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을 이기는 성도
2002-05-21 10:34:31 read : 1632
벧전 4:12-19 // 2002-05-21
< 인생의 가시는 꼭 필요합니다 >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밤은 무익한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째 날이니라."
하루의 시작을 밤부터 말하는 것을 보면 밤의 유익과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전체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밤은 결코 무익한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믿는다고 인생이 평탄하고, 믿음 좋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위대한 성인(聖人)들에게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한계를 자각하게 하고, 새롭게 도약하게 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겸손하게 되고, 기도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 인생의 유익을 얻고 신앙도 자라야 합니다.
고난받는 것도 속이 상한데, 고난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어려움이 있어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이 뒷짐에 숨긴 선물을 얻어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인생의 가시를 주십니까? 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려고 하면 가시가 찌릅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았기에 가시가 자기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어떻습니까? 조금만 성취해도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신비한 체험을 하고도 14년간 그 체험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하면 어느새 그 가시가 자기를 쿡쿡 찔렀기 때문입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사도 바울은 더 주님처럼 변해갔습니다.
어떤 분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가시밭에 핀 백합화라고 비유합니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립니다.
그러나 찔릴수록 아름다운 향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찔릴수록 예수님 믿는 향기가 나와 주변에 퍼질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
고난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참여할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본문 13절 말씀은 우리가 참여해야 할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왜 고난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문제로 고민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몸으로 같이 느끼셨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예수님의 희생적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도 그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놀라운 역사는 대개 주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함께 만나는 곳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어려움에 참여하는 것!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백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위해 일하다가, 혹은 교회생활로 어려움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통해 나도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참여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반드시 어려운 고난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헌신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헌신해야 작품이 나오고, 좋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교회생활에서도 헌신해야 교회생활을 하는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일에 한번 설교 듣는 것 가지고는 교회생활의 기쁨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이 나와야 합니다.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권투에서 선수들이 탐색전 할 때 손으로 툭툭 치면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저런 주먹은 아무리 날려도 소용없지요."
왜 소용없습니까? 그 주먹에 몸 전체 체중을 싣지 않고 툭툭 날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몸 전체를 실어야 합니다. 힘든 일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생활의 기쁨을 알게 되고, 결국 그 삶이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결국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이 오면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은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시험을 기쁘게 여깁니까? 시험은 복 받는 기회요, 성숙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어려움이 이길 수 있습니다 >
본문 13절 하반부를 계속 보십시오. 고난의 목적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목적은 결국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목적을 알면 우리는 고난에 져서 낙심하고 좌절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 전 공익광고에서 이런 광고문이 있었습니다.
"한민족에게는 어려움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 중에서도 특별히 성도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영적 유전자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지방에 있을 때 옆집에 몸집이 큰 사나운 수탉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돌아오는데 그 수탉이 암탉을 몇 마리 데리고 놀다가 덤벼들었습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덤비는데 수탉이 그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목사님 생각에 암탉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생각할수록 수탉이 너무 괘씸하고 얄밉더랍니다.
수탉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니 분하고 억울해서 말씀과 기도가 꽉 막혔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른 집에 있는 조그만 잡종견을 데리고 수탉에게 찾아가니까
이 수탉이 수탉 체면도 차리지 않고 암탉보다 먼저 순식간에 도망을 치더랍니다.
개에게는 닭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개가 도망만 안 가면 반드시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도망만 안 가면 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영적 유전자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서 있으면 결코 고난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
시험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한 사람만 교회에 다니면 가끔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도량이 넓던 남편이 생각 이상으로 싫어하고 신앙을 어렵게 만듭니다.
2주 전 등록한 자매는 교회에 나가니까 아빠가 반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그럼 교회에 나가는 시간에 컴퓨터 게임 할까요? 까페에 가서 놀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아내와 딸이 교회를 나가면 99%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언론에 보도된 극히 이상한 몇 개 사례를 떠올리며 신앙을 방해합니다.
저는 인터넷 사역을 하기 때문에 저의 이메일이 많이 노출되어
하루에 100통 정도 이메일을 받는데 그 중 10분의 1 정도는 이상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개인 편지처럼 위장해 속은 것 외에는 제목만 보고 그대로 삭제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채팅이나 게임을 한번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바둑이 2급이었기 때문에 꽤 고수 축에 속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건전한 오락인 바둑조차도 컴퓨터로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그 흔한 고스톱 한번 재미로 해보지 않겠습니까?
지금 컴퓨터는 우리의 남편이나 우리의 아내를 크게 잘못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막아줍니까? 이 사회에 무엇이 그것을 막습니까?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는 못 막아도 그것을 막아주는 거의 유일한 제동장치가 바로 교회인데
그런 교회를 못 나가게 하고, 오히려 핍박을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으로 남편이 교회에 못 가게 짜증을 부리면 이제 앞으로 한번 말해보세요.
"알았어요. (혼자말로) 그럼 나도 내일부터는 심심한데 채팅을 한번 배워볼까?"
그러면 생각이 있는 남편은 깜짝 놀라며 "차라리 교회에 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유혹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교회를 못 나가게 괴롭히고 핍박한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자살골 먹어가면서 사는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핍박도 결국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성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더 잘 믿어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편과 세상이 핍박하는 이유도 믿을 바에야 잘 믿으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로 더욱 잘 믿게 하고, 더 복을 주시려는 선한 목적 때문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경험하게 하지만, 십자가 뒤에는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서는 양을 키울 때 일부러 염소와 함께 키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양이 배부르고 안전하면 눕기를 좋아하니까 운동 부족으로 위에 이상이 생기는데
목자가 일일이 양을 일으켜 운동시킬 수 없기에 염소에게 그 사명을 준 것입니다.
염소는 누워 있는 양만 보면 본능적으로 찌릅니다. 너 그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몸이 건강해지고, 염소도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염소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고난이 바로 염소입니다.
고난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의 고난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밑거름이 된다는 시각을 가지고,
지금의 고난이 나중에 올 영광의 기초라고 생각하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 우리는 더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
여러분! 고속승진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도중하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중간 중간마다 시험을 얼마나 잘 이기느냐 하는 것이 결국 인생 승리의 관건입니다.
성경을 보면 시험 없이 복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해서만 실력이 나타나고, 믿음이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습이 초라해도 좋습니다. 이 시험만 잘 이기면 길은 반드시 열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70세가 넘은 노인이었지만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쳤지만 부르심을 받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일생 바닷가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가야 할 인생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모두 그 삶을 가치 있게 살았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지금 부족해도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면 반드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아는 점쟁이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청평에 놀러갔을 때 찍은 저의 사진을 보더니 그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30세 이상 절대 살지 못할 관상이다. 10년 안에 죽을 상이다."
저는 정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별로 오래 못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죽긴 죽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2년만에 예수님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저주가 물러갔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뒤로부터 점이라면 죽어도 안 믿고 성경의 약속만 믿고 살고 있습니다.
죽을 상이라고 무시 받던 저도 지금은 목회자가 되어 열심히 잘 살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실 수 있고, 앞으로도 더 훌륭하게 바꾸실 것입니다.
< 꿈과 비전을 잃지 마십시오 >
결론적으로 고난은 꼭 어려운 것만은 아니고, 잘만 활용하면 참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잠시 어려움이 찾아와도 절대로 꿈과 비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몇 가지 잃어버린다고 해도 사실상 그 잃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이 얻는다고 해도 그 얻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 한 줌의 재일 뿐입니다. 없어도 실망할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땅을 보며 삽니다. 그래서 현실 때문에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환상과 비전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농장주 아들이 아버지가 죽자 농장을 팔아 사업 구상을 하는데
바로 그때, 한 가까운 친구로부터 광산을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산 사업에 손을 댔지만 돈을 다 투자할 때까지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서 이 사람은 그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아주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을 새로 산 사람이 곧 바로 한 치를 더 파니까 노다지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이런 일을 당하면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다 죽으면 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정월 대보름에 가족끼리 윷놀이 하다가
동생은 맨날 '모'만 나오는데 자기는 맨날 '도'만 나온다고 억울해 자살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자살한다면 이 사람은 열 번도 더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고 보험회사의 보험 모집원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 보험 가입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한 치만 더 파면 노다지를 얻는 것처럼, 항상 한 마디를 더 하자고 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사람을 가입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런 꿈을 가지고 한 마디를 더 해서 결국 가장 위대한 보험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이 있어도 굴복하지 마십시오. 한번 더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며 어떤 어려움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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