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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존경의 관계 -엡 5:31-33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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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31-33

어린이 날이나 어버이날은 법적으로 공포되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 주일이나 부부의 날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없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2001년 4월에 부부의 날 후원회라는 민간단체에서 국회에 부부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2003년에 국회에서 통과되어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공포되었습니다. 21일을 부부의 날로 제정한 이유는 “둘이 하나 되자” 라는 뜻에서 21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본단위인 소그룹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기본단위이고 소그룹인 부부가 건강해야 합니다. 이 부부의 공동체가 건강하고 건전하고 행복하면 이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그룹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부부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만 해도 이 부부의 삶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부의 삶, 결혼에 대해서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본문을 보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창 2:23-24절을 보면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 둘을 부부로 짝을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못을 박아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 최초의 주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부부는 물론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때부터 아담부부는 인류 최초로 한조를 이루어 부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결혼과 부부의 삶의 신성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셨다.” 이것이 결혼의 신성성입니다. 결혼이나 부부의 삶에는 이런 신성성 즉 신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부부의 삶에 이런 엄숙함, 신적 섭리가 배어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에서 엄숙함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고 풀고 헤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신성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들이 봉착하면 극복할 힘이 없어지고 여차하면 헤어질 것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부부는 하늘이 짝지어 주었다는 생각이 깊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연, 연분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헤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쉽게 가정이 파괴되고 이 소그룹이 병들게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성성이 없어지고 세속적인 이해타산이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 신성한 결혼에도 세속적인 이해타산이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혼수문제로 파경을 겪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왜 이 엄숙한 부부의 맺어짐에 혼수문제가 끼어서 판을 깹니까. 거기에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들이 개입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결혼은 처음부터 기초나 시작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행복하겠습니까. 혼수는 몇 년 지나면 다 고물이 됩니다. 결혼할 때 기분이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동남아 여인들이 한국 사람들과 결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혼율도 많다고 합니다. 2003년에 이혼한 건수는 2784건이었고 2004년에 이혼한 건수는 3,315건, 2005년에 이혼한 건은 4,208건, 2006년에 이혼한 건은 6,187건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신부를 돈 주고 사 오는 매매혼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동남아의 처녀들을 돈 주고 신부로 사 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원리를 무시하고 단추를 잘못 끼우니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는 것은 평생 긴 여정을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는 삶인데 그런 매매혼으로 만나서 그 먼 인생의 여정을 어떻게 함께 살아갑니까. 결혼하고 부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시는 가장 엄숙하고 신성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떠나라

본문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대 원리입니다. 결혼은 남녀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는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성장해서 둘이 만나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부부이고 가정이고 결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하나가 되라”고 했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존심 때문입니다. 독립심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의외로 마마보이들이 많습니다. 매사를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이 일구어 놓은 환경과 재산을 지나치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다 성장했으면서도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또 하나는 부모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못 미더워서 떠나보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곁에 두고 매사를 간섭합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떠나보내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는 둘에게 맡겨야 합니다. 지나치게 간섭하면 자식들이 의존심만 커져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아들이 밖에 나가서 매를 맞고 오면 부모는 속이 상합니다.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똑같습니다. 차라리 때리고 들어오지, 그러면 병원비를 기분 좋게 내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모 마음은 거기서 끝나야 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으면 어느 재벌처럼 저렇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마음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렇다고 저런 행동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보내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느 선교사 지망생이 선교사가 되고 싶은데 아내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날개 잃은 새처럼 풀죽은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떠나지도 보내지도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어느 아들이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은데 부모의 반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직장에 들어가서 일하는데 직장생활에 만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평생 후회의 생활을 하다가 나이 50대에 용기 있게 목회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만사는 때가 있는데 그 길이 순조롭겠습니까. 아이들이 결혼할 때 부모들이 대부분 반대합니다. 아이는 할 수 없으니까 그 결혼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생활이 행복했겠습니까. 미래의 방향이나 직업의 선택 그리고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할 때 막무가내로 부모들이 막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 가려는 길이나 결혼하려는 대상이 객관적으로 볼 때 부당하다고 하면 반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하는 내용이 편견이나 부모가 생각하는 기준에 미달되고 사회적 체면 때문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후에는 부모도 아이들도 함께 후회하게 됩니다.  

성경이 사람이 장성하면 결혼해서 부모를 떠나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뜻은 “네게 주어진 몫을 찾아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게 주어진 삶의 내용이 있고 삶의 몫이 있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몫의 삶을 살아가야 기쁨과 즐거움과 마음에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어 떠나라는 말은 부부가 한 팀이 되어 그 부부에게 주어진 몫을 창조하고 이루고 성취하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존경과 사랑

부부는 참 신비한 관계입니다. 남남끼리 만나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기적의 삶입니다. 남남끼리 만나서 살아갈 때 두 사람이 마음이 꼭 맞으리라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어떻게 남남끼리 만나 살아가는데 마음이 꼭 맞겠습니까. 내가 낳은 자식도 마음이 맞지 않는데 남남끼리 만나 살아가는데 마음과 이상과 생각이 맞으리라고 기대하면 잘못입니다.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기성복을 사 입으면 딱 맞는 옷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입다 보면 몸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삶에는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존경과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힘을 발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과 존경심이 삶의 기초석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부부의 관계가 무너지기 쉽습니다. 이 정신이 없으면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부부가 매일같이 한집에서 같이 살다 보면 사랑도 몇 년 지나면 시큰둥해집니다.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몇 년 지나면 감각도 감정도 두근거리던 떨림도 없어집니다. 말이 몇 년이지 결혼해서 몇 달만 지나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오래가도 안 됩니다. 나이 50이, 60이 되었는데도 부부끼리 보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뛴다면 살아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 아시고 감정을 조절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 존경과 신뢰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서로 이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정신이 없으면 몇 년 지나면 상대방의 부족한 모습만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 부족한 모습만 눈에 보인다면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사랑하고 존경하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삶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세대들은 인내심이나 아량 그리고 포용력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위주이고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부부들이 몇 년 만 살면 모두 원수 되어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참 불행한 삶입니다. 어떤 부부가 티격태격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부인이 바쁜 일이 있어서 남편에게 “당신만이라고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부흥회에 갔다 온 남편이 다음 날부터 부인에게 너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그 밤에 무슨 말씀을 들었기에 남편이 저렇게 달라졌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전화해서 물었습니다. “엊저녁에 강사님이 무슨 설교를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부는 남편이 너무 난폭했습니다. 정말이지 헤어지지 못해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한번은 함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가서 성전 옆에 있는 많은 무덤들을 순례했습니다. 안내원이 여기에 이렇게 많은 무덤이 있는 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제일 먼저 부활하려고 여기 성전 가까이에 비싼 돈 내고 묻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이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이제는 장사를 지내야 합니다. 장의사 말로는 미국으로 시신을 운구하는데 5천불이 들고 여기에서 장례하는 데는 천불이 드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아내가 한참 생각하더니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왜 5천불씩이나 들여서 미국으로 가려느냐고 물으니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이 도시는 2천 년 전에 누군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이 발생한 도시라서 께름칙하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지겨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30대 때 부인은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면 속상해서 신경질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더 일찍 들어오라고 소리는 치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고 합니다. 50대가 되면 남편이 출장 간다면 노골적으로 좋아하고 60대가 되면 친구들이 집에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나가 있으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여기에 존경심마저 없어지면 부부는 남남되고 원수 되고 집이 불편한 곳이 됩니다. 그래서 근래에 황혼 이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서 자꾸만 상대방의 이상한 점만 발견하다 보니까 자꾸만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막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말이 많아지고 남편들은 말이 없어집니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 아내는 말이 많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도 여과되지 않은 말을 막 하다보면 남편들이 자존심이 상하고 마침내는 무 대꾸로 일관하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그래서 부부의 삶에는 헌신과 섬김이 더해져야 합니다. 가정생활은 섬김의 생활이고 헌신의 생활입니다.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일도 상당한 헌신과 섬김의 삶입니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도 상당한 헌신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가정은 삭막해질 것이고 서로 불평스러운 마음이 많아질 것이고 마침내는 그 가정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늘 가정이나 부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는 것도 섬김이나 헌신이 서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섬김과 헌신의 삶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좋은 삶의 요소입니다.

복음으로 열린 부부

오늘은 가정 해체시대 입니다. 오늘은 신앙인의 가정에도 이 세속적인 풍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철저한 복음으로 열린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열린 가정은 부부가 신앙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때 생각이 커지고 교제의 폭도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실 때 밖에 모친과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밖에 모친과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열린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복음으로 혈통의 장벽을 넘어 모두를 나의 형제자매 부모로 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벽이 사라지고 편견이 사라지고 편협성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누구나 함께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용서하게 되고 나누게 되고 헌신하게 되고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정들이 조금만 갈등이 발생하면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원수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열린 가정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시부모가 싫어도 내안에 계시는 성령이, 말씀이 함께 하면 그 말씀의 힘이 나로 하여금 마음을 열게 하여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아들이, 이웃이, 원수일지라도 복음의 안목을 가지게 되면 다 맞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통가정에서 하나님 가정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더 넓은 범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중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룩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헌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부부들이 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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