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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사람 (마18:1-6)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먹일 비타민을 사려고 약국에 들어갔습니다. "비타민을 주세요" 약사가 물었습니다. "비타민에는 종류가 많은데 어떤 비타민을 원하십 니까? 비타민 A를 드릴까요? 비타민 B를 드릴까요? 그리고 비타민 C도 있는 데요?"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아무거나 괜챦아요. 우리 아이는 아직 글을 모르는데요. 뭘!"
어리석게도 우리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며 부모의 역할을 수행해 갑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못하며, 자기 중심적인 사랑을 강요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자녀를 통하여 자기 성취욕을 전이 시키려고 합니다. "내가 못다한 소원을 네가 이루라. 내가 못이룬 욕망을 네가 성취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녀들을 괴롭히고 희생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못 살겠다고 합니다. 공연히 낳아가지고 이 고생을 시킨다고 합니다. 누구를 위한 공부냐고 묻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많은 가정문제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랑인줄 알고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줄 모릅니다. 이는 형태를 달리한 자기 사랑일 뿐 전혀 자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나 은사나 재능은 전혀 생각지 않는 무책임한 사랑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인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늘 본문 5절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녀이지 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자녀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요, 자녀를 과잉 보호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은 "쥬이쉬마더(Jewish Mother)"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과 교육철학은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교육학의 석학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하며, 또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유대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의 특징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이들을 서로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이 가정에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잘못된 교육의 관행들을 생각해 봅니다. 위협 형입니다. "한번만 더 그런짓 했다가는...." 하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형입니다. 비교형입니다. "그애는 안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하고 야단칠 때마다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조소형입니다. "잘한다. 잘논다. 어디두고 보자" 하면서 아이 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변덕형입니다. 일관성없는 교육방법입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언제는 꾸짖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고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갈팡 질팡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교육방법들은 다 좋지 못한 유형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절대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키운다는 것입 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이라고. 자,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초상집이 됐을 것입니다. 이제 자식농사 다 망쳤다고 절망했겠지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 성적표를 보고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가 말한 대로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은 사람 나름으로 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못알아 보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면서 쓸데없이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다가 우리집 아이의 재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 사람들의 교육방법으로 훌륭한 것은 그들의 축복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식물을 키울 때도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젖을 먹이고, 옷을 입히지만 나머니 부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받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축복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지 않는 재산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건강도, 지위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로서 오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유대 어머니들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오늘의 목사와 비슷함)가 오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복을 빌어주세요. 복을 빌어 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이것이 저들의 풍속이요, 교육방법입니다. 유대 어머니들이 랍비에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복을 비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말합니다. "자, 이분을 잘 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분이 신가를.." 랍비가 옷을 잘 입었거나 잘생겨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줄 분이기에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 분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잘 들어둬야 한다" 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면서 어머니가 먼저 열심히 듣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랍비로부터 들은 말씀을 어린 아이가 끝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틈틈이 가르쳐주고 다시 상기시키고 합니다. 자 이러니 아이들의 마음속에 훌륭한 어린들 을 향한 존경심이 자리 잡을 수 밖에요. 그러니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네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 다. 귀감을 삼을 사람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귀감이라고는 세상잇속 차리기에 바쁜 부모님의 모습뿐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이 아이들이 무엇을 본받고 자랄 수가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의 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때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셨는데 여기에는 이 어린아이를 보고 배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되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첫째,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높은 자리에 있겠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높고저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저 하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너무 큰 자에게 마음을 쓰고,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 그만큼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크고 싶은대 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 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보다 높은데 있는 사람을 끌어 내리려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사학자는 말하기를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미친 사람 몇사람 탓이다" 하였습니다. 단지 몇 사람의 시기, 질투 때문에 그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인류가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로 가득찬 몇 사람 때문에 국민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로 가득찬 몇 사람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크려고 발거둥치는 그 몇 사람들 뜸에 바로 지옥이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에 있습니다. 남들에게 높임을 받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면 대체로 어린 아이쪽에 가까운 사람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어린 아이 생각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스스로 못난 것을 알면서도 잘난체 하느라 억지로 어깨에 힘을 주는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같고 생각이 어린 아이같은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천국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교만하고, 모략중상하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교만이 지옥을 반들고 어린 아이의 마음이 천국을 만듭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는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부모를 절대 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만 의지하고 인정합니다. 엄마가 곁에 없다고 느끼면 아이들은 당장 울어버립니다. 알고보면 어린 아이처럼 약한 존재가 없고, 어린 아이처럼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존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아이는 무엇을 걱정하는 일도 없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 마음이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린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주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 마음이 순전합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어린아이 들을 실족케 하면 세상에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실망시킨다는 뜻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실망을 주고,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불신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의 아이들을 만나보면 도무지 믿음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 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은 실망을 받았기 때문입 니다. 어린 어이들을 실족케 하면 곧 어린 아이들을 실망시키면 거기에는 따른 벌이 무섭습니다. 실망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반항 체질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이 단순한 만큼 한번 실망하면 좀처럼 되돌리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얼마 무서운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를 실족케 하면 것이 눈이라면 그 눈을 빼 버리라. 손이거든 그 손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 라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내일입니다. 내일없는 오늘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출처/극동방송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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