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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와 헬라에 @

by 【고동엽】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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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와 헬라에               행20:1-6                 2015/09/06 설교스크랩, 출처

 

※행20장 본문의 바울의 행적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제가 잘 몰랐던 부분이었습니다/편.

 

 

 

 

◑에베소를 떠나는 바울

 

지혜는,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앉을 때와 일어설 때

그리고 지킬 때와 떠나갈 때를 바르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일어서야 할 때, 주저 앉고

떠나가야 할 때, 머뭇거리며

지키려는 것보다 더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확실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은 세공장이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촉발되었던 에베소의 소요사태가 일단락되자,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서, 그들의 믿음을 새롭게 북돋아준 뒤에,

그들과 작별하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3년에 걸친 에베소에서의 전도사역을, 깨끗하게 매듭지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을 찾아가든,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사역하지만,

떠날 때가 되면, 주저 없이 떠났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단 한 번도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

머뭇거리거나, 주저앉으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떠나야 할 때는 언제나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빈손으로 떠난 것입니다.

 

바울을 시기하거나 금전적 이득을 위해, 바울을 모함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바울을 존경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에베소를 떠날 때, 그의 나이는 50세 전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서, 자기 생을 마감할 때는, 대략 50대 후반이었습니다.

 

이를 테면,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매듭짓고 에베소를 떠난 것은,

그의 인생 말년의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던 당시의 50대는,

오늘날의 70, 80, 90대의 고령에 해당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인생 말년에,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에베소를 떠난 것이,

그의 인생에서 사람에 대한 섬김을 종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돌아보건데, 한 지역에서 떠남은, 사람 섬김의 종결이 아니라, 언제나 또 다른 곳의 사람을 섬기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뜻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서 죽을 때까지

공간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사람을 섬기는 그의 삶 자체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인생 어느 시점에서, 사람을 섬기던 삶을 종결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섬김을 요구하기 시작했더라면,

바울은 2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추앙받는

사도바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적용

 

▲10년 전만 해도, 한국교회는

나이 많은 노인들을 위해서 경로대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65세 이상 교인들의 모임을 경로대학이라 부르면서,

문자 그대로 경로, 즉 노인 공경에 치중하였습니다.

 

교회가 각종 프로그램으로, 노인들을 지성으로 모시고 즐겁게 해 드리면,

참여한 일부 노인들은, 그 섬김을 당연하게 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나이많은 교인들의 인생이

그야말로 노인으로 끝나 버리게끔 방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이 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유교의 산물일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십자가의 도와 성경의 정신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1년 반 만인, 2007년 초에

연세드신 교우님들을 위하여 <시니어 스쿨>을 신설했습니다.

 

경로대학과 시니어 스쿨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경로대학의 로老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월만 지나면 저절로 노인이 되어 섬김을 받는 the old를 뜻한다면,

시니어 Senior는 “웃어른”을 의미합니다.

 

노인과 어른의 분기점은, ‘섬김’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노인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긴다면

그 사람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큰 어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시니어 스쿨을 신설하면서,

시니어 스쿨의 목표를 ‘섬기는 시니어/로 설정하고,

2007년 2월 주보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게제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에서 섬기는 자가 되기 원하는 시니어들을 위한 시니어 스쿨이

3월 첫째주부터 매주 목요일에 개설됩니다.

65세 이상 되는 시니어들은 누구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노인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섬기는 시니어,

즉 어른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감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막10:43~45절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러,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겨 주셨기에,

오늘도 우리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서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단지 공자의 제자일 뿐,

사람을 섬기러 이 땅에 오셨던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100주년 기념교회 교회학교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가

나이 들어서도 섬기는 시니어로, 자신의 일생을 마감한다면

그 얼마나 감동적인 인생이겠습니까.

 

섬기는 시니어는, 절로 되지 않습니다.

젊어서부터,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지금 당장 섬김의 삶을 실행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내일도 계속 사람을 섬기는, 시니어, 즉 어른으로 자기 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청년 시절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부터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

일평생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수형을 당해 죽는 순간까지, 참된 어른, 섬기는 시니어로 살았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재벌그룹의 창업주가, 현직에 집착하는 노인이 아니라

오래 전 현직을 떠나, 어떤 형태로든 사람을 섬기는 시니어로 살아왔다면

그 분은 지금,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뭇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사노라면, 하던 일을 종결할 때도 있고, 현직에서 은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람 섬김에는, 은퇴도, 종결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람 섬김은, 자신의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됩니다.

사지가 움직이는 한, 아니 사지가 움직이지 않아도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시니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주님안에서 이 시대를 위한 사도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섬기러,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을, 당신의 손과 발로 사용하시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바울의 섬김

 

▲본문 행20:1절을 함께 읽으십시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에베소를 떠난 바울이, 그 다음 사람 섬김의 행선지로 삼은 곳은 마게도냐 였습니다.

 

고후2:12~13절에 의하면, 이때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먼저 드로아로 갔습니다.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드로아는 마게도냐로 향하는 배를 타는 항구인 동시에

바울이 그의 동역자 디도를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기 전, 자신이 2차전도여행 중에 세웠던 고린도교회에

거짓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눈물로 편지를 써서, 내용이 전해지지 않은 그 편지를,

디도 편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디도와 드로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드로아에 당도했지만,

디도는 그때까지 고린도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화와 정기교통편이 없던 시절인지라,

디도가 언제 고린도에서 드로아에 도착할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되돌아오는 디도를,

마게도냐의 어디에선가 조우하기를 바라면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홀로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2차전도여행 때와 똑같은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2차전도여행 중에 처음으로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를 찾아갈 때에도,

드로아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약 6년이 지나 바울은 3차전도여행 중 본문에서,

2차전도여행 때와 동일한 여정으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심정은, 처음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바울이 2차전도여행 중 마게도냐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로 인함이 아니었습니다.

 

행16장에서 확인했듯이, 2차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본래 오늘날 터키 대륙의 서부지역인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했지만,

웬일인지 성령님께서 가로막으셨습니다.

 

바울 일행은, 북쪽 무시아로 올라가서, 동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진출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성령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무시아의 서쪽에 위치한 드로아로 내려갔고,

그날 밤 바울은 도움을 요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마게도냐로 향한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드로아에서 새로 합류한 누가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만약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아시아 대륙 출신인 바울은

언감생심 유럽 대륙까지 진출할 생각은 상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3명의 동역자들이 곁에 있다 해도,

처음으로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를 향해 에게 해를 건너는 바울의 심정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느라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탐험가의 심정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3차전도여행 중, 본문에서 다시 마게도냐를 찾아 에게 해를 건너는 바울의 심정이,

처음과 동일할 수는 없었습니다.

 

6년 전 2차전도여행 때, 처음으로 마게도냐를 방문했던 바울에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귀신 들린 불쌍한 여인을, 귀신의 손아귀에서 구해준 탓에,

바울은 억울하게도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두 발이 차꼬에 채워지는 곤욕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행16장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의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해치려 해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영접한 믿음의 형제들이 한 밤 중에,

바울 일생을 베뢰아로 피신시켰습니다. *행17장

 

그러나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원정을 와서, 바울을 해치려 했기에, 바울은 바닷가로 나가서,

아테네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어야 했고,

비로소 마게도냐 지역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난생 처음 찾아간 마게도냐는,

바울에게 온갖 위험과 시련과 악조건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게도냐를, 본문에서 6년만에 다시 찾아가는 바울의 심정은,

기대와 희망으로 설래었을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 다시 말해 자신이 사랑하고 섬겨야 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6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기대와 희망이었습니다.

 

▲1.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제자들을 격려함

 

본문 2절은, 마게도냐를 다시 찾은 바울의 활동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행20: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차례로 순방하면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믿음을 새롭게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상황이 처음 방문 때보다 나아졌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후7:5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후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바울이 6년 만에 마게도냐를 다시 찾았을 때도,

그곳은 여전히 환란과 두려움의 땅이었습니다.

바울을 해치려고 하는 무리의 도전이, 마게도냐 도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도전도,

주님 안에서 사람을 섬기려는 바울의 사랑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지속적인 마게도냐의 악조건과 환란 속에서도

계속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2. 디도와 재회하고,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냄

그리고 고린도후서 7:6절에 의하면, 바울은 그가 바랐던 대로,

고린도에서 되돌아오는 디도와 마게도냐에서 재회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디도로부터,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후서로 알려진 편지를 다시 써서, 고린도로 보내었습니다.

 

바울의 몸은, 마게도냐에 있었지만, 그의 사랑과 섬김은, 공간을 초월해서

발칸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아가야 땅 고린도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3. 고린도에 가서 로마서를 써서, 로마로 보냄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a 거기 석 달동안 있다가

 

바울은 드디어 마게도냐를 떠나 헬라에도 이르렀습니다.

헬라는 아가야 땅 고린도를 일컫습니다.

 

마게도냐에서 고린도의 형제, 자매들에게 고린도후서를 써 보낸 것도 모자라,

바울이 고린도까지 다시 직접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 달동안 있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바울이 고린도에 석달 동안 있다가’ 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린도에서는 그냥 그곳에 있기만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있다가’의 헬라어 동사 ‘포이에오’는

우리말 성경의 표현처럼 ‘있다 to be’가 아니라, ‘행하다 to do’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도,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북돋아주면서,

그들을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의 섬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롬16:23절은,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로마서도

이때 고린도에서 기록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6: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재무장관 에라스도는 로마역사 기록에 의하면, 고린도의 재무장관이었음.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다는 증거가 됨

 

우리는 행19;21절을 통해, 바울이 자신의 인생 모자이크 판 위에서

자기 생의 최고를 던져야 할 곳이, 제국의 수도 로마임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미래에 직접 섬기게 될 그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도,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에도 바울을 박해하는 유대교도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 타락의 도시 고린도에서, 복음의 진수이자 정수인 로마서가 기록되었습니다. *정수精髓 : 뼈 속에 있는 골수

 

고린도의 극심한 성적 타락도,

그곳에서의 유대교인들의 박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섬기는 바울의 사랑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치는 말

이처럼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서 오신 주님을 본 받아

사람을 섬기는 청년이었고, 사람을 섬기는 중년으로 살았으며

사람을 섬기는 시니어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그 바울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신 것은

사필귀정이었습니다. *事必歸正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감

 

세월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어제의 어린이가 오늘의 청년이 되고

오늘의 중년이, 내일의 시니어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변화와는 상관없이

주님께서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사람과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신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겨주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교회학교 어린이부터, 시니어 스쿨의 시니어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 우리의 코 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사람을 사랑하는 어린이, 사람을 존중하는 청소년,

사람을 위하는 청년, 사람을 받드는 중년, 사람을 섬기는 시니어로 살아가십시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어른이 되어갈 것이요,

우리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로 인해 이 세상 사람들은 더 행복해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도전도, 심지어는 세월의 흐름도

주님을 힘입어, 사람을 섬기려는 우리의 사랑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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