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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내 (골1:5)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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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내  (골1:5)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나라에 쌓아 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요, 하늘나라에 가서 주께로부터 받을 상급에 관한 소망이었습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러한 소망은 험하고 어려운 그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데 커다란 힘과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의 권면에 따르면 이러한 소망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이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함께 말씀 하십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골 1: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하늘에 쌓아둔 소망은 하늘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감사와 믿음과 사랑과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늘에서 받게 될 영광스러운 보상 즉 하늘의 복에 관한 소망입니다.

    소망은 감사하게 합니다.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신앙의 열매가 풍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였고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를 따라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 성장과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제일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에게 골로새 교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배웠고,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서 성령 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고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의 그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상급으로 받을 수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로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에 꼭 알맞은 자였습니다.
(행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딤전 1:13-15)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런데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불러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바울과 마찬가지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소망을 쌓아 둔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윌리엄 로우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우리를 괴롭히고 하는 일마다 우리의 뜻과 어긋나더라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늘나라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합니다.
(골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안에서 움직이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믿음과 긴밀하게 결합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구체화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믿음의 열매요 참증거인 것입니다(Carson). 그러기에 사랑은 실천을 통해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 보이며, 복음의 전파를 통해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입증해 보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먼저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행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는 것과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하시며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5,4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 25)고 하며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했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행하고 서로 간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롬 14:15)합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의 하나는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셨던 마음이요, 독생자를 인간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엡 4:31)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피차에 사랑하되 '마음으로 뜨겁게'(벧전 1:22)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친숙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서로 거리감이 있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여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라고 합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고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거나 그 속에 가식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구별됨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차별을 두고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고 모든 것을 감싸주고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고전 13:4-8).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죄인을 용납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모든 사람을 감싸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되 편애 없는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되 자신을 모두 내어줄 만큼 진실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하십니다. 삶 자체가 사랑이셨으며,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행함과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 흔적입니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생명을 얻은 자는 사랑으로써 그 흔적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고 합니다.
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십니다.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너는 이렇게 죄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다, 너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죄인이다 ! 하고 몰아붙입니다.
이에 루터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 이래서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늘에 쌓아둔 소망 안에서 인내합시다.

    소망은 복음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되었습니다.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5절)
복음은 성도들의 소망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과거에 이방인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자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합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나라에 앉히셨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3-7)합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복음이 가져다주는 소망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경우 꾸준한 믿음의 성장을 보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줌으로써 또한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골로새 교회에만 한정되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소망으로 가진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고 움직여 복음의 결실을 맺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통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살아 움직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약속받은 하늘나라는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그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그 최선의 노력의 결과는 복음의 결실로 맺어집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성도들이 받게 될 영광과 특권이므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죄에 굴복하지 않고 의를 포기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기뻐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을 소망으로 삼습니다. 적금 통장에 소망을 담기도 하고, 총명한 자녀에게 소망을 두기도 합니다. 실로 어렵고 고달픈 삶 속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위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한하며 삶에 평안과 기쁨을 주기에 너무 불완전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궁극적이고 온전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장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의 안전과 복을 보장해 줍니다. 소망은 이러한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참된 평안과 기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기차 여행 중 한 노신사가 앞에 앉은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질문했습니다. “젊은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그러자 젊은이는 가장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예, 잘 믿고 있습니다. 저는 당구나 사교, 도박에 관한 말이라면 듣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긴 여행의 지루함이나 덜어 주죠. 그런데 주일날마다 목사님 설교를 듣는 것도 진절머리 나는데, 이런 곳에서까지 당신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노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하늘나라에 가면 끝도 없이 예수님 말씀을 듣는다네. 그 곳에는 술집도, 도박장도, 당구장도 없다네. 젊은이 말대로라면, 하늘나라는 당신에게 지옥보다 더한 곳일세.”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오락보다도, 도박보다도 즐겁지 않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떤 사교 모임이나 파티보다 기쁨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이에게는 예수님과 영원히 거하는 천국이야말로 ‘지옥’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옮겨지기 전에 먼저 자신의 근본이 바뀌어야 합니다.(예화뱅크-하늘나라는 지옥보다 더한 곳일세!)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소망으로 인내하는 한 해를 살아가며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내하는 달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은 감사 하게 하며 믿음과 사랑과 함께하며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왔습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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