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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본 사명 (마태복음 28:18~20)

by 【고동엽】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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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기본 사명  (마태복음 28:18~20)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가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그의 몸은 땅위에 계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기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되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교회의 기본사명을 일러주셨습니다. 이 사명은 영구합니다. 이 사명은 불변합니다. 이 사명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안고 있는 기본사명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선교의 사명

첫째는 선교적 사명입니다. 복음증거의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라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머무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믿는 자 안에 머물면 안 됩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 머물면 안 됩니다. 복음은 밖으로 가야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었으면 믿는 자는 이 복음을 독점하지 말고 내가 믿은 이 복음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가야 됩니다. 교회는 복음을 보내는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모든 족속이라는 이 말은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는 세 가지 영역을 다 뛰어넘습니다.
첫째, ‘모든 족속’이라는 것은 지역적으로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 어디든지 복음은 가야 됩니다. 공산국가에도, 이슬람에도, 힌두교에도, 불교도 국가에도, 북한 땅에도 복음은 가야 됩니다. 복음이 못갈 땅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제한이 없습니다.
둘째, 대상의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 흑인이나 백인이나 어떤 종족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기한의 제한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복음을 전해야 됩니까? 세상 끝날까지, 주님오실 때까지입니다. 어디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느냐? 세상 끝까지입니다. 어떤 대상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느냐? 모든 족속에게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모든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제한을 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항상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증거해야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교회의 기본사명을 이렇게 설정하신 주님은 그 사명을 교회위에 남겨 주셨습니다. 온 세계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계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세계여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안에 세계인들이 다 와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과 지역의 개념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세상 끝날’이라는 것은 그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항상 오늘이 세상 끝날인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복음을 모르는 모든 이웃들은 다 복음을 받아야 될 모든 족속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사명

두 번째 교회의 사명은 예배입니다.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예전입니다. 예배에는 말씀이 있고 예전이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예배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형식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배로 나와야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공적 임재는 개적인 임재와 그 예배적 의미와 다릅니다. 성령의 충만도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충만과 교회 위에 임하는 공동체적 성령의 충만은 그 강도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을 혼자 듣는 것과 함께 듣는 것은 그 성령의 감동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고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봉헌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학적으로 다섯 가지가 강조됩니다.
첫째, 찬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미입니다. 저는 요즘 이런 꿈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가대를 볼 때마다 2부예배도 성가대 수준처럼 발전하고, 3부예배 처럼 부흥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챔버 오케스트라가 성가대 찬양에 있어서 기악선율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도와주고 찬양도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 주간 모 신문에 금년에 유망한 음악연주자 두 사람이 소개되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박제희씨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좋은 악기를 가지고 이렇게 실력 있는 주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일에 이렇게 봉사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예배의 찬미,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영광의 찬미, 이것을 우리가 함께 누리는 일에 대해서 감동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는 찬미가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송영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고백이 담기고 회개가 담기고 감사가 담겨야 합니다. 예배의 대표기도를 하시는 장로님들이 반드시 그 고백과 회개와 감사가 담겨 있어야 됩니다.
셋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이 말씀을 듣는 말씀의 역사가 있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넷째, 봉헌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담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다섯째,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자가 성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이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적 사명은 교회의 기본사명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교육의 사명

세 번째가 교육의 사명입니다.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과 지키는 것이 함께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지키는 것도 도와주고 감시하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지키는 것, 이것이 교회교육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됩니다. 그러나 배웠으면 지켜야 됩니다. 지키는 것은 실천입니다. 실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전함을 타고 전투하는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유람선처럼 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전함에 탄 전투 병사처럼 명령하고 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너희 진보를 나타나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나 전투명령을 하시지,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라는 식으로 권면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유람선 타고 관광하듯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전투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표어가 ‘선교와 교육과 봉사를 힘쓰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매우 평범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사명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금년 표어에 제일 강조점이 ‘힘쓰다’는데 있습니다. 선교,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육,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봉사, 누구나 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힘써야 가치가 있습니다. 힘쓰는 선교라야 합니다. 힘쓰는 교육이라야 합니다. 힘쓰는 봉사라야 합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나이가 7,80대입니다. 반면에 물리학상이나 의학상이나 화학상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2,30대가 더러 많습니다. 특히 영국의 로렌스 브레거 박사는 25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42살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42살에 물리학상을 받았을 때 물리학자로서 너무 늙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시카고대학의 루카스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는데 나이가 58세입니다. 그때 신문에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주 젊다는 평을 한 사람으로는 유일했습니다. 그만큼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은 7,80대로 고령자들입니다. 특히 콜럼비아 대학의 브레그 교수는 82세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수상이 되었습니다. 발표가 났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에 가지고 못하고 발표 후 3일 만에 사망을 했습니다. 그만큼 고령자들이 경제학상을 받습니다. 왜 그런가? 이것을 경제학자 한성구 교수가 아주 재미있게 관찰을 했습니다. 경제학이라는 것은 실험이 늦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은 어떤 이론이 하나 발견되면 당장 실험실에 가서 실험을 해서 증명하면 정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이론을 가져도, 아무리 좋은 논문을 발표해도, 아무리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그것이 국가경제나 세계경제에 적용이 되고, 검증이 되고, 정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실험을 빨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이라는 것은 일생을 두고 기다리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거쳐서 정설이 되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젊을 때 노벨상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고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천하는 신앙생활

여러분은 선교를 묵상하는 자가 되지 말기 바랍니다.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봉사를 연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은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게 아닙니다.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작업입니다. 선교는 실행하는 진리입니다. 교육은 실행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중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다가 꼭 결론에 동일한 말씀을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리라.” 여러분, 신앙세계는 누가 먼저 됩니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명상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먼저 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명상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받은 은혜를 묵상하는 주제로 삼지 말기 바랍니다. 은혜받은 데로 살기 바랍니다. 실험하기 바랍니다. 실험을 해야 증명이 됩니다. 이 증명이 업적이 되는 것입니다. 증명된 결과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손만대에 간증거리가 되는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실험실에 가지 않으면 과학이론은 하나도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증명이 되어서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실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르치면서 철저하게 우리를 보고 실행하라고, 지키라고, 행하라고,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는 삶으로 증명되고 결과를 남기고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믿음을 가지라가 아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살아야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살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인 매듭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제가 큰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큰 왕대 같은 대가 쭉 뻗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아주 아름답고 무언가 느낌이 있습니다. 그 대나무에 묘미와 생명은 마디에 있습니다. 대나무 마디가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져서 십여 미터 장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마디가 확실해야 됩니다. 매듭이 지어져야 됩니다. 제가 싫어하는 우리나라 속담이 몇 가지가 있는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제 양친께서 저보고 무슨 일을 똑 부러지게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고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한다고 책망을 받은 적이 있지만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마디가 확실해야 됩니다. 지난해의 실패를 안고 새해를 살면 안 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고 확실하게 한해 한해를 하나님 앞에 확실한 매듭을 짓고 살아가는 건강한 대나무의 모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몸입니다. 그리고 개인은 이 몸에 속한 지체입니다. 몸은 지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지체가 고장이 나면 몸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하고, 교회가 교육하고, 교회가 봉사하는 개념은 곧 내가 선교하고, 내가 교육하고, 내가 봉사에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땀과 수고, 희생이 분명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변화의 열매

올해 한국교회의 화두는 ‘부흥’과 ‘변화’입니다. ‘부흥’은 1907년에 평양 대부흥운동을 100년 만에 한국교회가 회복하고 계승해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은 나눔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그냥 소극적인 뜻이 아니고 100년 동안에 받았던 한국교회의 축복을 이제는 나누어주는 변화된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실로 한국교회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받은 교회의 모습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7년도의 화두입니다.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화두 앞에 우리 교회가 부흥을 해야 됩니다. 우리 각자가 거기에 맞도록 신앙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세계는 한국을 향하여 사람을 보내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후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한국교회를 향하여 당신들이 받은 은총과 축복을 우리들에게 나누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1세기 만에 다가온 이 부흥의 매듭이 다시 살아나는 부흥 100주년 기념에 우리 각자가 부흥을 해야 하고, 우리 교회가 부흥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누는 변화가 우리 교회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는 객관적인 변화가 백 번 있어도 내가 주관적으로 한 번 변해야 효력이 일어납니다. 옆에서 나를 회개하도록 백 번 기도해주는 것보다 내가 한 번 회개기도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변화는 옆에서 아무리 변해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분명하게 변해야 됩니다. 내가 분명하게 변하면 옆에서 변화되는 그 효력이 전부 내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변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옆에서 변한 그 효력이 내게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는 할 일이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할 일이 많습니다. 이 말은 내가 주님 앞에 할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나를 제외한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포함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포함된 선교입니다. 내가 포함된 교육입니다. 내가 포함된 봉사입니다. 진실로 2007년도는 하나님께서 저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주신 것처럼 이 한반도에 부흥의 역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한국교회와 이 민족과 국가가 진정한 변화가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제2의 선교역사가 한국교회를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 1세기에 이만큼 축복받은 나라는 세계 교회사에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한국은 불과 120여년 만에 이와 같은 획기적인 부흥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비워야 하나님이 제2의 축복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교회사에 교훈입니다. 세계 교회사를 보면 영국교회나 독일교회나 화란교회 안에 모든 교회들이 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의 정점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그 정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특혜가 하나님의 축복의 정점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받은 축복을 비우셔야 됩니다. 나누어 주어야 됩니다. 선교하는데 비워야 됩니다. 교육하는데 비워야 됩니다. 봉사하는데 비워야 됩니다. 그 빈 그릇에 여호와 하나님이 제2에 축복을 한국교회에 다시 부어주시는 것은 교회사의 교훈이고 성경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축복의 정점에 있는데서 비우지는 안고 계속 달라고만 한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 교회들이 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했던 국가와 민족교회들이 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한국교회가 축복의 정점에서 이제는 주는 한국교회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욕심이 더 많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이 소리를 들으면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나눌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준 축복입니다.

맺는 말

선교와 교육과 봉사,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은혜입니다. 선교하고 싶어도 못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제한이 없습니다. 누가 선교를 제한합니까? 누가 교육을 제한합니까? 누가 봉사를 제한합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데 왜 못합니까? 우리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변화되어야 할 요건입니다. 다 갖추어져 있는데 왜 못합니까? 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안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007년도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향해서 요구하는 음성입니다. ‘부흥하라’ ‘변화하라’ 이 축복 안에 올해가 우리에게 진실로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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