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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요엘 2장 28 ~ 29절)

by 【고동엽】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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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요엘 2장 28 ~ 29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중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요 14:12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도 불가능해 보이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예수님께서 곁에 계셔서 도와주시면 모를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신 후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쉽게 납득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마 2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부부도 함께 있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떨어져 있는 시간도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항상 함께 계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역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떠나시지만 영으로 다시 임하셔서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게 됨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행할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공생애 기간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하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증언하면서 한 가지 더 첨부했습니다.

   행 2:17-21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바로 오늘 본문 요엘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성령이 오셨는데 이것은 그 옛날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일이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뒤에 비로소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구원 역사는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율법의 종교를 청산하시고 복음의 종교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옛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 역사를 마감하시고 새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령으로 새롭게 시작된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세상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 새롭게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차별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고후 5:17 말씀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거듭남”(Rebirth/ Born Again)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3: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후 다시 한번 더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우리의 궁금증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그 뜻을 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데 이것은 무슨 말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우리가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으로 난 것이고, 다시 태어날 때는 영으로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8을 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으로 이 땅에 태어날 때 어머니의 도움으로 태어납니다만 영으로 날 때는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마치 나비가 된 것과 같습니다. 나비가 알이 부화되어 애벌레가 되어 한 번 태어났다가, 다시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하여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한 번 태어났다가, 이제 성령이 오셔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일까요? 어떤 점에서 애벌레와 나비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창 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생령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생령이란 바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뒤에 이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 6:3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생령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존재론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변화가 생깁니다. 육신에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흙으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같이 육신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령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성령으로 났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다시 태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점점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 말씀을 들을 귀가 활짝 열립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묵상할 때 내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입이 활짝 열립니다.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성령으로 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성령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됨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외적인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 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뒤 4장을 보면 40일 금식하신 뒤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마귀는 굶주린 예수님께 돌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시험했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능력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고 시험했습니다. 정신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마귀에게 절하여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누리라고 시험했습니다. 영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장길섭의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라는 책에 기억해 둘 만한 구절 한토막이 있습니다.

  애벌레에게는 길에 늘어선 것들이 모두 다 문제입니다. 앞에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구경거리입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지요.




   애벌레에게는 모든 것이 다 힘겹습니다. 새가 물고 가다 떨어뜨려놓은 작은 나뭇가지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겨우 넘어설 수 있는 힘겨운 장애물입니다. 길 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돌맹이도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입니다.  앞길을 가로막은 작은 시냇물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고 나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날아가며 편안하게 둘러볼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나비는 날 수 있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인생의 장애물들을 쉽게 넘어설 수 있습니다. 갖가지 유혹들, 시험들, 고난들 어렵지 않게 넘어설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상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만끽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슥 4:6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됨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내적인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거듭나서 생명을 얻게 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큰 회사에 사장의 돌연사로 갑자기 후임 사장을 뽑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사회에서 파격적으로 30대 청년 사원을 그 능력을 인정해서 사장으로 발탁했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크게 기뻐했고, 모든 직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업무를 시작하면서 사장 자리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회사의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고, 회사의 실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수많은 직원들에 대한 인사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점점 스트레스를 받으며 염려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결재 서류에 사인할 때 손까지 떨리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정신과 의사를 찾았는데, 의사가 한 목사님을 소개하더랍니다. 그래서 찰스 알렌이라는 목사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청년 사장에게 처방을 내 놓았습니다. 하루에 약을 다섯 번씩 먹고 일주일 뒤에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 약이 시 23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잠자기 전에 한 번씩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 사장이 약속대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하루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손 떨리던 것도 사라지고 불안도 사라지고... 일주일 뒤에 목사님과 다시 만나서 이 청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6)




   그렇습니다. 우리가 출세해서 사장이 된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돼서 연봉이 높아진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유복한 환경 속에 있다고, 남이 누릴 수 없는 쾌락을 누린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돈에 대한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권력, 명예, 쾌락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밑 빠진 독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독을 통째로 물 속에 넣어버리면 그 독에는 늘 물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우리 삶은 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했던 그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날뿐 아니라 오늘도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으로 풍성한 삶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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