당면한 어려움을 솔직히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여 사원들에게 골고루 분배한 다음 회사문을 닫았습니다.

그는 무일푼의 빈털털이로 힘없이 늦은 황혼 시간에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조그마한 공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때 그에게 실낫 같은 빛이 그의 어두운 마음에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가 벤치에 앉아 있는 공원은 본래 조그마한 몇 동의 아파트가 서 있던 곳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파트에 불이나서 모두 타버렸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후 아파트 건물 소유주는 그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짖지 않고 그 터를 시에 기증했습니다. 시에서는 그곳에 아름다운 공원을 세웠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실의에 빠진 사업가에게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불타고 난 후 그 잿더미에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지 않았는가? 나는 이제부터 또 한번의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사업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희망과 기쁨 가운데서 집으로 귀가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생에는 또 한번의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 안에서 절망, 끝장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분에게서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엠마오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시간 식탁에 둘러 앉은 세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매우 신비스러운 영적 메시지를 듣게됩니다. 이 식탁은 성만찬의 식탁이라기 보다 우리가 대하는 일상의 식탁입니다. 그 식탁에 부활의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참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식탁과 관련된 이런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두 사람은 부활의 주님의 소식을 그들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제자들 역시 두 제자와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였습니다. 부활하신 한 주님에 대한 체험 가운데서 그들의 교제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 누가는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몬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깊은 자괴감,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므로 후회와 자책감에서 그를 풀어주시고, 그가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엠마오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바탕에는 그러한 공통된 체험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의 생의 목적지는 무덤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보좌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거기에 응답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정년퇴직이나 끝이 없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비로소 마치게 됩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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