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2001-12-07 13:57:22 read : 853
전 4장 7-12절
지난주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원에 가보니까 벌써 수술 중이었습니다.
자정이 조금 넘어서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수술실로 들어가 부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맥없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려고 구내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첩을 폈습니다. 수첩을 펴 보니 전화할 수 있는 친구 명단이
5장에 걸쳐 반듯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9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지 전화다이얼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밤에 "내 아내가 죽었으니 와서 나를 좀 위로해 주게"라고
말할 친구가 93명의 명단 중에서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수첩만 뒤적이다가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전화박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삶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전화할 친구 하나 없으니 이제까지 무엇하고 살았나?
내가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이분은 그때의 비참하고 가슴아팠던 일을 생각하면서
먼저 진실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어떻습니까?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많이 있습니까?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잘 살아 오셨고, 정말 행복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조금 전에 언급했던 그분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수첩에 연락할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없습니다.
데이빗 리스만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나의 위로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사교적인 것 같은 사람이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만남도 많아지는데 왜 사람들은 고독해질까요?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첫째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빠른 변화가 우리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변화가 많고 새로운 인간관계가 새롭게 펼쳐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교제에서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한번 태어나면 그곳에서 뼈를 묻는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소중했고, 이웃이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가 내 곁을 떠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활짝 열지 않습니다.
자연히 만남은 많아지는데 만남의 깊이는 없어집니다. 그래서 고독합니다.
특히 신도시에서 더욱 그런 현상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어질 때는 헤어지더라도 마음을 열어야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헤어짐 이후에도 그의 삶이 풍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서 그 시간이 공백이 되지 않습니다.
2) 문화적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급격히 사회가 변하다 보니까 형제끼리도 세대차가 생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빠, 엄마, 형제들의 관심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통 관심사가 줄어들게 되고 자연히 교제관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마음은 고독해집니다.
3) 더 큰 이유는 자칭 의로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 시각으로 의롭다 생각하는 자기의(自己義)와
모두에게 의로운 공의(公義)가 있습니다.
오늘날 정보화시대가 되고 많은 지식을 접하게 되면서
사람들마다 많이 아는 줄 알고 자기의가 넘치기 때문에 오히려 고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지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부딪칠 일이 많아지지만 겸손한 지식이 많으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특히 교회생활하면서 옳고 그른 것만을 따지며 살지 마십시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씩씩대며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도 싸움으로 이끄는 지식은 참으로 곤란한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이라면 사실상 없는 것이 본인과 전체 공동체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지식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겠다는 자세가 참된 지식인의 자세입니다.
4) 그리고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현대는 인간관계를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내가 이 사람과 사귀어서 무엇을 얻나?"
그래서 얻을 것이 있으면 친절해지고, 얻을 것이 없으면 냉정해집니다.
별로 이익이 없을 것 같은 인간관계에서는 먼저 찾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찾으면 무엇인가 밑지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자기가 먼저 가서 손을 내밀면 자기 입지가 좁아지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친구는 정작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욕심 때문에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인생이 나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 구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수고하고 열심히 부를 추구하지만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고독한 존재가 되었는지 바로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8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 말을 보면 이 사람은 남을 위해 수고를 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이 고독하게 됩니까? 남을 위해 수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수고하고 자기의 목적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헛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본인은 부인할지 모릅니다. 나는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지 진정한 친구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부자나 권력자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그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인 줄 알면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입니다.
사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참된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한 친구를 만날 기회가 더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헛된 삶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군중 속에서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가지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9-11절 말씀에는 친구관계를 맺는 세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 활동에 기초하는 친구관계입니다.
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저희가 수고함으로'라고 합니다. 같이 활동하면서 친구관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같이 운동하고, 같이 배우고, 같이 놀면 즐겁고 좋은 열매가 생깁니다.
그러나 같이 활동할 때에는 친구이지만, 활동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2) 도움에 기초한 친구관계입니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친구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10절이 그 말씀입니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 관계는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키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보다 깊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도 든든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움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돕다가 그 도움이 짜증으로 발전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3) 헌신에 기초한 친구관계입니다.
11절에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두 사람이 함께 눕는 관계, 정말 깊은 관계의 우정입니다.
내가 따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사람!
이러한 헌신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를 얻습니다.
오늘날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가면 자연히 우정이 생길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사귀고, 도움이 주고받았어도
진정한 헌신이 없으면 그 관계는 진정한 우정관계가 아닙니다.
우정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헌신과 나의 헌신이 만나는 곳에서 우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실제적 헌신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절대 우정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너무 바쁘게 목표를 위해서만 살지 마시고,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데에도 시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배려하는데 소용되는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웃도 없이 빨리 달려가는 사람을 향해서 성경은 헛되다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두 가지 시간만은 기본적으로 빼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시간, 그리고 또 하나는 이웃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 말은 일을 게을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쁘면 안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바쁘게 살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바쁘면서도 꼭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쁘십니까?
저는 3일 전 새벽에 이런 영적 공식을 나름대로 만들어 봤습니다.
바쁜 것은 좋습니다.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매일 하루의 첫 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그러한 '바쁨'은 정말 문제 있는 '바쁨'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일에 예배 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그러한 '바쁨'은 정말 치명적인 '바쁨'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패턴이 바뀌어야 합니다.
쫓겨가며 허덕이는 삶에서 부름 받은 삶으로의 영적 의식 개혁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일에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여러분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지
하나님을 잃어버리기까지 그 일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조망도 해 보고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또한 이웃과 사귀는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이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교인끼리 교제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인은 교인이라고 하기보다는 교우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 안에서 얼마나 사귀기 좋습니까?
모두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부족한 점은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이기심이 덜한 사람, 사람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친구가 되기가 좋습니까?
정말 교회에서 많은 친구를 얻으시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까지 친구를 얻어서 살지 못하면
세상 속에서는 친구를 얻어 살기가 훨씬 힘듭니다.
여러분! 교회 내에서는 절대 고독한 군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인으로 지내지 말고 교우로서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서로 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요새 은사, 은사 하는데 가장 귀한 은사가 바로 우리 옆에 있습니다.
교인이 은사,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은사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름을 알면 이름을 불러 주고,
서로를 향해 선을 내밀어 의미 있게 만져 주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관심을 기울여 주면서 시간을 내어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를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를 위한 길입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전도 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팔 전도를 위해 친구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데 앞에서
한 명이 산 속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친구가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썬다싱은 어떻게 사람 죽는 것을 보고 그냥 가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헤어져 친구는 먼저 가고
썬다싱은 얼어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가보니까 앞서 간 친구는 얼어죽어 있었고,
사람을 업은 그의 등에서는 여전히 따뜻한 열기가 흘러나와
그 두 사람 모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반드시 패하고, 반드시 헛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올 줄 알고, 이웃을 배려하며 사는 사람은
헛된 삶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도 만나고 이웃도 만나는 과정에서
기쁨은 극대화되고 슬픔은 극소화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
참으로 이상한 구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단결하면 산다"라고 하지 않고,
왜 갑자기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라고 말했을까요?
이 말이 "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두 사람이 뭉치면 능히 당하고
세 사람이 뭉치면 더 큰 힘이 생긴다"는 말입니까?
물론 세 사람이 뭉치면 두 사람보다 더 큰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말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한 하나의 줄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견고한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 하나의 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그 하나의 줄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사람 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자녀가 그 하나의 줄입니다.
사랑스런 자녀 때문에 두 부분의 관계가 견고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관계에서 삼각관계는 항상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둘 사이를 맺어주는 가장 위대한 또 하나의 줄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어주시는 줄입니다.
둘이 믿음으로 하나되고 그 사이에 하나님이 삼겹줄의 은총을 허락하실 때
둘 사이의 관계는 가장 견고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친구로 삼는 삶은 참으로 견고한 삶이 됩니다.
여러분! 영원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진정 가지셨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고, 동시에 이웃과의 만남이 있어서
여러분의 인생을 든든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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