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4:12,13,롬5:3,4,마5:10-12,행5:41,고후12:10,골1:24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 네 번째 주일을 맞으면서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중심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도 싫어하고 죽음도 싫어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현세주의에 빠진 오늘 우리의 세대는 고난도 불편도 수고도 희생도 모두 싫어합니다. 사실 은혜 받기 전에는 수제자 베드로도 고난과 죽음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16장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말씀했을 때 베드로는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마땅히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을 강조해서 말씀했고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와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1-24).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23). 그러면 이제부터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은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을 싫어하던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은혜 받은 다음에는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저는 1988년 4월 극심한 가뭄으로 모두가 죽어가는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를 방문하고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폈는데 그때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현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롬5:3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이후부터 롬5:3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기뻐하라는 말씀을 제일 먼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하며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갔었지만 나중에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과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 바울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능욕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면서 고난을 예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제가 가장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도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고난을 귀중히 여기면서 고난을 예찬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986년 4월 22일 합동신학교 학생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수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사람과 기도의 사람과 고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죽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은 저주다 고생은 싫다 고생은 꿈에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과 고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조되고 새로워지고 눈의 밝음을 얻으며 귀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관은 세상 사람의 고난관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고 다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사실 평생토록 고생과 수고로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환경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박 목사님 스스로 고생과 고난과 수고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삼으신 이동휘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고 "별세"의 삶을 주창하셨던 이중표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거의 모두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을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성경은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참예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참예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소유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소유에 관심이 많지만 이타적인 사람은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평안과 기쁨과 치유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서 고통을 당할 때 자식의 아픔과 고통에 참예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지성이 아빠는 지성이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지성이에게 주는 아픔과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 값으로 당해야만 하는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면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지옥의 고통과 저주에 참예하셨고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니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께서 아직도 당하셔야만 하는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예할 수가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고난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고난에 참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기쁨이고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고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기쁨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천국에서 받을 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은 고난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고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고난이 우리 자신을 시련하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순수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고난은 우리를 시련하고 우리를 단련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난과 환난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저의 아들 철원이는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순수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예수님과 천국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주님과 천국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강변교회 초기의 조축국씨는 그가 당한 척추암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죄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전도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찬송을 부르며 담임 목사의 기도를 받은 후 고요히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 중 고난과 고통 없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둥병 중풍병 소경 등의 고난을 통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죄인들로 하여금 두 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또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고 겸손하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안흥규 장로님이 몸에 고난과 고통을 지니므로 인격이 성숙하게 되었고 주님과 교회를 겸손하고 충성스럽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몸을 찌르는 육체의 가시를 몸에 가지므로 더욱 더 겸손하게 되었고 더욱 더 충성스럽게 되었고 더욱 더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아직도 너무 뻣뻣한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둘째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골1:24).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고후1:6).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황인범 군이 캄보디아에서 고난과 수고를 당하는 것은 캄보디아에서 사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성장과 소망의 성장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통 사고로 죽음의 위험도 당합니다. 그런데 황인범 군은 자기가 그곳에서 고난과 환난을 당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설교도 아닙니다. 수고와 고난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방식은 설교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고난과 수고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아펜셀라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의 구원과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 다음 셋째로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후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5-7). 예수님은 주님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고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고난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고난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안일과 평안은 지옥을 준비하게 하고 고난과 수고는 천국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모슬렘 지역에서 사는 지하 교회 성도들에게도 보다 진하게 다가가는 설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도로 이기적이고 극도로 세속화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설교입니다. 성경 말씀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피하는 대신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방편으로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모두가 의인이 되어서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고난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불편과 수고를 싫어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에 가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남을 죽이고 자기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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