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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생각하며 끝까지 인내합시다! (벧전 2:18-25)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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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생각하며 끝까지 인내합시다!  (벧전 2:18-25)


우리는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실망한 적도 있습니다.  그 아픈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자기의 삶을 비통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분개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평화도 영혼의 풍요도 육신의 건강마저 다 망쳐 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아픔과 상처 때문에 어떤 사람은 복수를 다짐하기도 합니다.  못 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증오와 미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쌓아왔던 인간관계에서 신뢰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질 때, 살고 싶은 마음마저 없어집니다.  자신의 깊은 상처와 실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는 없다!  배신감 때문에 온 핏줄이 조여오는 것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나와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게 기가 막힌 상처를 준 그가 생명과도 같은 내 자식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밤잠을 못 자도록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그 사람이 삶을 같이 나눈 배우자라고 하며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 생명을 준 부모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형제일 수도 있고, 동업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애매 모호한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야 합니까?

믿음이란 인생 길에 당하는 삶의 모든 애매 모호함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람은 나를 해하려 해도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어 놓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진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깊은 맛입니다.
애매한 미래와 맞설 수 있는 용기는 삶에 제일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수용할 수 없는 애매 모호함과 맞설 수 있는 삶의 인격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분노와 증오로 귀중한 인생을 소모하지 말고 금보다 귀한 믿음을 붙잡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언제나 특별하고 귀중한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오늘 여러분이 소망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믿음대로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려라.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부르는 삶을 향하여 그 영혼에 희망 쌓아라.  그 영혼에 희망을 불어넣어라.
잊는다.  사실 “잊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귀한 교훈입니다.  잘 잊는 사람이 행복하게 삽니다.  쉽게 잊지를 못하고 가슴 한 구석에 처박아 놓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다 잊어버렸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 가슴 아픈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다 잊어버리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 때에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마음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에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마음의 선택입니다.  그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밝은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믿음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소망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느 날엔가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고 하는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세계를 틀림없이 간증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나 불행한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보면 남달리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행한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은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의 근심이 뼈를 녹인다고 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환경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불편한 자기 마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불편한 자기 마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환경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한 자기 마음과 싸우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일어난 일보다도, 내가 당한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내 마음의 선택입니다.  그 일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입니다.  그 일에 대한 내 마음의 씀씀이입니다.  그 일에 대한 내 마음의 지킴입니다.  내가 왜 내 마음을 지키지 못했을까?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후회하게 합니다.

여러분, 초라해진 내 현실 앞에서 어느 날, ‘그때 내 마음의 심보가 그것 밖에 안 되었을까?’ 그렇게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심보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생명입니다.
아!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닙니다.  고통이란 것이 이 땅에 어디에 있습니까?  다 지나간 마음의 기억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을 붙들고 싸우는 겁니다.  마음을 붙들고 고생하는 겁니다.  마음 때문에 그렇게 고통 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자 이렇게 하나님의 전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상처 입는 모든 마음에 오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인생의 성급한 판단을 뒤로 미루고 다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여유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영혼에 여유를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모든 상처들이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으로 치유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전은 원래 힐링 캠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을 찾아온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이곳에서 마음도 영혼도 육신도 내 감정도 다 치료받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모두가 지도자입니다.  부모로서 지도자이던가, 기업가로서 지도자이던가, 직장인으로서 지도자이던가, 다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라고 하는 말은, 지도자라고 해서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때때로 그것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진저리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도자란, 내가 가진 책임 때문에 절대 물러나지 않고, 절대 무너지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성되게 감당할 때에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저리를 칩니다.  저렇게 끈기 있을까?  도대체 저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못해!  이런 사람의 모습이 바로 지도자입니다.
힘들다고 어머니의 자리를 그만두고, 아버지 됨을 포기하고, 기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내팽개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누가 합니까?  지도자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 없는 자가 볼 때에 진저리가 처지도록 끈기를 갖는 겁니다.  “내가 자지 못함과 매맞음과 굶주림과 추위와 고난과 수많은 아픔 속에서도 다만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함만 드러나길 원하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끈기입니다.

인생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순종하며 나가는 이 적은 생명을 통하여 내 갈 길마다, 내 손길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역사가 내 생애 가운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나님만이 내 삶에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주님! 나는 물러서기를 원하지만 내 앞에 이 일을 내게 맡기고 붙들고 가신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삶에는 어떤 원칙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원칙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나를 어리석게 하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두를 기쁘게 해 주려다가 아무도 기쁘게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도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해 줄 수 없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그 자체가 교만입니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다 좋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하면 결국은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고 맙니다.  비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른 일을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애매 모호한 고난과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주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애매 모호함을 수용할 수 있는 삶의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저는 믿음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는 것을 압니다.  저는 주님이 계신 곳에 앞날이 있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서 맞이하는 내일은 또 다른 축복이 있는 것을 압니다.

단테의 실낙원에 보면 지옥문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 너희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
교회는 절망을 버리고 들어오는 곳이고, 지옥은 희망을 버리고 가는 곳입니다.  어디가 지옥입니까?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의 불이 꺼진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주님이 주신 세상, 그 중에 희망 찬 내가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이 문으로 들어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절망을 다 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꿈꾸는 자만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꿈이 없는 곳, 거기가 지옥입니다.  큰 꿈이 영혼을 감동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붙들고 인생이 꿈틀거릴 수 있는 꿈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동차가 엔진이 있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엔진의 사이즈 때문에 움직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움직일 수 있는 꿈의 엔진에 발동을 거십시오.  꿈의 엔진을 걸고 권능을 받아보십시오.  그러면, 환난이나, 곤고함도 넉넉히 이깁니다.  어떤 핍박이나, 위협이나, 칼도 넉넉히 이깁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초라해지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고 가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여러분의 발걸음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것은 인내가 이룬 작품입니다.  위대한 일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고 견디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 인내를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 성공하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큰 차이점 하나는 끈기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고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는 끈기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끈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몸부림치는 그 끈기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끈기의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끈기 있는 성도, 주를 생각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는 양이 어떤 사람은 많은 것 같고 어떤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어떤 회사에는 많은 것 같고 어떤 회사에는 적은 것 같습니다.  어떤 국민에게는 많은 것 같고 어떤 국민에게는 적은 것 같습니다.  축복의 양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그분이 당한 난이도, 그분이 당한 고통의 도수에 의해 비례합니다.

보석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타납니다.  보석도 원석 그대로 놔두면 돌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석을 갈고 또 갈 때에 영롱한 빛을 내게 되고 보석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영롱한 빛을 내려면 잘라내고 갈고 다듬어야 합니다.  영혼의 빛이 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그 고통의 난이도가 대단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보면 요셉과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당한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난 후에 찬란한 축복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자에게는 일관성이 피난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자가 피할 수 있는 데는 일관성입니다.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줄 몰라.  나는 이렇게 밖엔 갈 줄 몰라.  나는 이렇게 밖엔 살 줄 몰라.”  우리에게는 이것이 삶의 간증이고 증거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의지의 박약과 신경쇠약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우울증과 낙심, 의기소침과 권태, 만성피곤 등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흑백 논리 속에서 짜증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힘듭니다.  다 어렵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편안한 왕궁의 생활을 버렸습니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대변자로 나섰습니다.  한때 노예들을 하나의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기 위해서 애매한 고난 앞에 맞섰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보살핌과 예비하심을 수없이 경험한 그 백성들과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경험하고 사는 오늘 우리들이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비만 넘겨주면, 하나님이 이 길만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을 때에 묘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그 고비를 다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넘어갈 때마다 인간들이 한 일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평과 분리와 원망과 반역과 거짓말입니다.  고비를 넘어갈 때는 저들이 “엘 샤다이 엘 샤다이, 오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다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모세야,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여기를 왔느냐?”
이 오합지졸의 무리를 끌고 가는 모세가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즉시 저를 죽여서 저의 곤고함을 제 자신이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모세의 처절한 기도는 대단합니다.  조석지간으로 바뀌는 인간의 저 변덕스러움, 불평, 배신, 인내의 한계, 극심한 분노, 포기하고 싶고 떠나고 싶은 인간의 고백….  이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들 중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가정도 떠나고 싶을 것입니다.  다 버리고 직장도 나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믿음의 길에는 하나님의 처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 길에 애매한 고난의 길에는 하나님의 처방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처방밖에는 모르지만 인간을 이 땅에 내시고 그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 속에 하나님의 처방을 내리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처방이 한 생명 속에 기적을 낳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내 삶 자체가 기적을 체험하고 있고 내 삶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끈기 앞에 무너지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하나님이 처방전을 내려 주십니다.
“모세야, 네가 너무 지쳤구나. 아직 지치지 않은 70인의 장로를 준비하여 네게 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전입니다.  저들을 통해서 불평하는 백성의 불평과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여러분, 지쳤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시오.  지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주여 내게 지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갈멜산에서 불벼락을 내렸던 그 유명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할 때입니다. 차라리 지금 열조들 앞에서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요나도 니느웨 성에서 하나님의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고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사실 어쩌면 엘리야의 좌절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요나의 방관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낙심하여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인간은 눈을 뜨고 어디를 보아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굴복하지 않은 사람, 숨겨놓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야에게 아직 바알 앞에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의 사람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축복은 아직 지치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함께 일할 믿음의 형제를 찾으십시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이고 자산입니다.

논쟁이나 토론을 좋아하고, 비판하며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 끌려 들어가면 일이 안됩니다.  환경이나 사람들 때문에 자꾸 복잡해지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자신을 단순하게 만드십시오.  간단하게 만드십시오.  아주 단단하게 만드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논쟁, 모든 토론, 모든 의심을 포기하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나를 쓴다면 어찌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나를 보낸다면 어찌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어찌 하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면 나는 크게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매 모호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일을 단순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나를 돕고 나와 함께 하시고 이 생명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습니까?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은 단지 사람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일 뿐입니다.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복잡하지 말고 애매한 고난 앞에서도 모든 논쟁과 토론의 의심을 줄이면서 믿음으로 은혜를 단순하게 만드십시오.  믿음으로 내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십시오.  믿음으로 내 삶을 단순하고 간단하게 만드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모든 슬픔을 참으면 이것보다 더 큰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모든 상처와 실망과 마음의 고통과 비통함과 분개하는 마음이 내 속에 남아 있다면 나를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를 생각하며 그 닫혀진 마음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풍요와 건강을 잃어버린 모든 마음들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인간의 신뢰에서 허물어짐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나를 해하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주님을 생각하며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순종하고 나가는 이 작은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 시대에 내 가정과 내 기업과 내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날지 하나님이 내 삶의 증인이 되십니다.  이 증인된 삶을 간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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