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기 설교[1,404편]〓/어린이 주일설교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엡4:1-6)

by 【고동엽】 2022. 8. 21.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엡4:1-6)

여전히 서울강남의 집값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10억이 넘는 집들은 보통인 것 같습니다. 20,30 70억짜리 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울 강남뿐이 아닙니다. 전국의 아파트 값들이 폭등을 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값들을 올리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지은 아파트들을 가보면 얼마나 잘 지어놓았는지 탄복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지은 아파트에 들어가기도전에 더 좋은 집들을 만들기 원하여 그 새것들을 다 뜯어내고 인테리어를 새로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집들은 날마다 늘어나는데 좋은 가정은 점점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집만 좋아지면 좋은 가정이 될 줄 알지만 그리한다해서 좋은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2003년 한해 부모를 살해해서 구속된 사람이 40명입니다. 2003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할 것입니다. 부모를 때리거나 감금하거나 협박함으로 구속된 자녀가 천명이 넘어 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하나같이 술 놀음 돈의 경제문제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우리모두는 지금 가정파괴시대 가정붕괴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날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잘 키워야 한다 많은 말씀을 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동체 곧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에 있어야 할 절대 원리 하나됨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찌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합니다. 이 말씀을 안지는 한참 되었지만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루의 계획은 내가 한달, 1년의 계획도 세워보지만 그러나 2년,3년이 지나보면 내 뜻대로 된 것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밀려 살았고 무엇인가에 끌려 살아왔습니다. 많은 것들이 나의 선택인 것 같아도 내가 잘해서 산 것 같아도 돌이켜 보면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만남이 그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남들이 너무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공동체는 만남을 통해 있어지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가정공동체가 그러하고 교회공동체가 그러합니다. 직장공동체 학교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공동체중 가정과 교회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나 교회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등을 돌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족은 함께 사는 곳입니다. 더 나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 맺어주신 관계라는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에 있어 관계를 필요관계와 절대관계로 구분합니다.

먼저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필요관계입니다. 필요관계는 나의 선택이 절대역할을 합니다.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변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합니다. 친구, 이웃, 식장들에서 맺어진 관계들이 그러합니다. 다음은 절대관계입니다. 가정이 이러합니다. 가족은 내 선택이 아닙니다. 이 가족관계는 30년을 만나지 않고 부정을 해도 마음의 짐을 풀어버릴 수 없습니다. 가족은 가족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입니다. 가족은 이 땅의 삶을 사는 동안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관계에 있어 또 하나는 교회가 그러합니다. 교회는 나의 선택인 것 같아도 절대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나뉘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이 땅에서 최성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가족공동체에 상처가 있는 사람도 온전한 행복이 없습니다. 성도의 관계는 천국가서 영원을 함께 보내야 할 영원공동체입니다. 가정 그리고 교회공동체는 그 시작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절대관계입니다. 가정 그리고 교회는 나의 필요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더 좋은 선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 그리고 교회공동체는 필요욕구가 전제가 되어 관계가 맺어지거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는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다 하여 더 나은 선택을 고려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필요욕구에 매여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있습니까?

가정과 교회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피안에서 형성된 관계이며 교회는 예수의 피로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희생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부모의 희생 자식의 효도 성도의 희생입니다. 또 하나 더 큰 사랑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한번 맺어지면 나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싸워도 함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는 교회 공동체 그리고 가족공동체에 주신 절대원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정은 내 필요를 체우는 곳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을 선택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매여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3절)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하여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각자 다르고 키도 다르고 배운 것도 다른데 성격도 취미도 환경도 다른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힘써 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은 이렇게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의 하나됨은 조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너와 내가 하나되어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교회나 가정은 다 같을 수 없고 다 같아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옛날부터 부부애가 깊은 사람들을 보면 금슬이 좋다고 합니다. 금슬의 금은 거문고를 말하고 슬은 비파를 말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잘 어울려 연주되면 최상의 소리가 나온다 합니다. 그 아름다운 조화는 옛부터 신비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잘 조화를 이루어 살면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소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연주하며 최상의 소리를 이루기까지 처음부터 잘 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했겠습니까? 저절로 하나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혼했으니 낳았으니 저절로 하나됨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안에서 교회안에서 이미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을 깨트리는 요인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이 하나됨을 깨트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금이가게 하여 행복을 잃어 버리게 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되게 하신 공동체가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할 때 상처는 배가 됩니다. 이웃은 싫어지면 안 만나면 됩니다. 이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아닙니다. 가족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상처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족을 인한 상처, 교회를 인한 상처는 평생 가슴에 남습니다. 하나됨의 원리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입니다. 왜 먼저여야합니까? 여러분은 예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금번 가정의 달인 5월에는 소홀했던 가족들이 있다면 손을 먼저 내미시기 바랍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4-6절)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입니다. 나도 싫은데 수준에 맞지 않은데 내 마음에 들이 않는데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음에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써 하나가 되어야 함에 다른 이유가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몸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 믿음도 하나 소망도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아 하나가 될 수 없다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름대로 이유를 대봅니다. 이 어리석은 마음들이 가정, 교회공동체에 상처를 줍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에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데 성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좋은 배우자를 원하기 전에 더 좋은 배우자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더 좋은 자녀를 원하기 전에 더 좋은 부모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더 좋은 목사를 원하기전에 더 좋은 성도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물론 이 땅을 살아가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요구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더 좋은 사람 붙혀주세요라고 많은 기도를 합니다. 목회하면서도 더 좋은 사람만나게 해달라고 원하지만 그러나 늘 생각보다는 미달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더 좋은 장로님 더 좋은 성도 만나면 교회가 좋아질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어느날 서울 온누리 교회의 세미나중에 처음방문한 교회의 웅장함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동아 아파트를 짓다가 중간에 교회도 하나 지어야 하겠다 해서 당시 신동아그룹 회장이었던 최순영 장로가 동서지간인 하용조 목사님을 위해서 교회를 지어주었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 와서 제 동서들을 보니 안 될 것 같습니다 별 기대감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목회가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들 합니다. 어느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좋은 사람 붙여달라 왜 희안한 사람만 붙여주시는 겁니까 하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재명아 나도 희안한 사람만 데리고 다녔다. 나를 팔고 배반하고 저주할 사람들만 데리고 다녔다. 너는 그정도는 아니지 않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할때에도 기도하고 응답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이때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완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나 가정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요구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날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모세야 바로에게 가라 이 때 모세는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가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을 못합니다. 가라 너에게 아론을 붙여주었느니라 하십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부족한 사람을 붙여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원래 부족한 목상에게 부족한 장로 붙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부족한 남편에게 부족한 아내을 주시는 것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부족을 알고 붙였는데 자기 부족도 안보고 서로의 부족만 탓하면 자신을 진짜로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족안에서 내게 더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최선의 사람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관계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벧전 4: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아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도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공동체 안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2절)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과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마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입니다. 무엇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가정이 말입니다. 교회가 말입니다. 겸손의 마음입니다. 겸손은 주님의 옷입니다.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경건한 신앙의 비결은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그때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입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고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우습게 여기고 배우자를 우습게 아는 마음은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종으로 오셨고 종처럼 사셨습니다. 사도바울의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모든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합니다. 사도중에 누가 크냐 따질 수도 없지만 어떤 면에서 사도 바울처럼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없고 실력도 학문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작은 자라 합니다. 겸손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고 상대는 높이는 것입니다. 겸손에서 실패하면 신앙생활전체가 다 실패합니다.

세상은 높아지는데 매력이 있지만 가정과 교회는 서로 낮아지는데 매력이 있습니다.

겸손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온유입니다. 온유 또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온유는 단순한 부드러움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마음입니다. 야생동물인 호랑이가 조련사에게 조련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말하는 것도 표정도 표현도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것처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은 맞는데 그 맞는 말을 마귀처럼 사용합니다. 열변을 토하지만 아무리 맞는 말이지만 온유에서 무너지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고전 13장에 사랑은 무엇이라 합니까?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 합니다.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언어도 행동도 함부로 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다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합니다. 또 하나 무엇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오래참음으로 입니다. 참는 것은 능력입니다. 자기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참는 것은 기다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기다려주듯 아내가 자식을 기다려 주듯 공동체안에서 서로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참음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얼마나 마음에 들겠습니까? 몇년 결혼생활했지만 마치 적과의 동침하듯 삽니다. 좋아서 삽니까? 참아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아내는데 도사여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나 가정공동체는 참는 일에 도사여야 하고 참는 것은 성경의 요구입니다. 어떤 사람은 못 참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지 않고 감정표현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끔 화를 냅니다. 도둑놈이 가끔 도둑질해도 도둑놈은 도둑입니다. 호랑이가 가끔 문다고 해서 호랑이 아닙니까?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입니다. 사랑가운데서 공동체의 하나됨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받아들여 주는 것까지 해야 용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서로 싸운 사람에게 화해시키기 위해 말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용서해줘 합니다. 그러면 당사자중에 한사람이 용서했다니깐 용서했어 이젠 그 사람 안보면 되잖아 합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를 받아주시듯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듯 우리는 받아주고 품에 안아 용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용납에는 더 큰 사랑과 더 큰 용서를 전제로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명분도 어떤 이유도 붙일 수 없습니다. 평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대단한 일 할려고 더 큰 일 할려고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은 이미 하나입니다. 하나되게 하셨으니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하나됨의 큰 열매가 되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 있으니 길이 참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의 가정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