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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복음 (누가복음24:34-35 )

by 【고동엽】 2022. 8. 21.
 
부활 목차 돌아가기
 

부활의 복음   (누가복음24:34-35 )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34절에서 3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부활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사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완전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부활은 그래서 귀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끝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까닭에 구원의 길이 완전히 우리에게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은 해마다 날짜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하고 어떻게 지키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은 춘분이 지나면 만월이 됩니다. 그 만월이 지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부활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이때쯤 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유대인의 달력과 비슷하다하여 그렇게 정하고 지켜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면서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주는 복된 소식이 무엇인지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영생의 복음 (34상-, 요 20:1-18)
본문 34절을 보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라는 말씀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라는 말이 누구의 말인가? 가 문제입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나타났다고 했는데 베드로가 한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살아났다는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일까? 라는 문제에서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일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에게 나타나시기 전에 주께서 살아 나셨다는 말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과연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에 이어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은 영생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재산이 많은 집의 딸이었고 얼굴도 예뻤고 몸매도 맵시가 있는 여자였답니다. 이쯤 된 여자가 바로 살아가면 참 좋은데 한번 아차 하고 다리를 헛디디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난잡한 생활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악한 귀신 일곱 마리가 들어가므로 완전히 폐인이 되었습니다. 귀신 일곱이 들어갔으니 옷을 제대로 입겠습니까? 제대로 먹기를 하겠습니까? 제대로 잠을 자겠습니까? 완전히 귀신에 사로잡혀 귀신의 종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구경거리가 났다고 하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아이들이 조롱하는 곳에 가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조롱을 당하고 있곤 합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한번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말씀 한마디로 명하신 즉 귀신 일곱 마리가 줄줄이 쫓겨 나갑니다. 귀신이 다 나가버린 결과 막달라 마리아가 정상으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귀신에게서 완전히 해방이 되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100%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고 귀신이 나갔고 제정신을 차린 것이 아닙니다. 귀신 일곱 마리를 쫓아내는 일은 병원에서는 못합니다. 이렇듯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쯤 되었으니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있는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수종 들고 봉사했습니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이 부활하리라 생각이나 했습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해 드렸지만 예수님이 죽음으로만 끝이 났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귀신에게서 해방된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죽으셨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5:17).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옷 입듯 입혀 주실 때 즉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완전히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장례를 치를 때 준비 없이 치르다 보니 대충 대충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안식일을 지내면서 향유를 준비해 놓았다가 바로 오늘 새벽 미명 아직도 캄캄할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돌무덤을 파고 큰돌을 가져다가 입구를 막고 인봉해 버린 예수님의 무덤을 로마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갑니까? 로마군인들이 웬 떡이 굴러오나 하고 붙잡아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향한 간절한 그녀의 마음이 그런 위험도 무릅쓰고 무덤을 찾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무덤에 가서 보니 로마군인들이 한 명도 없고 무덤 아구를 막았던 돌은 다 굴려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니 천사가 있었습니다. "왜 산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혼이 나서 도망 나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뜨겁디뜨거운 한증막에 들어갔을 때 남자가 먼저 나옵니까? 여자가 먼저 나옵니까? 남자가 먼저 나옵니다. 그 만큼 남자가 참을성이 적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하고 먼저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는 떠나지 않고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마리아야"하고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라고 전했습니다. 만천하에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과연 주께서 살아나시고'라는 말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막달라 마리아는 육신적으로 귀신에게서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에서 영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영생의 복음이었습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세계유행을 창조해 낸다고 할 만큼 유행의 여왕이었던 도리언 리 파커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쯤 되고 보니 이름은 날대로 나고 돈을 돈대로 벌었습니다. 그 돈을 보고 사랑한다고 하며 쫓아오는 남자에게 속아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자는 돈만 챙기고 떠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또 헤어졌습니다. 세 번째 남자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네 번째 남자와도 결혼을 했는데 모든 재산을 다 축내고 헤어졌습니다. 그 때 어느 남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들은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의 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내 인생 끝나는 구나 싶은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때 이미 예수를 믿던 남자와 결혼한 딸이 지금 갓 결혼을 하고 친정에 다니러 왔습니다. "어머니, 이러고 혼자 있으면 더 고민만 하게 되고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게 될텐데 우리 교회에서 하는 신앙 수련회에 함께 참여하시지요?" 신앙이라 또는 교회라는 말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던 파커는 딸의 간청에 억지로 따라갔습니다. 수련회에서 하루 동안 성경공부만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돌아오고 싶지만 딸을 생각해서 꾹 참았습니다. 그 다음 날이 되면서부터 강아지가 눈뜨듯이 성경에 대해서 뭔가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뭔가 가슴이 열리고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신앙 수련회가 마칠 때쯤 해서는 그만 통곡을 했습니다. "내가 성경을 모르고 향락에 빠져서 살 때는 그것이 행복인 줄로 착각하고 이렇게 살았는데 성경을 알고 보니 인생이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잘 못 살아도 한참을 잘 못 살았습니다"라며 통곡을 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 크게 기사가 났습니다. 무덤을 그리고 그 그림 밑에 기사를 썼고 무덤 앞에 비석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비석에 1972년 5월 9일 도리언 리 파커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여기 잠들다고 하는 말은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무덤에 구멍이 있는데 속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속이 왜 텅 비었습니까?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1972년 5월 9일부로 옛날에 도리언 리 파커는 죽었고 새로운 도리언 리 파커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녀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영생의 기쁨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감사가 있고 충성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주를 만났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은 영생의 복음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귀신에게서 구원 얻은 그 이상의 복음입니다.

둘째, 변화의 복음 (34하-)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입니다. 말을 바꾸어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한다면 최고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최고의 기적입니다. 두 번째로 큰 기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고 귀한 기적입니다.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이 안수 기도를 받고 펄떡 일어나 10년을 더 살았다? 는 사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지만 사람 자체의 변화와는 다릅니다. 못된 사람이 예수 믿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두고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이런 변화의 복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34절 하반절을 보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본래의 이름이 아닙니까? 시몬이라는 사람은 고기잡이로 밥벌이로 하던 사람이요, 세례요한의 제자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동생 안드레가 먼저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메시아를 만났으니 가보자 하여 형을 예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이 본래 이름이요, 나중에 바꾼 이름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3년 동안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볼 것을 다 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악당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갈 때 칼부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칼부림을 했다? 바꾸어서 김창인 목사가 칼부림을 했다 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리고 계집종에게 끌려 다니면서 '나는 예수를 모릅니다. 절대로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저주라고 하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겨우 계집종에게서 빠져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서 행방불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 베드로를 이 꼴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갑니다. 베드로의 과거를 따졌다면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천하에 있는 쥐구멍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만난 예수님은 현재를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진심이냐?" "예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며 그에게 큰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가 나가서 복음을 한번 외치면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또 한번 나가 복음을 외치면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유대교가 쓰러지고 기독교 천지가 될 지경입니다. 때 마침 유대교 관원들이 베드로를 붙잡고 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그리고는 "예수 전하지 말라. 전도를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전도하면 죽이겠다"고 하면서 찔러 죽이려는 듯 위협합니다. 옛날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할 때 같았으면 별소리를 다하겠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은 전도하라 하시고, 너희는 전도하지 말라고 하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게 생겼는가? 너희 스스로 판단하라.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도 말라. 그런 소리를 하려거든 내 목부터 먼저 떼어 낸 다음에 하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유대인의 관원들도 어찌하지 못하고 베드로를 풀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를 십년 믿고도 아직도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변화 되게 되어 있기 까닭입니다.
감리교 선교사로 유명한 스탠리 존스가 승천한 자들의 노래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 중에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탠리 존스가 아프리카 정글에 가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어느 골짜기에 큰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부족에 망나니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망나니는 보통 망나니가 아니었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못되게 굴던 망나니에게 스탠리 존스가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망나니가 예수님께 항복을 한 다음에는 그 의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봉사를 하고 앞장을 서서 선한 일을 했습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망나니에게 스탠리 존스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 같습니까? "뒤에" 혹은 "후에" 라는 말 after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after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후에 즉 예수님을 만난 뒤에 변화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들도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을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던 내 남편도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베드로에게 변화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셋째, 재기의 복음 (35-)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절을 보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 지신 것을 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밝혔는데 글로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글로바의 아내가 마리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3장 18절을 보면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야고보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한 사람인데 한 곳에는 글로바가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되어 있고 한 곳에는 알패오가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되어 있는 셈입니다. 한 여자가 글로바와 알패오 두 남자와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글로바와 알패오는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를 믿고 이름을 베드로로고 고쳤습니다. 시몬과 베드로가 각기 다른 사람입니까? 한 사람입니다. 그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 예수님의 제자 중 작은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말할 때 베드로 다음으로 나오는 야고보는 큰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죽 기록되는 중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나옵니다. 이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예수를 그렇게 잘 믿고 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온 가족이 얼마나 잘 믿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와 그 아들 야고보는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못 참고 다른 사람을 살살 꼬여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낙심하고 좌절하여 실망에 빠져 돌아갑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망했다 싶어서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모양으로 일으키고 돕는다는 사실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제자는 말씀을 한마디 한마디를 차근차근 풀어주는데 얼마나 가슴이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글로바와 다른 한 사람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엠마오에 가서 더 지나가려는 것 같이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진짜 지나가려는 것입니까?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 때 글로바와 다른 한 사람이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어가시지요"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들어갑니다.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다가 저녁 식탁에서 기도하신 다음에야 주님이신 줄 깨달았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서야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재기한 것입니다. 거꾸러졌던 사람이 다시금 일어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망했던 사람이 다시금 일어나서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네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글로바에게 재기의 복음입니다.
잠언 24장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의인은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 사람도 망하고 또 망하고 일곱 번까지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주님이 다른 모양으로 일으켜 세워주시므로 그 사람은 재기하고 또 재기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까지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즉 칠전팔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힘을 얻어 재기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어 망한 것 같았으나 죽음의 권세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일어나신 그 예수님이 실패했거나 망한 가운데 있는 여러분을 일으켜주시는 것은 극히 쉬운 일입니다. 일곱 번까지 망할 지라도 마지막 여덟 번째까지라도 꼭 일으켜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재기의 복음이라는 것을 꼭 믿으시고 이 어려운 때에 반드시 예수님의 도움으로 재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를 믿는 사람은 결코 엎드려지지 않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첫째 영생의 복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마귀의 세력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그 보다도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영생을 체험했습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은 변화의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었지만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셋째 재기의 복음입니다. 글로바가 실망과 좌절 가운데 그의 믿음은 거꾸러졌습니다. 그러나 무덤권세 사망권세를 깨치고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글로바를 다시 일으켜 재기시키셨습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들의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김창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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