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세상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생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 : 13-16
오늘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반항심이 많습니다. 교회 옆을 지나가면서 '이 놈의 교회'라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로부터 어떤 피해나 어려움을 당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놈의 교회, 그만두고 다른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반항심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는 교회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직장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한 일터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16 : 18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음부의 권세란 지옥을 말합니다. 음부는 마귀의 처소입니다. 음부는 곧 멸망이요 죽음이요 사망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지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요 마귀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요 죄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또한 교회는 성전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 : 22에 의하면,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좋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헐어야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 : 19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헤롯이 사십 육 년 동안 지은 성전으로서 대단히 웅장한 건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전도관과 통일교의 교회는 사람이 볼 때는 교회이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헐어야 할 교회입니다. 교회라야 진정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와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피차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1. 교회는 구별된 자들이 모인 곳이다.
구별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의 건물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대지나 건축 자재가 구별됐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 건물 자체는 다른 빌딩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가 차지한 땅도 다른 땅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건축 자재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앉아서 예배드리는 의자도 보통 나무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 자신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죄와 심판과 사망과 지옥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 중에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 : 13에 보면, 바울은 본래 유대교에 입교한 자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자기를 택정하시고 은혜가운데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에베소서 1 : 4에 "곧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별되었다는 것이요 구별되었다는 것이요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구별되는 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에는 자연의 복과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 자연의 복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할 것이 없이 모두 받습니다.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 받습니다. 마태복음 5 : 45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 안에는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와 러시아 공화국은 먹을 것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이들은 자연의 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하늘의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에베소서 1 : 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신령한 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복입니다.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자연의 복도 필요하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 즉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 복도 받아야 합니다. 이 신령한 복은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꼭 받아야 합니다. 자연의 복을 받지 못하게 되면 살아갈 때 불편하기는 합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신령한 복은 영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의 복보다도 더 중요한 복인 것입니다. 이 복은 내가 선택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택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 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곧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세의 사람들은 반드시 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4 : 31에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세에 있을 환난에 대해서 염려를 하고 불안해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때에 불러 모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 자체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교회는 세상의 빛이다.
지금 세상은 대단히 어둡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어둡습니다. 어두워지면 방황하게 됩니다. 혼란스럽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대단히 어둡습니다. 그리고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목표가 보이고 방향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질서가 잡힙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어두움이 세상을 뒤덮게 될테니까 성도들을 향해 빛을 발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0 : 1, 2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의 주인은 마귀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귀를 공중의 권세를 잡은자, 흑암의 권세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이끌리면 어두움과 흑암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빛을 발하려면 빛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빛은 길입니다. 올림픽대로가 아무리 넓어도 어두우면 갈 수 없습니다.빛이 없으면 길인지 강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 속을 향해 질주하다가는 교통사고가 나기 쉽고 한강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빛은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길은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빛이 있어야 방향이 보이고 목표가 보입니다. 빛은 소망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앞이 보이는 것이고 앞이 보인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 : 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빛은 치료합니다. 말라기 4 : 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했습니다. 방에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생깁니다. 곰팡이가 생기는 것은 곧 빛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빛을 비취면 곰팡이는 없어집니다. 온전히 마르지 않은 옷을 그냥 두게 되면 반드시 곰팡이가 생깁니다. 그 옷을 햋빛에 널어놓으면 마르게 됩니다. 곰팡이가 없어집니다. 요즈음 방사선 치료라고 하는 것도 다 빛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치료를 합니다.
셋째로 빛은 열매입니다. 빛이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어두움 속에서는 식물이 자라지도 않고 열매는 더 더욱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잘 자라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열매입니다.
넷째로 빛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 : 1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 : 9 이하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빛 곧 생명이십니다. 이 빛이 세상에 비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이 빛을 받아 반사시킬 뿐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과 빛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 : 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신자와 교회 수가 많아졌지만 참빛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 시대와 6.25 직 후에는 교회가 별로 없었지만 빛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합해질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할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은 타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물러가게 됩니다. 교회는 썩어가는 세상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3.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생선은 잘 상합니다. 그래서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소금에 절입니다.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세상이 썩었습니다. 정치가 썩었습니다.정치가 썩었다는 것은 백성도 썩었다는 것입니다. 위에만 썩은 것이 아니라 아래도 썩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생들은 질서가 없고 예의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부패한 것은 스승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또한 가정의 자식이 부패했다는 것은 부모가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더 이상 썩지 않게 할 것입니까? 교회가 소금의 사명을 다하므로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보면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이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곳은 어디든지 썩는 것을 막고 다시 살립니다.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영적 소금인 예수님이 찾아가셨을 때 나사로가 살아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아무리 썩어 지독한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변화됩니다. 썩어 냄새나는 사람의 마음에, 썩어 냄새나는 가정에, 썩어 냄새나는 직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새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썩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소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금은 맛을 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맛을 냅니다. 다른 양념을 많이 넣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만 들어가면 아주 좋은 맛을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삶의 맛을 잃었습니다. 잘산다고 하는 사람이 더욱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소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삶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맛을 내게 하는 조미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만족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세상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가서 그 맛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사람들도 그 맛을 느끼게 되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택함을 받으셨습니까? 택함을 받으셨다면 구별된 자들입니다. 구별된 자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비춰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참 맛을 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택함을 받음 우리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둡고 캄캄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목표와 방향을 찾고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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