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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찬송 (에베소서 1:3~14)

by 【고동엽】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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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찬송   (에베소서 1:3~14)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돌아왔습니다. 산들마다 푸르름이 짙어가고 새들이 지저귀며 울긋불긋 꽃의 향연이 가득한 이 계절을 맞이하여 가정마다 주님의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집안의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손을 다정하게 마주잡고 봄놀이를 떠나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아이들이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고 큰 꿈을 가지고 저들의 미래가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이 땅 이 터전에서 비젼을 펼칠 수 있도록 우리는 가정의 달인 이 계절에 기도하며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한바탕 웃음꽃을 피며 하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찬송으로 충만한 저희가 되기를 바라며 이 시간 삼박자의 축복을 전할까 합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가 영원히 불러야할 노래가 되는 곡조가 되며 하늘의 천사와 모든 만물이 다함께 할 합창의 향연인 것입니다.

성부의 예정(3-6)

우리의 찬송의 주제는 누구이며 소재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영원 전부터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정이란 미리 결정한다는 어원으로 그 예정의 시기는 창세 전부터입니다. 그 유일하고 위대한 예정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칼빈주의를 대표하는 숭고한 신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28-29).
그렇다면 그 예정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낮고 천한 우리 탕자와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이올시다. 당시에 로마법에는 혈족이 아니더라도 양자법이 있어서 외인이라도 아들을 삼아 그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전수하는 의식이 있었기에 바울은 시청각 교육으로 당대의 문화를 소재로 하나님의 양자 됨의 원리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사탄의 자녀였지만 이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사 그의 기쁘신 은혜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15).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인 잠언과 전도서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신앙과 경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격도 공로도 없는 인생들로 재대신 화관을 씌우시고 슬픔대신 희락과 찬송으로 옷을 입히시기 위한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과분한 친절로 우리에게 복 주신 주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것이냐는 논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극한 상황인 감옥에서도 자신이 개척한 에베소와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교회에 지대한 관심으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과 순교의 위협 가운데도 굴하지 않고, 메임을 당한 자가 도리어 자유롭게 살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격려하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더 이상 저에게 있어서 고난이 절망케 하는 장애가 되지 못하다는 믿음의 경지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바울을 바울 되게 하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영생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믿음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힘 즉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있노라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근거로 제시할 수가 없다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성경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에이레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강은 단순한 동양식 뉘앙스가 아닙니다. 안녕과 평화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뜻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생들에게 아니 이미 죽은 시체와도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살 소망을 허락하시려고 막힌 담을 그의 희생으로 여시고 아버지께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그 은혜에서 우리는 평강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평강은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그 회복의 역사이며 화해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완전한 아버지와의 재회의 행복을 그 누가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0:28,29). 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롬 8:38,39)
오늘 사도 바울도 결국 자신의 환경과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여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 행복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풍성한 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평강으로 마치게 되는 것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해할 때 그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성자의 구속(7-12)

둘째로 우리를 사랑하시사 눈물의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신 아들을 통하여 영광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구속이란 헬라어로 ‘보상하여 구출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말하며, 히브리말로는 ‘죄악을 가린다, 덮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구원의 방법으로 유교는 착한 것, 선한 것을 추구하며 충과 효를 숭상함으로 더러운 죄악을 훈육과 예를 통하여 바꾼다는 것이고, 불교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공덕을 잘 쌓아서 수행을 잘하면 극락에 간다는 고행주의이나 우리 기독교만이 피흘림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피를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로 아람식 표현인데 그리스도의 뜻이 대속이라는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주’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사용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보다 그 대신 아도나이라고 주로 표현을 많이 했는데, 신약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그 주님으로 부르며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는 신적인 권위로 교회 위에 찬송과 경배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신앙고백의 표현이 사도와 제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져 주시는 대속의 피값으로 죽을 육체가 그와 함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는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하게 됨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만물이 탄식하며 신음하는 것을 부활의 영광으로 덧입히고자 멸시와 천대의 잔을 기쁨으로 받으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모든 영예와 명성을 얻으신 분으로 시간이 그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죽음마저도 그를 음부에 가둘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만물과 천지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엡 1:10). 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하였습니다(엡 4:6).
또한 하나님과 인생을 화목하게 하였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7:23).
그리고 사람이 지은 성전을 헐고 친히 그 몸으로 새성전을 삼으셨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엡2:21,22). 이제는 그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로 우리의 구속이 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더욱 풍성한 삶으로 새생명의 기쁨을 허락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한 번 더 찬미하며 천국 합창대보다 더 많이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성령 하나님의 신령한 사역을 이해할 때 좀 더 분명해집니다.


성령의 인침(13-14)

셋째로 모든 성도는 성령의 보증으로 그의 구원의 기쁨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침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우표를 부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인침은 도장을 계약서에 찍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 깊은 데에 불도장을 찍었다는 것이지요.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2).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큰일나지요. 생각이 있을 때나 행복할 때는 몰라도 시련이 올 때나 사고나 병으로 생각이 없을 때는 그 믿음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칼빈주의에서는 유아세례를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성령의 인치심을 믿기에 환란 날에도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 죄책과 죄의 권능에서도 우리를 건지십니다. 이제 마지막 날에는 성령과 신부가 우리를 오라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살리실 겁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수정같이 맑은 요단강을 지나 사철 풍요롭게 영글어 가는 생명나무 실과와 정금으로 된 황금 길을 지나 꿈에도 바라고 그리던 우리 주님을 만나 우리의 모든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그 소망이 성령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 모든 교회와 성도는 주님을 늘 노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사와 능력으로 인치심은 이미 구약시대에 예고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에게 예표하셨던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민 14:14).
시대 말의 교회가 이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할 때 우리에게는 부흥의 소망이 더할 것입니다. 적은 힘을 가지고도 그 당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 서구의 복음화를 앞당겼던 초대교회의 부흥의 주류가 바로 이 성령의 능력이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변화의 삶이 일어나서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지며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령한 복을 체험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를 향하여

우리는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관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와 평강의 삼중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든 서신의 여왕이라 할 만큼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이 성경 안에서 우리는 축복의 터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가족과 같은 교회로 변화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선교사의 희생과 신앙의 선조들의 도고의 기도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며,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팔도에서 처음 만난 사람끼리 만났지만 십자가 아래에서는 다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크고 원하는 것보다 많은 주님의 사랑은 세상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어가기 위한 힘찬 발돋움으로 우리가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부흥케 하시는 역사로 가능하게 됩니다. 내리 사랑이라고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이 깊은 신앙의 진수 복음의 정수를 자손 만대에 증거하며 가르치는 순간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통하여 먼저 우리 영혼이 천국에 속한 소명으로, 목적이 이끌어 가는 삶으로, 또한 우리의 가정에 사랑과 양육의 회복을 통하여 날마다 의미가 있는 삶으로, 또한 교회가 교회다워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이 시대에 드려야 될 줄로 압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독수리의 두 날개로 비상하는,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며 부흥하는 후암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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