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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이 무엇이냐? 고전9:18 12.01.01.설교녹취
바울은 먼저 ‘내 상이 무엇이냐?’ 라고 자문한 뒤에
복음을 아무 대가 없이 그저 전하고
복음 전도자로서 응당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의 상이라고 자답 했습니다.
당시 복음전도자들은 복음 전도에 필요한 경비나 생활비를
교인들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었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행18장에 보면, 고린도에서 아굴라를 만난 바울은
아굴라와 함께 천막 제조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무 대가 없이 복음을 그저 전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곳에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4;15~16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이곳 저곳으로 전도여행 다니는 바울의 경비를
빌립보교인들이 모금해서 보내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바울은 고후11:9절을 통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런 내용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한 1년 6개월동안
천막제조만으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경비를 모두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막제조는 바울의 부업이었고
본업은 아무 대가 없이 복음을 그저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고린도교인들에게 응당 생활비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교인들이 바울의 부족분을 메워준 것 이외에도
고린도교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바울 자신의 의지로 인함이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교인들의 헌금을 받고
고린도에서 1년반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은 받으면서도
고린도교인들에게는 응당 생활비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폐를 끼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당시 물질적으로 타락하고 방종한 고린도의 이방신전의 사제들,
단지 생계를 방편으로 철학을 설파하거나
거짓 복음을 퍼트리는
떠돌이 철학자나 거짓 사도들과 구별된 삶을 살려 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를 모함하는 사람들의 거짓 모함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순수함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고린도교인들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훼손하지 않는 일임을,
다시 말씀드리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고린도에서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9:12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동안 복음을 전하고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경제논리로 따지자면, 1년 반동안 바울은 고린도에서
허탕을 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자신의 삶을
한탄하거나 후회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하지 훼손 않게 위해서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아무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상, 즉 보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
그 권리를 주신 하나님을 더 귀히 섬김을 의미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바울에게 그런 믿음의 삶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총독 벨릭스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불러내어서
‘네가 믿는 믿음의 요체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행24:25에 의하면, 그때 바울은 세 단어로 대답했습니다.
첫째, 의
둘째, 절제
셋째, 심판이었습니다.
1)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2) 절제.. 헬 엔크라테이아 는 끊을 것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끊어버리고
행해야 할 것을 반드시 행하는 자기 통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기 통제, 자기 부인의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3)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의, 절제, 심판이라는
믿음의 이 세 가지 요체를
그리스도인 치고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크리스천들이 바른 믿음의 삶을 구현하지 못하는 것은
(성숙자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의 요체는 의, 절제, 심판이지만
믿음의 진행과 성숙은
그 역순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자기 통제, 자기 부인의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의식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적 차이도 있습니다.
학생의 경우, 시험을 칠 때, 교묘하게 컨닝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컨닝이나 위장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차이입니다.
새신자반 성숙자반 사명자반을 통해서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멸망을 뜻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의 상 주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셈하시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상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의 상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천에게 얼마나 절대적이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상을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6:1~2에서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세상의 상, 세상의 보상은 아무리 받는다 한들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그 영원한 상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셈하심이요, 하나님의 상주심 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읽을 고린도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권면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고전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운동선수가 우승의 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매사에 절제하듯이
고린도교인들 역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하면서
바울은 자기 자신도
그 하나님의 상에서 제외되지 않게끔
날마다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통제의 삶을 사노라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사는 사도바울이었기에
하나님의 복음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1년 반 동안이나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로 받는 상, 보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세계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상급을 위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통제의 삶을 사는 한
자기 코끝에서 호흡이 멎었을 때
하나님 나라에서 심판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처럼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상을 언급하고,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매사에 절제할 것을 촉구한 것은
향락과 타락의 도시 고린도 속에서
심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셈하심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지 않고서는
고린도의 세상 풍조에 휩쓸림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두 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첫째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곳에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사실만 제대로 믿고 산다면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두가지 사실만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시험을 의식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기 마련이듯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사도바울이 세상의 보상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 자체로 상으로 여기듯이
위 두 가지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살아가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날 한국교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온갖 무리의 현장을 한 번 들여다보면
그 현장 속 무리의 장본인들이 과연 그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인지
-그분들이 과연 심판의 하나님, 상 주심의 하나님, 셈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는다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심령은 이미 세상에 장악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풍조와 돈의 논리를 더 신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세상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기 통제의 삶을 살기 보다는
자기 욕망을 강화하고, 자기 권리를 더욱 확충하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해서야 아무리 달력을 교체한다 한들 *신년 첫주일 설교
금년 역시 묵은 해의 연장이지 않겠습니까?
올해(2012)는 연초부터 모든 것이 녹록지 않습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남북관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서민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지역과 계층간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 뻔한 올해(2012)는
그 어느 해보다도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 의해 휘둘리기 쉬운 환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금년이야말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심판의 하나님!
셈하시는 하나님, 상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만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발하는
자기 통제(절제)의 삶을 경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이 세상의 보상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았던
사도바울이 쓴 모든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영원한 성경으로 남았고
네로 황제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 사도바울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어두운 세상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는
영원한 사도로 살아있습니다.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심의 결과입니다!
올 해 1년 동안
더 이상 세상의 보상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마십시다.
세상의 보상은 바라면 바랄수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이 세상의 보상을 포기할 줄 아는 것 자체를
상으로 여길 줄 아는
이 시대의 성숙한 바울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올 1년 동안도 하나님께서는
이 혼탁한 시대를 위한 당신의 도구로
우리를 계속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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