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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기뻐하는 삶/눅 15:20-32

by 【고동엽】 2022. 8. 13.

아버지가 기뻐하는 삶

2002-05-14 16:45:03 read : 1395

 

15:20-32 // 2002-05-14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이 세상에서 가정의 성공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먼저 직접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사실 다른 성공은 거의 의미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적인 가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부모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자녀의 순종'도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왜 순종해야 합니까? 자세한 이유는 없이 그냥 "이것이 옳으니라"고 합니다(6:1).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이 옳은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실천합니까?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명령(요구)에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 가정이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사회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리더십의 공백은 가장 큰 문제이기에 부모는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인내, 사려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고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만약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가정도 힘들지만 사회도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순종을 모르는 자녀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점점 자녀들은 강해지고 있고, 부모들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느 날 6살 된 그분의 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하는데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얘야! 이제 자라!"고 하는데 아이는 엄마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주기보다 살살 달랩니다. "이제 자야지! 엄마도 쉬어야지."

그렇게 인간적으로 호소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저 잠이 안 와요. 잠자기 싫어요."

그러면 세 번째로 뇌물을 먹여 달랩니다. "지금 자면 내일 아이스크림 사줄게."

그래도 이 아이는 또 말을 듣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하고요. 이제 곧 끝나요."

 

이제 엄마는 점점 화가 납니다. "이제 마지막 말이야!" 그래도 듣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아이가 엄마와 무의식적으로 하는 권력다툼'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이가 지금 도박을 하는 것처럼 엄마와 아슬아슬한 권력다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엄마는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또 합니다. "정말 마지막이야!"

조금 전에 마지막이라고 하고 또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권위는 점점 후퇴합니다.

 

그래도 안 들으니까 이제는 불필요한 질문까지 합니다. "너 왜 말을 안 듣니?"

이 질문은 아이들로부터 합리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이의 파워가 보통 이상으로 커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합리적인 설득을 시도합니다. "지금 안 자면 내일 힘들어!"

 

그래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 부드럽게 위협합니다. "정말 매를 들어야 하겠니?"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이제는 위협을 강화시킵니다. "아무래도 매를 가져와야겠다."

그때서야 아이는 협상을 제의합니다. "알았어요. 이 게임만 끝내고 잠자러 갈게요."

그러면 엄마도 피곤하고 힘드니까 말합니다. "정말 이번만 하고 끝내야 해!" "."

그러자 엄마도 더 씨름하기 싫으니까 아이가 제시한 협상안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장면에서 여러 가지 잘못이 연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 시대에서 이 엄마의 모습은 이해가 됩니다. 더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계속되면 그 집안은 권위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많아지면 가정도 힘들어지고, 사회도 힘들어지고, 본인도 힘들어집니다.

사실 기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일차적인 기관은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 가정에서 순종을 잘 배워야 그 자녀가 사회에서도 쓰임 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에게 무엇보다 가르쳐야 할 것은 기쁘게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부모가 언제 가장 기뻐합니까? 자녀가 기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 아버지가 기뻐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

 

우리가 하나님과 부모님의 기쁨이 되려면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버지가 기뻐하는 삶 3가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할까요?

 

1. 아버지께 향하는 삶

 

오늘 본문을 보면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다른 어떤 행동보다 이 행동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분은 원수만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 삶이 진짜 '원수 같은 삶!'이 됩니다.

머리 속에서 계속 원수만 생각하고, 원한만 생각하면 어찌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마음의 평안을 원하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우리의 문제들은 아주 적게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머리에 큰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갔습니다.

울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몇 바늘 꿰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수술 바늘을 보니까 바늘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습니다.

그 바늘로 자기 머리를 꿰맨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기절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 몸부림치는데 바로 그때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공포에 젖어 당황하는 눈빛은 아니었습니다.

그 부모님의 눈빛을 대하자 갑자기 어린 마음에도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의사선생님의 바늘도 조금 전만큼 크게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바늘이 있습니까?

그 바늘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바늘을 바라보면 바늘은 점점 커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바늘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고, 행복과 보람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출신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 출신 목수였던 예수님을 따르며 그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진짜 행복을 발견하고 다시는 세상을 향해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오지 않고 영원한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이 겉으로는 잘 사는 것 같지만 속은 공허함을 더 느낍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관심이 크고, 하나님 사랑에는 관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지나쳐서 하나님 사랑을 너무 무시하면 안됩니다.

실용주의는 필요한 것이지만, 실용주의 때문에 감정적 사랑이 다 질식되면 안됩니다.

 

감정적 사랑에만 치우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감정적 사랑이 비실용적이라고 해서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로마에 가면 전체가 거대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바티칸 성당이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당시 사람들이 그 성당을 지으려고 쓴 돈과 노력에 비해

그 건물의 실용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꼭 저렇게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 하나?"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때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사람들보다 하나님 사랑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화려한 건물! 그것을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정말 큰 낭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표시로 한 사랑의 낭비라면 얘기는 아주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3백 데나리온(2천 만원 가량)의 향유를 주님께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꼭 그런 식으로 돈을 낭비하며 사랑을 표현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매우 정의감이 넘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이 없는 정의로운 말은 대개 이기주의와 위선의 산물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다 가룟 유다가 나쁘다고 하지, 마리아가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행위는 주님을 사랑해서 나온 '사랑의 낭비'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교회 건축을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거의 질식되고

보이는 사람에 대한 사랑만 너무 강조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대한 사랑은 인간의 계산을 초월해야 성립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신앙인들의 가장 큰 과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의 회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모습을 보실 때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2.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삶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쁘게 잔치를 벌였지만

그때 밭에 있다가 돌아온 맏아들은 그 잔치를 보고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왜 창기와 지내며 재산을 다 날린 저런 자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느냐?"고 합니다.

이 맏아들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은 아버지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모님께 효도하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형제들끼리 잘 지내야 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면 형제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용서처럼 중요한 것은 없고, 또한 용서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예배는 잘 드리지만 미운 사람 용서하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고 용서는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이 예배 후에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입니까? 예배로 미움이 없어져야지 미움이 생기면 됩니까?

교회는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오는 것인데 교회에서 누구를 미워하면 됩니까?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 관계와 인간관계를 분리해서 사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 더욱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천천히 자살을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와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영혼도 살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어느 주일에 목사님이 용서를 설교하는데, 설교 후에 한 성도가 찾아왔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분노가 생기고, 곧 예외 없이 배가 아픈 것을 알고,

자기도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를 당신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나서 저를 용서해보세요.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의 아버지보다는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했고, 그 뒤로부터 자신의 만성 위경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실 좋은 사람은 그냥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그냥 싫어하면 속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미운 놈 미워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속이 다 후련해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그 미움이 내 영혼을 압박하고 건강을 해칩니다.

역시 우리가 사는 길은 미운 사람,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보다 내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모습보다 우리가 용서하는 모습을 가장 보기 원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용서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용서가 잘 안된다"고 하소연합니다.

그처럼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용서하면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실상 용서만큼 세상을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나를 바꾸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3.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

 

본문 29절을 보면 맏아들은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 명령을 들었는데

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합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기쁘게 순종하기보다는 마지못해서 말을 들었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육신의 부모에게 기쁘게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순종할 때 머리와 마음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돌리고, 생각을 돌리고, 그리고 행동도 돌리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이번에 아이들과 미국에 갈 때 비용 절약을 위해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아이들은 서로 창가 쪽 좌석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 은혜가 창가 쪽에 앉았는데 또 앉으려고 해서 제가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은혜야! 한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그러자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양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이 자라지 않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공평무사하게 잘 이해해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항상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자녀들은 말합니다. "부모님과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순종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나 명백한 잘못이 아니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상 순종은 순종하기 가장 어려운 때 기쁘게 순종해야 진짜 순종일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에도 기쁨으로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헌신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삶에서 '흥미를 가지는 삶''참여하는 삶''헌신하는 삶'은 매우 차이가 큽니다.

실제로 사람이 헌신을 알지 못하면 그 인생은 결코 작품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헌신적인 삶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작은 것에 순종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제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이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그 말을 믿습니까?

진짜 믿을 분은 지금 하는 작은 일에 기쁘게 순종하고 묵묵히 충성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순종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부모의 약점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고,

부모님이 세운 룰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말대꾸도 없어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부모님을 최대한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을 욕하고 부모님의 명예를 밟는 모습은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우리의 삶의 근거이고, 우리가 가진 생각과 달라서 그렇지,

그 당시에는 아마 부모님이 아는 최상의 방법으로 키우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기 뜻에 맞추어주고, 자기를 더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주면 좋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권위를 거역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해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어가 요구하는 투의 언어가 아니라 존경심이 배여 있는 언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얼굴 표정에서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아니라 존경하는 표정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알려면 교도소를 가보면 안다고 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분들의 언행에는 대개 순종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정말 사랑하시면 순종하는 마음, 존경을 아는 마음을 길러주시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2-3절에는 이런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효도를 고리타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모님께 효도하면 반드시 복 받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효도하지 않고 절대 잘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육신의 부모가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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