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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설교 3,276편 】◑/고난 설교 144편

만왕의 왕 예수

by 【고동엽】 2022. 8. 19.

눅19:28-40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는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습니다. 폭격으로 중요한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사람들이 죽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왔다. 고 했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울부짖음, 병상에서 부모를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 그 처참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 군정을 통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고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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