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성도 (에베소서 6:1-4)
늘 똑똑하게 굴어 부모를 기쁘게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커서 뭐 될까?" "대통령" 신이 난 엄마가 또 묻습니다. "우리 아들 대통령되면 엄마 뭐 시켜줄래?" 꼬마 아들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짜장면" 엄마는 화가 났습니다. "짜장면 너나 먹어!"
작은 것에 행복하기도 하고 작은 것에 불행해지기도 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의 달 오늘은 「효자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을 죽인 죄로 무기수가 되어 15년째 감옥 생활을 하는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내는 집을 나갔고 집에는 치매 걸린 노모와 세 살때 두고 온 아들 하나가 고등학생이 되어 할머니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감옥에서만 살아야 하는 이 아버지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마지막 선물처럼 꼭 하루동안 휴가를 얻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냄새도 서로 모르는 부자가 만나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낯설고 어색하고 쑥스런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핏줄이 땡기듯 가슴이 아리는 사랑을 주고 받습니다. 하룻밤을 지내며 좋아서 웃어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가슴이 아파 울고 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행복의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해 지난주 5월 1일 개봉된 "아들"이라는 영화 얘기입니다. 인생에서 자식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영화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내가 잘 살아야 하고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놈들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삶이 아프기도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시골 기차길 옆에서 부자가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죽을만큼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헤어지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아 주는 아들의 손을 잡고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이 장면 - 부르짖는 짐승처럼 목놓아 우는 주인공 아버지의 아픔이 보는 이들의 가슴에 전달되어 객석은 함께 흐느끼는 소리로 채워집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는 사이 가정에 몰아친 충격으로 노모는 치매에 걸리고 아내는 집을 나가고 모범생이었던 아들은 영양실조, 이름 모를 질병으로 교도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며칠전 죽었습니다. 아들인 줄 알았던 이 아이는 죽은 아들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한 아버지의 잘못이 가정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영화는 전해줍니다. 아들 대역이었지만 아들이란 존재가 얼마나 가슴 저미게 한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주는 가를 전해주고 싶은게 영화의 목적이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가정의 달입니다.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의 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라고 합니다. 어버이가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 보면 궁극적이고 영원한 어버이는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주 앞에서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어버이날 이건만 5월이 되면 후회되는 건 불효요 내부모 잘 섬기지 못한 죄책입니다.
II. 어버이
철없던 어린시절 불효했던 기억을 아파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생선장수 어머니」라는 제목입니다.
어린시절, 시장에 생선을 파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게는 너무도 창피했습니다. 저녁때 팔다 남은 고등어가 밥상에 오를 때면 철없는 투정으로 숟가락을 팽개쳤고, 힘들게 생선을 팔아 초등학교에 보내주실 때에도 학용품 사라며 쥐어주신 돈을 생선 냄새가 난다며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는 왜 그리도 철이 없었는지요. 일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시장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을 보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그 얼굴 사이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머리라도 조아리고 싶어지지만 이제 어머님은 내 곁에 계시질 않습니다. 그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께 용서를 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제 막 철이 들어서 효도 한 번 할까 두리번 거렸더니, 어버이가 우리곁에 아니계신 분들도 퍽이나 계신 줄로 압니다.
마틴 루터의 "대요리문답"에 보면 성경적으로 네 종류의 부모를 말합니다.
첫째,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입니다.
육신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전적인 부모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고, 부모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적인 은혜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는 내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내가 연약할 때에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생명의 젖을 먹여 나를 양육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구속의 진리를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목사님을 말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교역자를 신부라고 합니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이요, 영어로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 "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전에 신부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교인들을 대할 때 자녀를 대하듯 말을 낮추어 "하게"를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영적 아버지인 목사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여러분앞에 대단히 조심스러운 존재입니다. 주의 종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분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 들일 때 자신과 자손들에게 복이 됩니다. 주의 종들의 허물이 보이면 눈을 감으십시오. 아비의 허물을 덮은 셈과 야벳은 자손 만대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비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비웃었던 함은 자손 만대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셋째, 나에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스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사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넷째, 왕을 아버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국가의 원수를 존경할 수 없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애국의 정신이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은 정치 지도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아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과연 부모의 마음을 알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입니다.
어느 광고 카피라이터가 생명보험 광고를 위해 쓴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스물 아홉 -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른 일곱 -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액자를 만들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방에는 누렇게 바랜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마흔 셋 - 일요일 아침, 모처럼 자식과 뒷산 약수터로 올라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흔 여덟 - 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쉰 셋 -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 왔습니다. 당신은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 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예순 하나 -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을 숨김없이 표현한 글입니다.
III. 효도
효도가 무엇입니까? 한자어는 이 효도에 대해 퍽 재미있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는 닷 새 만에 장이 서곤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아들은 그 동안에 해서 모은 나무 단을 지게에 잔뜩 싣고서 아침 일찍 장에 나가서 나무를 팝니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밥상을 준비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집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구밖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드디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을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애틋한 심정이 되어서 좀 더 멀리,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 동구밖에 서있는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자로 묘사를 했습니다. 어버이 친자가 어떻게 씁니까? 설 립(立)자 밑에 나무 목(木)자, 그리고 오른쪽에 볼 견(見)자를 씁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바라보는 그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이 바로 어버이 친(親)자입니다.
한편 아들은 준비해 간 나무를 시장에서 모두 팔고서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도 사고 또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고 동구밖까지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머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리도 불편하실 텐데, 집에 가만히 계시지 않고요!" 그러면서 아들은 등에 지고 있는 지게를 내려놓습니다. "어머님! 어서 이 위에 올라앉으세요. 제가 어머님을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한자에서는 효도 효(孝)자로 표시를 했습니다. 효도 효자는 어떻게 씁니까? 늙을 노(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친(親)이 있고, 효(孝)가 있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다. 효도는 흉내만 내도 복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IV. 효자 성도 - 그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효자성도입니다. 먼저 기독교가 말하는 효는 왜 효도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효도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 공경이란 무겁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높은 가치를 매기라는 얘기입니다.
이 "공경"이란 단어가 명사형으로 쓰여질 때엔 우리의 오장육부 가운데 간장을 일컫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체 가운데 간 기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바로 그 간 기능과 공경이란 말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존귀와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할 때 바로 이 존귀라는 단어와 공경이란 말이 또 같은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은 하지 말라, 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효도의 계명은 아무리 잘 감당하더라도 끝없이 모자라는 계명입니다. 안하면 되는 그런 윤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기록이 많지 못합니다. 한 두 세절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 두세 절 가운데 누가복음 2장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그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묘사하는 성경은 "예수님은 효자로 이 땅에 살아가셨다. 육신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했다"라는 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고통당하며 한없는 아픔을 겪고 계실 때에 자신의 어머니를 불러주셨습니다. "여자여~ 여자여~(구낭)" 구낭 - 이 말은 황후에게 붙이는 극 존칭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네 어머니라" 그 처절한 고통 가운데 마지막 효를 갈무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있던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자리 아니었습니까? 인생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다 감당해 주시는 자리 아니었습니까?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바꿔주시는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효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효의 아픔을 덮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속의 엄숙한 자리에서 불효의 죄를 주님께서 씻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자식들 가운데 나는 효도에 자신이 있습니다. 효도를 완성했습니다.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효도만큼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효의 죄악이 무거운 줄 아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불효의 죄악을 덮어주시고 씻어주시고 옮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모든 불효의 죄악과 허물들이 십자가 밑에서 다 사해지고 용서받았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님으로부터 효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효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효는 예수님으로부터 그 힘을 공급받아 섬기는 효입니다.
V. 효자 성도 - 효도의 방법이 다르다
기독교의 효는 첫 번째 그 이유에서 차원이 다르고, 두 번째는 그 방법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효의 방법 또한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일전에 바닷가 어느 교회에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저는 저녁 식사를 잘하지 않습니다. 우유 한 컵이면 족합니다." 미리 연락을 드렸지요. 월요일 오후 5시쯤 도착해 보니 6시에 일식당에 식사가 예약이 되어 있고 장로님들이 다 기다리고 있답니다. 더더구나 저는 저녁엔 생선회 같은 찬 음식은 거의 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식사니 어쩌겠습니까? 식사시간 대접하는 사람이 미안하지 않도록 요령껏 죽이랑 익은 생선 몇 점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장로님들이 하시는 말씀 "목사님, 이곳 생선 싱싱하고 맛있지요? 생선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없습니다. 많이 드셨지요?" 여러분, 그건 자기들 얘기지요. 나는 밤에 생산회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대접하고 부모님 대접하는 것도 가끔은 자기중심적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것 - 해 드리는 것이 효자성도입니다. 부모님 좋아하시는 것 -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효도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진정한 효도는 감사로부터 시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무엇입니까?
1. 생명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다. 내 어버이를 통하여 생명을 주셨다." 생명에 대한 한없는 감사가 효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 부모님들이 훌륭해 보이지 못해서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많이 배우지 못한 듯하여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통하여 내 생명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이 급변하다 보니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못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보면 실수가 많이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실수가 많았습니다. 내 어머니 그것을 참아 주셨고 내 아버지 내 실수를 바라보며 인내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된 우리가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의 실수를 참아주고 인내해 주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홀로 서지 못하고 거동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서지 못할 때에 내 어머니 나를 안아서 키워주셨습니다. 이제는 늙으신 내 어머니를 우리가 안아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커다란 영광이 되겠습니까? 내 아버지 당신의 손으로 밥을 드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에게 수저에 밥을 담아 입에 넣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효를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것 싫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이 옷과 이부자리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똥 오줌 가리지 못할 때에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싫다 더럽다 말씀하지 아니하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된 우리들이 그런 일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싫어하지 말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 부족한 내게 효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군요. 나를 효자 삼으시기 위하여 이런 기회를 내게 주셨군요." 그 일 감당할 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옷을 입혀드릴 때 부모님이 나의 옷을 입혀 주시고 키운 것 생각하고 불평없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버이의 최고의 영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식들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고 늙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서러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몸으로 낳은 자식으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장 19절에 솔로몬 임금도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께 절하고 자신의 옥좌 우편에 앉혔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였던 솔로몬의 어머니, 양반 고관대작들로부터 얼마든지 무시당하기 쉬운 조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된 솔로몬 임금이 그 여인을 공경하고 높여 드릴 때에 그 누가 그 여인을 무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2. 신앙적인 효도방법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상이나 차려드리면 되는 그런 효도가 아닙니다.
열가지 계명중에 아홉가지 계명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제5계명만큼 어느날 문득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홉가지 계명을 내가 범하고 잘못 감당했다고 할지라도 후회할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있습니다. 새롭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 만큼은 어느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한번 가신 뒤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어버이 잃고 서러워하는 송강 정철 선생의 시 입니다.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품음직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으니 이를 서러워 하노라.」 내 아버지 내 어머니 홍시 좋아했는데 잘 익은 홍시 손바닥에 들고 달려가 이것 어머니 드세요, 아버지 드세요, 드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반길이가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박인노의 조홍 시입니다.
제5계명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슬퍼하며 자녀들로부터 푸대접받고 늙음의 비애가 내 인생에 넘치는 그때, 더욱 서러워지는 계명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퍼지는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입니다.
3. 신앙적인 효도 방법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님을 생전에 섬기기를 잘한다 한들 영혼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고 하면 제대로 효도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부모님 생전에 예수믿게 한 자녀는 최상의 효도를 감당한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에서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능라주단으로 몸에 감아드리고 연락으로 즐겁게 해 드렸다 할지라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는 부모가 되었다면 이 어찌 효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분들이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그분의 생애에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고 하면, 바로 이 순간이라도 그들의 생애에 마지막을 맞이한다고 하면, 그들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금식하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단 하루라도.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예수 믿기를 원하여 제가 금식에 들어갑니다. 한주간 동안 어머님을 위하여 밥을 먹지 않겠습니다. 식음을 전폐할 것입니다. 생명이라도 내어놓고 내 어머니, 내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 천국을, 예수님을 선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금식해 보셨습니까?
50억 인구가 지옥에 가도 내 부모님만큼 천국에 모신다 각오하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될 일입니다. 남들은 이억만리 오지까지 가서 선교하는데 나는 내 가정, 내 가족이라도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 육신 공경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영혼 공경만 하겠습니까? 영혼 떠난 육체 5만개를 가지고 온다할지라도 단돈 100원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영혼 떠나고 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부모님에게 예수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효도이기 때문입니다.
VI. 효자 성도 - 그 상급이 다릅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섬긴 효자 성도에겐 특별한 상급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2)
금생과 내생에 복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만큼은 약속있는 계명입니다. 보너스가 두둑한 계명이란 얘기입니다. 땅에서 잘되고 내생에서 잘되는 계명이 바로 제5계명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큰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과 요셉과 셈과 야벳과 다윗과 솔로몬 모든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님 앞에 효자였고 이 땅에서 효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효자요 내 부모님께 효자 즉 효자 성도로 살아갑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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