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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들이여 가자 (고전9:16-23)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가 빈민촌에서 창녀와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가가와의 가까운 친구가 방문해서 그의 선교활동을 옆에서 지켜 보았는데, 그 환경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형편 없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술주정뱅이 하나가 와서 가가와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는데, 가가와가 순순히 돈을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술주정뱅이가 길바닥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것을 본 그 친구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가가와에게 묻기를 "여보게 자네는 그 주정뱅이가 자네가 준 돈으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것을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네."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아니, 몇 십 번은 되었을 거네."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준다는 말인가?" "좀 더 참아보게."
또 어떤 날에는 가가와가 목회하는 교회에 나오는 창녀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술주정뱅이들이 와서 불러내자, 예배드리다 말고 그 남자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술 취한 자들은 교회에 와서 잔뜩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그 친구는 가가와에게 "이런 것이 주의 일인가? 예배인가? 선교인가? 자넨 위선자야.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라며 분개했습니다.그때 가가와는 말하기를 "자네도 알지 못하네. 저들이 나를 밥 먹듯이 속이고, 혹시 내가 저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고 해 보세. 그 이후에도 사랑은 끝까지 관통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악에 의해 죽으셨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작은 '사랑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하고 친구를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가와의 이야기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가와 도요히꼬가 죽은 후, 그가 지나갔던 곳에는 정말 작은 신앙의 싹들이 피어나고 크리스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다 불타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예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속을 관통한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철저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짓밟혔을 때, 알고 속아주었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인간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만난 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을 불살랐습니다.
본문 바울의 그 장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을 신앙 고백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철저히 자기를 죽이는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예수로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 가문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의 문하에서 공부한 율법학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관원임과 동시에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야말로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식민지 백성이었으나, 아무것도 그를 구속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자부했지만, 자유인이기는커녕 죄에게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는 죄의 노예, 죄의 포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의 포로, 죄의 노예였을 때,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만난 후 예수를 핍박한 죄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죄의 노예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실상 세상에서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진리를 박탈당하고 사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에 노예제도가 있을 때 노예가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러나 사람의 노예보다 죄의 노예, 곧 악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죄의 노예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한 이후, 그는 참 자유인,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포로,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영원한 자유인이요, 참 자유인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기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만 살아왔으나 이제는 오직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은 어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생명을 다 드렸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섬기는 자신의 삶이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강제적인 사명이지 스스로 자원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 부름을 받은 바울은, 자신의 소명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직분'은 '청지기'(steward)를 말합니다. 그 당시 청지기는 자유인이 아닌, 노예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가진 바울은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태도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종'의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종'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종'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의미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진정으로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권리를 주장하거나, 대접을 받기 바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자유와 구원을 받은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는다고 해서 그것이 칭찬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에게 다 갚을 수 없는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고 해서 무슨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복음 전파 사명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강제 명령을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또한 바울처럼 철저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각자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고백한대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권리를 모두 포기하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라는 멍에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하와이에 성에 다미엔이 순교한 몰로카이 섬있습니다.
다미엔이 문둥병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을 때, 문둥병자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을 모를 것이요" 라고 하면서 복음증거가 밥벌이 아니냐고 다미엔을 몰아부쳤습니다.
그러나 다미엔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다가 결단했습니다. 그가 결단한 것은 스스로 문둥병자의 피를 자기 몸에 넣어 문둥병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문둥병자가 되어야 그들이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된 다미엔이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자의 마음이 하나 둘씩 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건강한 몸을 버리고, 문둥병자가 된 다미엔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미엔의 사명과 희생을 통해서 몰로카이 섬은 절망과 슬픔이 넘치는 섬에서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복음의 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복음을 듣는 이들과 같은 자리에 서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주의자같이,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있는 경건하지 못한 것까지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몸과 정성과 마음을 모두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바치고 영을 바치고 정성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칭찬대신 욕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지식있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상대방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다가갈 때, 그들의 마음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큰 회사 회장 부인인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권사님이 부유하게 살기 때문에 평소에는 손에 물한방울도 묻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 분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권사님은 언제나 식당에서 궃은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지위, 명예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묵묵히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권사님 같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 같은 은혜를 받는 주님의 종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우리는 모두 예수 때문에 행복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처럼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행복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을 '사명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예수로 인한 참 행복을 깨달은 사명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때로는 내가 손해를 보기도 해야 합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명자들이여! 주의 종이 되어 주님의 일을 위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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