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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의기는 기도의신호다 (마14:30)

by 【고동엽】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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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의 의기는 기도의신호다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 마디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자다가도, 걸어가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어떤 일들이 돌발할지 모르는 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위기 속에 살면서도 그 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변에 닥쳐오는 돌발적인 사태에는 민감해 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끔찍한 교통 사고의 소식을 듣고 있으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에 강도가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가고 사람까지 죽여도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쉽게 잊어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언제 어느 때 이런 위기가 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회나 국가도 매양 같습니다. 전 세계가 지금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그렇고 정치 현상이 그렇습니다. 선진국이 미개발 국가나 개발 도상 국가를 지원하다고 하지만 자국의 이익이 없으면 그냥 포기하고 맙니다. 세계 정치사는 공산주의와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스러운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자기 이익을 확대해 나가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시련이나 위기가 닥쳐올 때 쉽게 절망합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나는 이제 소망이 없구나’‘나는 실패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육체적으로, 가정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위기를 당하여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는 신호임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이적을 보이시고 내려오셨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9:37-40에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의 가정은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아이의 병을 낫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강구해 보았으나 해결치 못하고 결국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고통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기대는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 마가복음 9:22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위기 속에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믿음은 모든 것을 다 이룰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기가 닥쳐오면 어떻게 헤어날까 하고 고심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위기가 올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 아이의 귀신들린 것을 어떻게 쫓아 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마태복음 14:22 이하에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앞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을 만난 장면이 나옵니다. 풍랑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잔잔한 바다에 풍랑이 일 듯 어느 때 어떤 위기를 당할지 모르는 것이 오늘날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위험에 있을 때,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 죽어갈 때 벌써 주님은 알고 도와주러 오십니다.

마가복음 6:48을 봅시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어려운 위기 속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방콕에 갔을 때 어느 일간지 한 변을 김 일성 선전과 우상화하는데 사용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전쟁 준비와 침략 야욕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 나라는 엄청난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을 위한 그들의 정신 무장은 김 일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줄로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까? 정치가들은 그들대로 이론을 펴지만 오히려 혼란과 불신만 안겨 줍니다. 미군이 있는 한 안전하다고 떠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북한은 군비 경쟁에 온 국력을 다 쏟고 있습니다. 월남전에서 패배한 미군이 철수함으로 우방국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결국 포기하고 만 미국이었습니다.

정치 현실을 탓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죽어가는 제자들을 도와주셨듯이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생존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셨을 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7)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 모두에게 희망과 사랑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사회가, 또한 이 나라가 어떤 위경 속에 있든 간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를 하나의 유령처럼 두려워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의 철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원합니다. 그가 상하심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입니다. 그가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모든 위기의 두려운 공포로부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성큼 풍랑이 치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14:30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바다가 출렁이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사업이 흔들리고 안 되고 쓰러져도 그것을 보고 ‘아, 하나님이 나를 버렸구나. 사업이 안 되고 이렇토록 출렁거리는 것을 보니 나는 이제 절망이구나’라는 생각을 갖지 말고 바람이 출렁거리든지 말든지 여전히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라 하셨을 때 그냥 풍랑을 헤치고 밟고 가다가 바람을 보고 빠졌습니다. 현대는 모두가 빠져 가는 시대입니다. 청소년들은 죄악과 음란에 빠져 들어가고 더욱이 자기가 지금 죄악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윗도 일개 나라의 왕이요 위대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죄악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몰랐습니다. 삼손도 들릴라라는 유혹을 통해서 죄악 가운데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빠져 들어가면서도 베드로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소리질러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했을 때 우리를 구원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친구나 이웃입니까? 물론 그들은 물질적으로 얼마간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까지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할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오늘날 학생들은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공부하지 않고 오히려 탈선해 가고 있습니다. 주부는 가정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남편을 뒤에서 잘 협력해 주는 것임에도 탈선의 길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저희 교회 청년회장이 결혼을 했습니다. 주일 성수하고 신혼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서울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호텔을 예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호텔마다 만원이었습니다. 특급 호텔로부터 3류 호텔까지 신혼 부부 한 쌍이 들어가 쉴 곳이 없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방향을 잃은 사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순간 어떤 위기를 당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위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구원할 자는 친구도, 형제도 아닙니다. 나를 구원할 자는 오직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위기 속에 있는 우리는 ‘성도의 기도의 신호’인 줄 아시고, 이제는 나를 도와줄 자가 없고 구원할 자가 없다는 그런 낙심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친구가 나를 버리고, 부모가 나를 버리고, 형제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를 구원할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 엎드리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베드로는 풍랑에 휩싸여 빠져 가면서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소경 하나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서 소리쳐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룰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제자들은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마태복음 9:28에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예수님이 물으시자 소경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의 믿음은 눈을 뜨게 했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9:1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교회를 통하여 모든 위기로부터 자유를 보장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드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빠져 들어가면서 구원해 달라고 소리치자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습니다.(마 14:31)

베드로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어떤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의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만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그 어떤 풍랑도 잔잔하게 됩니다. 위기가 극복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질병이 치료됩니다. 지금 어디를 보아도 절망할 일이 더 많습니다. 온통 위기뿐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억지로 위기를 불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올 때 낙심하지 맙시다. 성도의 위기는 기도의 신호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숭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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