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57-58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부활절은 아주 의미 있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중요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①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된 일이요(14절 상), 우리의 믿음도 헛된 일이 됩니다.(14절 하) ②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다 망하였을 것입니다.(17-18절) ③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19절) 그래서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천사장의 소리와 주의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환상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들이 추종하는 교주의 무덤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마호멧, 공자, 등 모두가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속에는 그들의 유골이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있었지만 빈 무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요 11:25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매년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을 연례적인 행사로 맞이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연중행사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결코 부활절의 신앙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활절의 신앙은 1년에 한번씩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부활절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숨쉬는 매 순간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려면 결심과 생각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은 어떤 특징을 부활신앙을 가진 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 혹은 [소망장]이라고 합니다. 봉독해 드린 57-58절의 말씀은 결론적인 부분으로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부활신앙을 갖고 살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사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주님의 부활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①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부활 당시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의 부활도 예수님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영혼의 불멸은 믿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죽은 후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을 통해 다시 죄악의 근원인 육체(肉體)에 감금된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줄 필요를 느껴 15장 전체를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지금도 과학에 물든 사람들은 비합리적이라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 프랭크 모리슨은 '예수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조작한 사기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데오도르 카일]은 “예수의 시체는 썩었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는 환상이었다.”라고 강변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귀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경대로 분명히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고 해서 주님의 부활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조작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없애기 위해서 적극적인 공작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이 없는 신앙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헛된 것입니다. 사탄은 학자들을 통해 시체 도적설, 기절설, 신비설(신화설), 허위설, 무덤 오인설, 환상설(전파설) 등에 주장하게 하였습니다.
① 시체 도적설이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비밀한 곳에 감춘 후 예수의 부활을 공포했다는 설입니다.
② 기절설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기절했을 뿐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③ 신비설 혹은 신화설이란 부활에 관한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서 유래된 것을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설입니다.
④ 허위설이란 제자들이 그렇게도 강하게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것을 보고 제자들은 크게 실망하여 로마 군병들을 돈으로 매수한 후 예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는 예루살렘 성 안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설입니다.
⑤ 무덤 오인설이란 2-3명의 여인들이 향유를 준비하여 예수의 시체에 발라줌으로써 마지막 이별에 참석하려고 무덤을 찾아갔으나 그들이 매우 흥분한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새벽 미명에 갔으므로 예수의 시체가 있는 무덤이 아니라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는 설입니다.
⑥ 환상설 혹은 전파설이란 제자들이 심히 피곤해 있었고 예수님이 죽을 분이 아니라는 강한 믿음 때문에 그들이 예수의 환상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전파했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사탄의 장난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학설들을 전개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 나사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 두 제자와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요20:11-17), 베드로와 요한에게(눅24:34),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눅24:36-49),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눅24:36-49), 도마에게와 다른 제자에게(요20:26-29),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요21:1-24), 야고보에게(고전 15:7), 모든 사도에게(고전 15:7), 승천하실 때 5백여 문도에게(행1:6-9), 사도 바울에게(행9:5)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 땅에 40일을 계시며 10여 차례 나타나 보이셨고 그 후 500여명 교인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셔서 올라가셨습니다(행 1:3).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굳건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승리하게 합니다.
본문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에게는 사망이 결코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사망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금 부활하되 의인의 모습으로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실패자라고 저주했습니다. 인생의 낙오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 역시도 3년을 허송세월한 실패한 실업자들처럼 보였습니다. 두 손 두발에 못이 박힐 때 한 괴짜 인생을 살았던 처절한 주검처럼 보였습니다. 죽어서는 묻힐 무덤도 없는 가난뱅이 집시처럼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당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이고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로마 군인들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처절한 패배가 승리가 된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보고할 만큼 주님의 부활이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마 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승리가 아름다운 가족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반대자들에 대한 승리요,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승리요, 불의의 세력에 대한 승리요, 죄에 대한 승리요, 죽음에 대한 승리요,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소망과 용기를 주고,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역사가 [크라우스너]는 말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미쳐서 사자굴 속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까? 아프리카 정글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외친 사람들은 사기를 당한 것입니까? 서슬이 시퍼런 로마의 통치권 속에서 부활이란 날조된 허위 사실을 위해 외치려다 죽었단 말입니까? 어떻게 거짓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고, "예수가 살아나신 사건은 모두가 사실이기에 저렇게도 힘이 있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요 5:29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끝인 양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주 짧은 삶만을 사는 겁니다. 더 긴 아니 영원한 삶이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부활 신앙 위에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확고히 갖추고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베드로의 실망과 공포는 담대한 용기로 바뀌어 십자가를 거꾸로 지는 순교자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찼던 의심 많은 도마는 주님을 만난 후 인도로 가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박해의 주동자였던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하여 유럽을 복음화 시키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습니다.
3,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행 6:15 이후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부활의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바치라는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① 사망권세를 깨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망입니다. 우리가 질병을 무서워하는 것도 결국은 죽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권능은 죽음을 깨뜨리는 무서운 능력이 있습니다. ② 환난과 시련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③ 죄의 세력을 깨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④ 마귀의 나라를 깨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시는 능력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요,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이세상의 소망처럼 일시적인 소망이 아니요, 영원한 소망이며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낙원?의 저자 ?밀턴?이“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절을 맞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들은 어떠합니까? 일사각오를 가지고 살았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처럼 살고 있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님과 성도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한국의 주기철 목사님과 안이숙 여사처럼 살고 있습니까? 이들이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 당당했을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진들이 살았던 것처럼 일사각오의 모습으로 살지는 못할지라도 현실의 크고 작은 일로 인하여 현실과 타협하거나 그 앞에 주저앉는 일이 있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너무 쉽게 타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절의 신앙은 있으되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부활절 이 아침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부활신앙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권능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위에 용솟음치듯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주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있게 합니다.
고전 15:20과 51절, 52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변화하여 부활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정말 감사합니까?
그렇습니다. ① 우리 주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고 우리들 또한 육체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됩니다(고전 15:42).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② 영광의 몸으로 변화됩니다.(43절) 여기의 "영광스러운"이란 말은 '장차 축복받는 상태에서의 영광'(고후4:17, 딤후2:10), '눈부신 광채'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은 참 초라하지만 부활시 우리의 몸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변화됩니다. 요한계시록에 우리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옷은 흰옷을 입었는데 몸이 찬란하게 빛이 나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썼습니다.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③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44절) 여기의 "신령한"이란 말은 '영적인 성결을 가진', '초자연적', '중생한'의 뜻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가장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④ 강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병들지 않는 몸, 사고 나지 않는 몸, 슬픔과 고통이 없는 몸, 강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⑤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됩니다.(고전15:47-49)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살 수 있는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⑥ 변화 받을 몸으로 변화됩니다(고전 15:51-52). 우리가 부활해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세계이기에 비밀이고 신비입니다.
⑦ 영생의 몸으로 변화됩니다.(54절) 우리 몸은 한번씩 다 죽습니다. 그러나 몸은 영원히 사는 영생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살전 4:16-17). 그러므로 우리 모두 소망을 가지고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앞을 향하여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①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롬 12:2) 우리 마음속에 변화가 되면 늘 기쁩니다. 그저 늘 좋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가 되면 사람과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과 먼저 이야기합니다.
② 우리의 말이 변해야 합니다.(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해야 합니다.
③ 우리의 손이 변해야 합니다.(딤전 28)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손, 축복하는 손, 봉사하는 손, 고아와 과부를 돕는 손,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④ 우리의 귀가 변해야 합니다.(사 50:5, 욥 3:10)) 세상의 소리를 듣는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로 변해야 합니다. 마귀의 음성을 듣는 귀는 시험에 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결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⑤ 우리의 행위가 변해야 합니다.(잠 167, 렘 7:3) 부활신앙을 성도는 옳은 행위, 온전한 행위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어항 안에서 금붕어가 노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기 안에서 생활을 하듯이,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2. 그러면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57절)
본문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려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51절-53절에서 “성도들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죽지 아니함으로 입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도 괴롭힌 죄 문제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롬 6:23 하반 절에서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철머 우리는 영생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망의 문제만큼 인간을 많이 괴롭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군왕들이 오래 살고 사망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재물과 그들의 권력을 총동원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문제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해결하시고 부활로 이를 확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으냐?"라고 말씀하면서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의 세력을 무효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본문 57절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당신의 교육적인 배경이나 학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학교 졸업장이나 교회 예배에 매주일 참석하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 여러분의 것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소유한 승리를 계속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가든지 승리하게 하십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가진 승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속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어려운 문제로 인하여 낙망하고 불평, 불만만 품고 산다면 그 사람은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가 아닙니다. 물론 현실의 문제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아니함으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측면에서 요일 5:4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58 상)
본문 57절 상반 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려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승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는 이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도답게 어떠한 일에도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선한 싸움(善戰)?이란 것도, 참말이라는 것도 절반쯤 거짓이고, 절반은 다 거짓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성도는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을 사는 자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벌써 그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1:12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57:7에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 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108:1,112:7) 마음이 확정되지 못하는 원인은 미련한 데 있습니다. 미련하여 일정한 목표를 잡지 못하였으니 만큼 안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 17:24에서 말하기를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엣 것을 바라보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여러분 중에 허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만 만족합니다.”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 제일주의, 하나님 제일주의로 마음을 확정한 성도는 어떤 경우에서도 마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D.L. 무디는 예수만 원하는 신앙 심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① 전엔 축복받는 것이 내 소원이었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 내 소원이며 ② 전엔 내가 감정 중심이었더니 지금은 그의 말씀중심이며 ③전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였더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원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생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도라면 어떠한 경우에서도 마음을 견고하게 하며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한 번 마음을 정한 뒤에는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신앙을 성도라고 마땅히 견고하며 흔들리며 않아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자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58절 하)
본문 58절 중반 절에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 6:10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날에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마지막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몸으로도 주의 일을 힘쓰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현재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 육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주님이요, 주인이며 왕이시라면 그리고 우리들이 앞으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하여 신령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에 그의 육체로 계실 때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배워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목수의 일을 도우면서 자라고 강건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 속에서 자제하는 것을 배웠다. 예수님은 휴식을 취해아만 했고 잠을 가야만 했지만 여러 날 밤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어야 하고, 마셔야 했지만 그는 이런 식욕에 의해 주장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제와 단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부활 생명을 소유하고 살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시기 전에 사셨던 것처럼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확신을 믿고 사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부활신앙을 소유했다고 하면서 아직도 옛 사람에 속한 사람의 모습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다시금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다시 분발함을 얻으며 우리의 눈이 더욱 밝아져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새로운 깨우침과 다시금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만남으로 다시금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사명의 자리, 능력의 자리, 영광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히 거할 처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요, 여행객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저 천국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다시 부활하는 그 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사람과 죽음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여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전진 또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소유한 성도답게 살되 온전히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살기를 바랍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은 성경대로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일가친지들에게 전도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여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두 생명의 부활을 선물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