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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찬양과 신음 (시 19,96,97,100, 롬1:10,8:20-21)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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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찬양과 신음   (시 19,96,97,100, 롬1:10,8:20-21)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감사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뭔가 모자라시는 분이셔서 우리가 그분께 찬양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영광의 거울이 되고 그분의 신성의 한 조각 파편이 된 것을 스스로 기뻐하고, 또 더 큰 영광과 신성의 그릇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려는 뜻을 묶어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영광과 신성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분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영광의 반영, 증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찬양은 피조물의 찬양에 참여하여 합주하고 조화하는 또 하나의 피조물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기 까마득한 시기 이전에 이미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우주 만물은 우리 이전에, 우리보다 앞서 수십억 년, 아니 수백억 년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찬양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은 온 우주 만물의 찬양에 막내동이로서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엄청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겨우 온 우주 만물의 대합창에 끼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고 자랑하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자부하며 피조물을 부리고 있지만, 피조물의 장대한 찬양의 역사에 견주어 본다면, 우리 인간이 감히 나서서 독창하고 주연하겠다고 나설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주만물의 찬양과 함께, 또 그에 맞추어 지금 뒤늦은 노래를 부르거나 반주 정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절의 변화와 순환 속에 감추져 있는, 은밀하고 섬세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오늘,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고 호흡하며, 또 그분의 뜻에 따라 자연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고백하며, 생명 있는 동안 생명을 다하여 그분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이, 그리고 땅과 하늘에 지음받은 모든 만물이 찬양하는 잔치에 함께 어울려 축제를 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또 하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피조물의 신음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볼 줄 알았던(롬 1:20) 바울도 다른 한편으로 만물이 탄식하며 고통하는 신음소리도 들었습니다(롬 8:22). 자연의 아름다움만 보고 그 배후에 있는 고통을 보지 못하는 자는 자연의 반쪽만 보는 자입니다. 우주 안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깨어지고 다치고 억눌리는 피조물의 탄식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 생명의 멸종, 생태계의 파괴만을 경계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 그 자체 안에 허무한 것에 굴복시키는 우주적인 힘, 혼돈과 무의미, 상처와 죽음이 들어와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깨어지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자연의 치유가 없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상함이 없고 해함이 없고 애곡과 죽음이 없는 거룩한 산"(사 11:9)의 비전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이 지어신 피조물로서 이 파괴적 힘에 굴복해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바라지만, 건강은 쉽게 깨어집니다. 우리는 평화를 말하면서도, 전쟁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지만, 미움의 힘에 쉽게 굴복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희구하지만, 늘 수치스러운 일만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 만물의 탄식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죽어 가는 자들과 함께, 모든 깨어지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탄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탄식의 노래는 불신자들의 장송곡과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약한 것들, 병든 것들, 죽은 것들을 묻어 버리는 체념의 노래를 부른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이들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더 큰 영광과 구원의 날을 열망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영광송에서는 우리가 제일 늦게 화음을 부르고 후주와 반주를 하지만, 구원의 탄식송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구속받은 자로서 피조물의 탄식을 대변하여 선창을 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는 피조물은 "하나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면서, 그 아들들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고대하며 후주를 부르고 화음과 반주를 넣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뒤를 따르며 탄식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여전히 "몸의 구속"을 애타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 있지만,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탄식하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애타게 탄식하듯이,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중에서도 강한 지체들은 약한 지체들 안에서 온전한 치유와 자유를 위해 애타게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주 만물 안에서 우주의 구원을 위해 탄식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인간과 자연은 모두 찬양의 공동체요 탄식의 공동체며 소망의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찬양이 이런 우주적 찬양, 우주 끝까지 미치는 찬양, 우주와 함께 부르는 찬양이 되어서, 우리 주위의 상처받고 깨어지고 억압받는 피조물과 함께 사랑의 고통과 희망의 용기로써 연대하는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우성칠 때, 영광의 주님도 속히 오시리라 믿습니다. 아니 주님도 아직은 상처난 손으로 우리를 어루 만져 주시고, 깨어진 허리로 우리를 껴안으시면서 우리와 함께 온전히 영광받으실 그 날이 속히 오기를 하나님 아버지 면전에서 끊임없이 보채시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찬양과 탄식의 노래로써!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상처를 통해 상처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도 함께 힘차게 노래합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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