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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감사 (출 35:4-19)

by 【고동엽】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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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감사  (출 35:4-19)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여러 가지 계명과 율법을 받는 중에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 어떠 어떠한 모양으로 성막을 지을 터인데,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금도 필요하고, 은도 필요하고, 놋 도 필요하고, 실과 천도 필요하고, 나무도 필요하고, 보석도 필요하다고 여러 무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누구든지 성막을 위해서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이 모든 물품을 가져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즐거이 모세의 앞으로 가져온 물품의 목록이 여러분께서 오늘 아침 읽은 그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었습니다. 가령 가슴에 꽂던 핀, 귀고리, 지환, 목걸이, 그 밖에 여러 가지 금품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다 여자들의 몸을 장식하는 것들인데 광야에서는 도무지 다시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귀하게 가지고 나온 것들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친 것입니다. 그 외에 실과 털실과 털과 물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은과 놋과 또한 제사장의 예복을 위해서 필요한 보석과 또한 조각 목과 이런 것들을 다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물품을 자원해서 가져왔을 뿐더러 이들은 역시 자기의 시간과 재주를 하나님께 바쳐서 실을 만들 줄 아는 여인들은 털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천을 짤 줄 아는 여자들은 천을 짜기도 하고, 혹은 금과 은을 가지고 조각을 하며, 천에 수를 놓으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 받은 대로 재주 받은 대로 그 재주를 드려서 성막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옴으로 마지막에는 너무 많아서 더 필요가 없는 까닭으로, 모세가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넉넉하니 그만 두라고 무리들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첫 번으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성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가 가장 귀하에 간직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애굽 사람의 종의 멍에를 메고 말할 수 없이 눌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적과 기사로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광야로 나와서 이제는 자유민이 되게 하시고 자기의 율법을 스스로 따로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성막을 짓게 될 때에 사람들의 마음가운데는 오직 은혜의 감격이 사무쳐서 온 정성을 다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첫 성막은 지성과 감사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 성막뿐이 아닙니다. 그 후에 이 지구 위에 나타난 모든 성막, 모든 성전, 모든 교회, 신령한 하나님의 집은 어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남 성녀의 지극한 정성의 감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말 가운데 지성은 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인다고 하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간단히 말하면 지성감천의 생활입니다. 지극한 정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줄 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입니다. 정성이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정성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는 참된 감격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를 합니다. 기도에도 지성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묵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닙니다. 단순한 자기 반성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금 향로에 향을 가득히 담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리는 광경이 보입니다. 이 향로에 가득히 담은 향은 곧 성도의 기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도가 정성껏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에, 이 땅 위에 큰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어떤 기도가 상달되지 못합니까? 지성이 따르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정성이 없는 입술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기를『하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을 하지도 아니하고, 무리한 일을 하지도 아니하고 음란한 일도 하지 아니하고, 저기에 있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니 감사하다.』고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이 세리는 감히 하나님 제단 앞에 가까이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오! 하나님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 님 말씀이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지성이 같이 할 때에 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지성 없는 기도는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기도할 때에 외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아느니라.』『너희들이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 구할 것을 다 아시는 줄을 너희들이 모르느냐?』한 마디를 드리되 정성을 기울여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언제든지 정성 껏 자기에게 와서 간구 하는 것을 물리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에 잠깐 여행하실 때에 거기 가나안 여자 수로보니게 여자가 자기의 딸이 않는데 예수님께서 큰 권능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자리를 불쌍히 여겨서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처음에는 대답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도 민망해서 제자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선생님 저 여자가 저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냉정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주를 부르면 하는 말이『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돌아가라. 네 딸이 나으리라.』말씀했습니다. 간절한 지성의 연인의 간구를 예수님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떻게 문간에 사람이 많이 섰는지 사람이 도무지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어떤 네 사람이 반신불수 들린 사람을 데리고 먼 곳에서 메고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문이라고는 사람들이 가득 서서 도저히 예수 님 앞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다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람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줄을 매서 네 사람이 그 반신불수를 예수 님 앞에 드리워 내리 우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니 예수 님께서 그 네 사람의 정성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 반신불수를 고쳐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정성껏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 항상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명하신 불의한 법관의 비유를 여러분은 다 기억하시지요. 어떤 곳이 불의 한 법관이 있는데 이 법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성에 어떤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 법관에게 와서 신원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불의한 법관인지라 불쌍한 과부가 청하는 것까지 일일이 뭐 눈떠볼 이치가 있습니까? 본 체 만 체, 들은 체 만 체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하루 가서 안되면 그 이튿날 또 가고, 또 그 다음날 또 가고, 그냥 계속해서 정성껏 이 불의 한 법관에게 간청했습니다. 마침내 이 불의 한 법관이 하는 말이『내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지마는 이 여자가 자기를 괴롭게 구니 이거야 견딜 수 있나?』하며 아무래도 그 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원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긴한 뜻은 이 여자의 그 간절한 정성이 마지막에는 불의 한 법과까지도 자기의 책임을 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밤낮 귀한 목적을 위해서 간구 할 때에 이 정성을 하나님께서 몰라 볼 이치가 잇느냐?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十년, 二十년, 자기의 아들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정성에 정성을 기울여서 기도한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와 같은 이런 정성이 필요합니다. 내 나라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진대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존 녹스 같은 사람의 정성어린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우리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三八선이 열리기 위해서, 북한의 동포를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기도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할뿐더러 또 헌금도 합니다. 헌금은 물론 교회의 경상비로도 쓰고,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업비로도 쓰고, 교역자의 봉급도 주고, 여러 사무 직원의 봉급도 주는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전에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분규 난 교회의 어떤 직분 맡은이가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교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나가지 않고 그냥 있어서 이젠 부득이 경제전(經濟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즉 연보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북에 있을 때에 들은 말이지만 이북의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갈 때에 한편 주머니에는 돈 일 원 짜리를 넣고-그 때 일 원 짜리면 지금 천 환 가치는 있습니다-한 편 주머니에는 돈 십 전 짜리를 넣고 갔다가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를 잘 하면 일 원 짜리를 넣고 설교를 잘못하면 이건 십 전 짜리 밖에 못되니 십 전 짜리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금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 자체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시간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드리는 그 정신으로 그 상징으로서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정성이 따르지 아니하면 헌금의 의의를 잊어버립니다.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고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지 아니하느냐? 같은 헌금이지마는 그 배후에 정성이 따를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됩니다. 그러기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칠 때에, 곡식을 바치면 첫 이삭을 바쳤습니다. 처음 거둔 것을 바쳤습니다. 나무의 열매이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자녀이면 맏아들을 바쳤습니다. 짐승의 새끼면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함부로 아무거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흠 없는 순결한 양을 택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정성으로 드립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말라기의 예언서를 보면 그 때에 모든 사람의 믿음이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가져오는 양을 보니까 눈먼 놈, 다리 저는 놈, 여러 가지 병든 놈, 쓸데없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너희들이 이런 것을 세상 관헌에게도 가져가지 아니하거든 이것들을 나에게 가져오느냐?』책망한 것입니다. 헌금에도 정성이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번은 성전에 계실 때에 연보 궤에 서서 여러 사람들이 연보 궤에 연보 하는 것을 자세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연보 할 때에 지금도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연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번 보니까 어떤 가난한 과부가 그 때 돈 동전 두 닢을 연보 궤에 넣고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다른 곳에 있는 제자를 향해 오라고 해서 하시는 말씀이『너 보았느냐? 이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연보를 제일 많이 하나님께 드렸다.』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드렸지마는 이 과부는 자기의 연명할 것,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이 연보에 드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보의 양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연보 가운데 들어 있는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이 정성의 무게가 갑니다. 양이 많고 적은 것은 사람의 가세 형편에 의지해서 다를 것입니다. 요컨대 그 연보 가운데 얼마나 정성이 들었느냐?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이가 있지 않습니까? 마르다가 여러 가지로 와서 일을 보고, 나사로도 청함을 받아서 가 있고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가실 때에 그 때에 마리아는 무엇을 했습니까? 값진 향기로운 기름이 든 옥함을 가져다가 옥함을 깨뜨려서 예수 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발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붓고 머리털로 예수 님의 발을 씻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본 이해타산이 밝은 유다 가 하는 말이 왜 그 여자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고 말하며, 저것을 팔면 三백 데나리온이나 받겠는데 그 것을 가졌으면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는데, 왜 저렇게 귀한 향기로운 기름을 허비하는가 고 원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무어라고 말했습니까?『이 여자를 가만히 두어라. 두렵게 하지 말아라. 이 여자가 내게 착한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사람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다. 이 여자가 내 장사를 이미 준비하였느니라. 이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디단지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말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향유를 받았습니다. 왜? 그 향유 가운데는 마리아의 정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생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정성껏 드리는 것을 귀하게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임금이 자기 이웃 나라의 한 임금이 경사로운 일이 있어서 자기 사위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그래서 사위에게 금과 은도 달아 좋은 말도 택해 주고 좋은 수레도 택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어떻든지 축하를 잘 하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물을 다 받은 사위가 껄껄 웃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눈이 동그래지면서『너 어찌해서 웃느냐? 이 예물이 변변치 않단 말이냐?』그러니까 그 사위가 하는 말이『폐하 황송하옵니다. 제가 예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아서 여기 오는 길에 길가에서 본 것이 생각나서 웃습니다.』『길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길가에 오다가 어느 농사하는 집을 지나 왔는데 그 집 옆에 조그마한 신당이 하나 있어요. 그 신당 앞에서 농부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우상 앞에다 돼지 발족 하나를 갔다 놓고 그 다음에는 술 한잔을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복을 달라고 비는데,「오! 신이여, 그저 금년에 나에게 복을 주어서 금년에는 우리 소는 새끼를 꼭 쌍둥이를 낳게 해 주시고, 또 우리 돼지는 새끼를 낳되 한 배에 열 놈씩 여러 배를 낳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또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의 뒤 곡간도 가득히 차게 해 주시고, 우리 앞 곡간에도 곡식이 가득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돼지 발족 하나 놓고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천하에 처음 보았기에 그럽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릴 때에 예수 님께서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혹 사탄이 보고 웃을 경우는 없습니까? 내 들으니까 아직까지도 연보 할 때에 일 환 짜리 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정성이 필요합니다. 헌금뿐이 아닙니다. 모든 주의 일이 그렇습니다. 교역자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주의 일을 합니다. 권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집사도 주의 일을 합니다. 구역장도 주의 일을 합니다. 성가대원이나 주일학교 반사나 우리 평신도라도 주를 위해서 우리가 심방을 하고, 누구를 도와주고, 우리가 전도를 하고, 무엇이든지 하는 것은 다 주의 일입니다. 이 주의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정성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까? 금년 일년이 거의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을 맡은 여러분,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님 앞에 그 책임을 감당했습니까? 평신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주를 섬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을 향해서 하는 말이『너,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저렇게 정직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내 종 욥을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 여러분을 그 만큼 자랑할 만한 그런 생활을 당신은 했습니까? 모든 일에 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지성의 인물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이 감사 주일을 당해서 지성의 감사를 드립시다. 중심의 감사, 참된 지성의 찬송, 참된 지성의 기도와 예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성껏 감사의 생활을 합시다.                                              


출처/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3권 中에서  (一九五九년 十一월 十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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