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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자 (마태복음 18장 1-6절)
어린아이의 순수함
어느 날, 한 미국 교회에 5살짜리 어린이가 주일학교 교실에 왔는데, 부모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 이름은 브라이언(Brian)이었는데 성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같은 이름이 많고 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을 찾으려면 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성을 알려고 물었습니다. “브라이언! 아빠 이름이 뭐지?(Brian, what's your daddy's name?)” 그때 아이가 평소에 아빠를 부르는 것이 이름인 줄 알고 대답했습니다. “대디(Daddy).”
할 수 없이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브라이언! 엄마 이름이 뭐야?(Brian! what's your mommy's name?)” 아이가 또 대답했습니다. “마미(Mommy)” 결국 성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성을 알까 고민하다가 선생님이 기발한 질문을 했습니다. “브라이언! 아빠가 엄마를 뭐라고 불러?(Brian! what does your daddy call your mommy?)” 그때 아이가 약간 어른 목소리 흉내를 내며 말했습니다. “헤이! 베이브!(Hey, Babe! 여보, 자기야!).”
어린아이들 앞에서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순수하니까 그대로 배웁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은 엉뚱한 말을 하는데, 때로는 그 말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 아만다(Amanda)란 5살짜리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만다가 고열로 병원에 가니까 의사 선생님이 진찰하려고 그녀의 귀를 보며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도널드가 있나?(Who's in there? Donald Duck?)” 아이가 말했습니다. “노(No).”
귀를 다 살펴보고 난 후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코를 진찰하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미키 마우스가 있나?(Who's in there? Mickey Mouse?)” 아이가 말했습니다. “노(No).”
코 진찰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아만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바니가 있나?(Who's in there? Barney?).” 그때 아만다가 대답했습니다. “노!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있어요. 바니는 속옷에 있어요(No, Jesus is in my heart. Barney is on my underwear).”
< 천국에서 큰 자 >
얼마나 순수한 모습입니까?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 잘 말해주는데,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일까요?
1. 회개하는 자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이 땅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이 땅에 제국을 세우고 그들은 개국공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주님을 끊임없이 버리게 하자 따르는 군중들의 숫자는 점차 적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숫자가 느는 것을 거의 절대 선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르치고 행동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가진 제국의 희망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럴 즈음에 주님의 제자 중에 3명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본문 바로 앞장에 있는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산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때 주님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엄청난 장면을 목격한 3명의 제자들이 나머지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하자 제자들 사이에는 다시 제국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곧 제국이 세워질 것 같으니까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며 “주님 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가?”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서로 자신이 제일 큰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연장자인데다 목소리가 컸고, 주님이 ‘반석’이란 별명을 붙여주시고 천국 열쇠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제일 사랑받는 자니까 자신이 제일이라고 주장했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는 “요한아! 너는 형도 몰라보냐?”고 말하며 자기가 큰 자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이 세리라는 돈 많이 버는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까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안드레는 자기가 주님을 따른 최초의 제자니까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나다나엘은 가문의 혈통은 자신이 제일 좋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가룟 유다도 자신의 돈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뢰를 받으니까 자기가 제일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논쟁하다가 마침내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논쟁하지 말고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 묻고 주님의 결정대로 따르자!”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예수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그 질문에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본문 2절을 보면 먼저 저희들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를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회개’임을 알려줍니다.
회개란 가치관의 변화, 마음의 변화, 신분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진실한 회개에는 반드시 선한 변화가 있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키고, 외모까지 변화시키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킵니다. 그 중에서 본문 3절 말씀처럼 주님은 어린아이들처럼 변화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어른들은 대개 안주하려고 하고 아이들은 항상 질주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싫어합니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고, 자신의 삶을 편하게 생각하고, 이제까지 하던 방식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좋은 길이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그냥 삽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제가 한번 해봐도 돼요?”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교회와 교인이 전통과 관습에 매여 변화되지 않으려는 것은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3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나 ‘결단코’라는 강조적인 표현을 써서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려는 놀라운 일을 놓치게 됩니다. 자신을 돌이켜 선한 일에 참여하기를 힘쓸 때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2. 겸손한 자
본문 3절에서 주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면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만 생각하는 미성숙한 면을 비롯해 많은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결국 주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의미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내려가는 길입니다. 위대함은 겸손할 때 주어집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세상적인 성공 가치관을 가지고 누가 큰 자인가를 물었습니다. 그처럼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도 돈을 많이 벌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축복을 판단하는데, 그런 가치관은 신앙생활의 초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큰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시선을 받기를 원하면서 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져 결국 영혼이 망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냥 헌신해야지 더 높아지고 더 사랑받고 더 축복받으려고 헌신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지만 그 헌신 때문에 더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로 사랑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더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자만심만 키웁니다.
어느 날, 한 처녀가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악 된 생각이 있는데, 이 문제 좀 도와주세요. 저는 주일에 교회에 오면 제가 교인들 중에 가장 예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단지 큰 착각이니까요.”
그처럼 자기가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자기 영성과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착각이 심해지면 어느 죄보다 무서운 교만의 죄로 발전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는 대단하다! 나는 잘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몸을 불사르는 헌신을 해도 그 헌신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감추려고 할 때, 그런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서 큰 자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3. 순수한 자
어린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순수함입니다. 어린아이는 ‘척!’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인 척, 있는 척, 그리고 아는 척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왜 그래요?”라는 질문이 참 많이 합니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래요? 왜 신호등은 녹색인데 파란 불이라고 해요?” 반면에 어른이 될수록 그런 호기심과 순수함은 없어지고 계산만 복잡해집니다. 계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아빠가 ‘고 피쉬(Go Fish)’라는 카드 게임을 4살 된 아이와 했습니다. 몇 번의 게임에서 4살 아이가 연거푸 이기니까 그 아이는 한참 자기 자랑에 빠졌습니다. 그 자랑을 듣고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무 자랑이 심하구나! 아무래도 너에게 ‘겸손(humility)’을 가르쳐야겠다.” 그때 아이가 아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그 겸손 게임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왜 가끔 어린이들이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데 사랑받습니까? 아이들의 순수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순수함을 기뻐하십니다.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계산적으로 살지 않으면 남에게 항상 당하면서 살 것 같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따릅니다.
특히 아이들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떤 곤경에 처하면 그 이유를 알려고 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나? 누구 때문인가?” 그런 질문을 하다보면 불평과 원망과 책임 회피가 나오고, 그런 식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고민에 빠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믿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은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철저히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길과 생각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철저히 믿으면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을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생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모험이 됩니다. 그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적절하게 공급해주십니다.
로버트 펄검(Robert Fulghum)이란 베스트셀러 작가가 캔자스시티 타임스(Kansas City Times)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저는 삶의 지혜를 대부분 유치원에서 배웠습니다. 지혜는 높은 학력에 있지 않고 유치원의 모래박스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나누고 공정하게 노는 법을 배웠고, 남을 때리지 않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남의 것을 가지지 않고, 남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도를 배웠고, 차를 조심하고, 손잡고 서로 모여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높고 낮은 것에 대한 구분이 없고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런 순수한 평등정신이 있어야 삶의 지혜도 생깁니다. 우리는 부족한 점이 참 많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과 도우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철저히 순진할 정도로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축복은 하나님을 겸손하고 순수하게 따르고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4. 주님을 영접한 자
본문 5-5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이 구절을 보면 주님은 어린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어린아이를 실족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실족시킨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좋은 일을 못하게 막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징벌을 말씀하셨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죄인도 일부 로마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익사로 사형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유대인들에게 사람을 바다에 깊이 빠뜨리는 것은 철저한 파멸의 상징이었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행위가 어떤 것보다 저주받는 행위임을 강조하려고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을 사랑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주님은 인격적인 큰 모독으로 받아들이시고 큰 벌을 내리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과의 관계가 깊은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스테파나반(Stepanavan, Armenia)에는 ‘팔라산의 아내(Palasan’wife)라 불리는 여인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녀의 남편 팔라산은 1988년 엄청난 지진이 아르메니아를 강타했을 때, 정오쯤에 자신의 일터에서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뛰어갔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건물로 들어가 아이들을 밖으로 안전하게 꺼냈습니다. 그렇게 28명의 아이들을 밖으로 꺼냈을 때 2차 여진으로 학교 건물은 붕괴되면서 그도 깔려죽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희생적인 행위를 기억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젊은 과부를 ‘팔라산의 아내’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누구인가?”보다 “그가 누구와 관계가 있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 믿는 사람들이 위대할 수 있고, 언제 위대하게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사랑받는 제자라면 어떤 사람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만약 그 길을 막으면 막는 사람이 큰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그 사실은 우리를 기쁘게 만들기도 하고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절대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 때문이고, 두려운 이유는 우리 이웃을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동료들과 이웃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사람도 실족시키지 말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곧 3월 12일에 미션퍼블릭에서 발행할 두 번째 책 ‘하나님과 깊은 만남’이 나오게 됩니다. 원래 책 발행이 많이 늦춰질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몇 주간 몽골의 임준호 선교사님과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이 연속으로 방문하고, 미국 선교연맹 소속 선교사님들을 위해 많은 선교헌금을 하는 바람에 책 발행이 늦춰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계신 한 집사님의 사랑과 관심과 격려로 책 발행을 예정대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저주는 ‘피상(皮相)’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깊은 관계가 없는 것이 현대인의 문제요, 현대 성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 발행될 책이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도전하는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우리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미션퍼블릭의 존재목적은 주님과의 관계를 ‘피상적 관계’가 아닌 ‘깊은 관계’가 되도록 주선하는 영적 중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에 우리 모두 전심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죽으면서 큰 회한에 빠졌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젊었을 때 길 교차로에서 신호 표지판을 바꾸어놓는 장난을 많이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 헛수고를 하게 했는데, 그것이 후회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잘못된 영적 표지판을 세워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하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도록 주선하는 거룩한 영적 중개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 지금보다 더 겸손해지십시오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베스트셀러를 지은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시아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5살 때,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시아는 부모에게 아기와 자신만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부모들은 염려해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아이가 계속 졸라서 결국 둘만의 시간을 가지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시아는 좋아하면서 아기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조금 후에 부모가 문을 슬쩍 열고 그 장면을 훔쳐보자 시아는 아기 옆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아기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해줄래!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 너는 하나님을 얼마 전까지 봤잖아.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하늘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셨어. 너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내게 말해줘!”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영상은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이미 거듭난 존재라도 끊임없이 주님을 새롭게 마음에 영접하려고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영성은 계속될 것이고, 더불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도 희미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철저히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은 내게 없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는 내게 없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끊임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미국 CMA 한인총회의 문 감독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젊었을 때 뉴욕에서 크게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부흥회 끝나고 안수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이 있을지어다.” 그런데 신기하게 며칠 후에 사모님이 임신했습니다. 문 목사님은 너무 신기해서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다른 교인들은 다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문 목사님은 아들 이름을 미리 요셉이라고 지었고, 교인들도 다 ‘요셉이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마침내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아기를 받은 흑인 의사가 “딸이다!”라고 했습니다. 문 목사님은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아니다! 절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은 사람이 말하는 신기한 계시는 최대한 멀리하고 성경 말씀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대개 종교적인 허영심과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영성이 높고 신앙이 좋다는 칭호를 받으려고 안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은사를 보여주는 곳에 몰려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군중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군중들은 썰물처럼 사라지고, 그런 신앙생활은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영성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영성이 있는 것 같고 예언과 계시를 잘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순수하게 의지하고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못하는 것이 많음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에 대한 절대 필요를 한 시도 있지 않고 사는 사람이 진짜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사실 천국에서 진짜 큰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믿음으로 드리면 우리는 큰 것을 가지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영혼이 크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절대 믿음을 삶의 최대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순수하게 의지함으로 천국에서 큰 자로 평가되고, 진정한 행복을 얻어 누리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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