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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 (요14:16)

by 【고동엽】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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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  (요14:16)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 시겠다고 합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돕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보혜사는 보호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함께 합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잘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함께 하시리라 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성령님도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 할 때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가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임하도록 보혜사 성령을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시는 인격적인 삼위 일체의 신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보내신 다고 합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또한 주신다고 합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셨다면 파라클레토스는 요청(부름)을 받아 보내어 주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Shaftesbury)경이 길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가 횡단보도를 지나가다가 자기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나를 도와 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이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 내려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샤프츠버리 경은 어린 소년으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하며 소년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 주세요.'라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다른 보혜사
  보혜사의역할은 성령만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보혜사가 되어 주셨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과 생소한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던 역할과 똑같은  보혜사이시며 예수님은 잠시 세상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한 번 오신 후에는 우리와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령님은 세상에 오셔서 주님이 하시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행할 바를 지도하여 주시며, 가르치시며, 도와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언자(변호자 Advocate 중재자 Intercessor)이신 보혜사
입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남을 도우기 위해 부름받은'이란 수동적 의미를 가지었으며 , 여기서 '법정에서 도우는 자'란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법정의 법률 용어로서 처음으로 발전되는데 '법적인 보조자', '변호자'로 옛날 그리스 법정의 변호인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변호사는 지금처럼 돈 받고  일하는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대부분 피고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죄인을 변호하면 함께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희생을 각오하고 친구의 무죄를 위해 계속 곁에 앉아 힘과 위로를 주는 친구 중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피고를 위하여 말하는 자들이 대언자 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의 상징적인 장식은 성전에서의 그의 속죄 사역에서 그를 변호하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아버지의  법정에서 죄 범한 신자를 대변하는 변호자이십니다 (요일 2:1 이하).

예수님께서 죄인을 변호하시는 모습을 요8장의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녀는 현장에서 돌 세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중에서 이 여인을 변호해준 변호사 예수님이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변호가 없었더라면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변호해주는 대언의 영입니다. 변호해 주는 대언의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부족을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 보다 유명했고 선명회의 지도자였던 피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어스 박사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기 부인과 이혼을 하느냐 같이 사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괴퍅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피어스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좋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보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인도주의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를 위해서라면 열 번이라도 죽을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사람과는 단 하루도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배후를 전부 다 알고 사랑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미화시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문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성자들, 자서전을 쓴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미화시켜서 만든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자서전의 99퍼센트는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크롬웰은 한때 영국에서 매국노이고 위선자라고 해서 시체까지도 형벌을 받을 정도로 가혹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이 크롬웰의전기를 쓰면서 크롬웰은 200년 만에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서 그 명예를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알면서 일곱 번 속아 주고 열 번 속아 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되어서 기쁨을 회복하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혜사는 안위(위로 comforter)자입니다.
흠정역에서 안위자로 번역 합니다.
(욥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comforters)로구나
이 안위자들은 욥을 권고하러 왔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표면상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참된 위로자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이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면서 이렇게 감격적인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력 안에는 모든 아픈 곳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잊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염려를 잊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편히 쉬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열심히 묵상하는 것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들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권세와 재물은 얻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고 배척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겉은 화려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공허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 삭개오를 만나주신 것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예수의 이 말씀 한마디는 조롱으로 상처받고 있는 삭개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임한 예수의 위로가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에 덫을 더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어 주고 위로해 주는 안위자로 사시기를 간절
히 바랍니다.

   보혜사는 상담자(Counsellor) 입니다.
  영어 개정역(R.S.V)에는 상담자(카운셀러 Counsellor)라 고 번역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습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습니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일세.”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상담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을 교훈 합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권력과 재력과 지력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지만 영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사막입니다. 니고데모는 세상 낚시에는 도통을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낚시에는 전혀 문외한입니다. 이러한 때에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예수와의 상담을 통해서 그는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민이 충만해서 상담을 했습니다. 저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곳이 없을까요. 이때 대답하기를 문제 없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공동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호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먼저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우리의 상담자가 되시는 예수와 상담하여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이땅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일생을 통해서 적고 큰 문제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삶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합니다.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다 주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문제를 풀어주시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보혜사는 협조자 (돕는자 Helper)입니다.
공동번역은 협조자 영어 새번역(NASB)은 돕는자(Helper)로 번역 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계속되는 절망과 실패의 상실감 속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조력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세상을 이기고, 스스로를 구원해 낼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보지만, 결국 찢겨진 영혼의 갈 곳은 죽음의 길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인생의 조력자가 함께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조력자로 함께 하십니다.

프랑스 영지인 적도 아프리카에 사는 카레 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던 여선교사 에스텔라 마이어즈는 본토민들에게 `보혜사'를 설명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있는 말 중에서도 번역이 어려운 것으로 손꼽힙니다. 그녀는 성령의 직무와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의 직무요, 역사라면 신자들을 장려하시고 권하시며 책망하시고 보호하시고 안위하며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본토 조력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런 일을 해주는 이를 우리는 `우리 옆에 구부리는 이'라고 하지요.' 마이어즈는 이 말이 보혜사를 표현하는 말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본토민들에게 그 말의 유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짐꾼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긴 여행을 하는데 보통2, 3개월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 때에 그들 중에는 학질이나 이질에 걸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들은 결국 행렬에서 낙오하게 됐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대로 있으면 대부분 들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던 사람이 그들을 발견하면 쓰러진 사람을 측은히 생각하여 그들을 일으켜서 다음 동네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 옆에 구부리시는 이'라 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어즈 선교사는 이 같은 설명을 듣고 `보혜사'를 '우리 옆에 구부리시는 이'로 번역하였다합니다. (21세기 예화-  우리 옆에 구부리는 이)

   보혜사 성령의 충만을 덧입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의 무거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변호사와 위로자와 상담자가 되어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받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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