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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 가고 계십니까? (빌 3:1-16)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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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 가고 계십니까? (빌 3:1-16)

오늘은 7월 1일입니다. 마라톤으로 말한다면 2007년의 반환점을 돌아섰습니다. 절반이 지나가고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올해의 남은 경주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잘 감당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잘 달려오셨습니까? 어디까지 오셨습니까? 산술적으로 말한다면 절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목표가 50%는 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 만 원을 벌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쯤 5천 원은 주머니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지금 2천 원 밖에 벌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목표에 많이 미달한 것이겠지요.
이런 계산을 한다면 이 자리에도 속이 상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지금쯤 영어 점수를 10점은 더 올려놓았어야 하는데, 학기초나 지금이나 성적이 비슷하다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런 산술적 계산으로 우리를 좌절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산술적 계산을 하는 이들을 말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이런 육상 경기나 돈벌이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상 경기에서는 세 가지가 특이합니다.
첫째는 골인 지점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육상 경기는 처음부터 달릴 거리를 정해 놓고 시작합니다.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등의 단거리 경주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천 미터, 5천 미터, 일만 미터 등의 중장거리 경기가 있습니다. 가장 길게는 42.195킬로를 달리는 마라톤이 있습니다. 거기 골인 지점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거리를 정해 놓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의 길이가 다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는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거기가 어디일지, 언제쯤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경주는 <50% 왔다, 70%왔다>는 식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육상 경기는 목표 지점에 골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인 지점에 도착하지 못하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중간까지 남보다 앞서 1등을 해도 골인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포기하든지, 쓰러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거기가 골인 지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생에 미완성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 너무도 일찍, 너무도 모자란 것이 많은 상태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는 자기 시간을 다 살다 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육상 경기는 속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상을 받는 게 아닙니다. 누가 먼저, 얼마나 빨리 도착했는가를 따집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금메달을 받습니다.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속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대 문명은 우리 인생에도 속도를 강요해왔습니다. <남보다 빨리 달려라! 남보다 앞서라! 남이 열 개를 알 때 넌 백 개를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육상 경기에서도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골인 지점과 정반대로 달린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경주에서는 방향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옳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누구보다 성공했을 분입니다. 바울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하나 대충하는 게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이하를 보십시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란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데 철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 하나라도 어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또 그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까지 잡기 위해 갈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달릴수록 더 위험합니다. 그가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가던 어느 날,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를 택하여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삼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바울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4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욱 그러하다>란 말은 그가 얼마나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7-9절을 보세요.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은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길 원합니다. 이제는 인간적 의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 17절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부터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3차, 혹은 4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고초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계십니까?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자신을 집이 아니라 기생의 집으로 인도한 말을 한 칼에 베어버린 김유신 장군의 결단과 같은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내와 남편에게로 가십니까? 아니면 다른 데로 가십니까?
여러분의 돈이 마땅히 쓰여져야 할 곳으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투자되어서는 안 될 곳으로 흐르고 있습니까?
자신을 의지하는 방향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가십니까?
자신을 위한 방향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과 주님을 위하는 방향으로 가십니까?
도착했을 때 허무한 삶이 아니라, 살아온 과거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십니까?
손에 쥐었지만 안개를 잡은 것처럼 없어져 버릴 것들이 아니라,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을 향해 가고 계십니까?

세상이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가고 계십니까?
알아 보았자 도움이 안될 정보들을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고 계십니까?

한 해의 절반을 돌아서는 이 시점에서 방향이 옳은가에 대한 검토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과감한 방향 전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방향이라면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성>입니다.

계속성이란 방향이 옳다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속도가 빠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비록 남보다 뒤쳐진 것 같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말성경>으로 보면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그 길을 좇아갑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현재 위치에 매이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남보다 뒤쳐져 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향만 옳다면 <지금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그걸 문제삼지 말고, 앞으로도 꾸준히 같은 길로, 계속 나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를 보세요.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삶은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올바른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이제는 앞을 바라보면서 더 묵묵히 전진하겠다고 말씀합니다.

12-14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뒤에 있는 것은 생각지 않고 앞을 보면서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007년도의 반환점을 돌아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붙잡은 방향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창고 교회>의 비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산과 영도에 꼭 맞는 성경적 비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가득 가득히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영혼을 위로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교계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묵묵히 달리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앞섰다고 판단되어도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못하다고 생각되어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묵묵히 달리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멈추시는 바로 그 지점이 우리의 골인 지점이 될 것입니다.

남들보다 뒤떨어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의 글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우리들은 사탕을 얌전히 녹여서 먹다보면 한 알도 다 먹기도 전에 남들이 나머지 사탕을 다 먹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막연한 피해의식들이 우리들의 생활을 지배하면서 우리는 피곤한 선두다툼을 해 왔고, 편법을 동원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부서지고 망가졌는지요. 저는 국화를 생각해 봅니다. 국화가 그 향기와 빛으로 사랑을 받는 것은, 다른 꽃들이 다 피어나는 봄날에 잎만 단 채로, 묵묵히 기다리며 봄여름을 다 견디고, 초가을의 무서리까지도 견디고 난 후에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 보다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영혼을 가꾸는 일도 꾸준히 계속하면 됩니다.

바울 사도의 감동적인 자기 고백을 살펴볼까요? 주후 55년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침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의 쓴 에베소서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 또 얼마 후에 쓴 디모데전서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을 자랑하는 삶을 버리고, 주님만을 자랑하는 겸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을 가꾸는 길을 얼마나 꾸준히 걸었는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겸손해졌습니다. 처음엔 <사도들 중에서 작은 자>라고 하더니, 나중엔 <모든 성도들 중에서 작다>고 하더니, 후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가 낮추는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주님은 그를 높이고 또 높이셨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겸손한 자의 길, 복음 전도자의 길을 묵묵히 걷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달린 후에 바울처럼 달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김석균 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가운데 주의 길을 가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2007년도의 남은 시간을 그렇게 갈 수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를 주님께서 붙드시고, 한 발자국 내 디딜 때마다 붙들어 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출처/김운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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