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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소명 (출3:1-12)

by 【고동엽】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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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소명  (출3:1-12)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물어야 할 중요한 확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 확인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구원받고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면접시험을 볼때 가장 소명의 질문을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당신은 소명을 받았습니까’ 라는 이 질문에 그때 저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저를 목회자로 불렀습니다”라고 대답을 한적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이런 소명감을 확인하지 않는 신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학력보다도 어떤 능력보다도 소명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명감의 문제는 단지 목회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목회자들에게 소명이 중요하듯이 성도 누구에게나 소명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종종 한국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소명감은 중요하지 않게 다루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가운데서 어떤 직업을 갖든지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소명감을 갖고 가야 합니다.
특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 직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종 교회 속에서 직분과 관련하여 2가지의 폐단이 있습니다. 우선은 직분에 목을 매는 직분 중심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직분을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잇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잘못은 직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직분 무시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분들은 결국 하나님의 소명을 제한하고 불순종하는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런 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구경꾼 관람객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서 다양한 직분과 사명을 맡기십니다.성경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먼저 부르심을 봅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부르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계획을 갖고 분명히 부르시고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저를 부르셨고 또 여러분도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하늘과 땅차이만큼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모든 노력과 수고의 질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많고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나같은 한 사람에 대한 계획을 갖고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실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공중에 나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엇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을 세신바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부르실까요?
본문의 모세는 어떻게 소명을 받게 됩니까? 모세가 부름받는 과정을 보면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소명을 받는지 그 원리는 대개 유사합니다.

1. 소명의 첫단계는 하나님의 준비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먼저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준비하신 다음에 부르십니다 .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때에 준비된 모세를 부르십니다. 지금 광야의 모세는 80세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모세는 40년전까지만 해도 애굽의 궁중의 왕자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대단히 자신만만했습니다. 스스로 해결사 노릇을 하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가 한번은 자기형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동하는 현장에 갔는데 애굽사람이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좌우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의협심이 많았던 모세는 그 애굽사람을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게 됩니다. 다음날 또 그곳에 나갔는데 이번에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가 말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라고 충고합니다. 그러자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냉담합니다. “언제 우리가 너를 재판관으로 삼았느냐”하는 것입니다. 40세때까지 모세는 세상에서 학문도 있고 권세도 있고 세상 지혜도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만만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자신만만한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만만한 모습이 좋지 않습니다. 말도 행동도 사역도 자신만만하게 하는 사람은 주님의 능력과 도움으로 일하기보다는 자신감과 자기의 능력으로 일하기 쉽습니다.우리 주님은 교회 속에서 교만한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자신만만하여서 내가 일하려고 할때 하나님은 모세를 다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만만한 모세를 미디야 광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후에 미다안 광야에서 무명으로 있었던 모세를 하나님은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광야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이스라엘과 아랍의 광야는 정말 적막하고 황량한 빈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 광야로 보냇습니다. 무려 40년동안이나 그 사막에서 있게 하였습니다. 그 40년동안 모세가 무엇을 배웠을까요? 자신에 대한 자신만만함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 자신의 무능을 체험한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40년동안 살 때 모세가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늘의 별 돌산들 모래들 그리고 양들 이런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자연 속에서 매일 양을 치면서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광야에서 어렷을적 어머니에게서 배운 하나님은 의지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사람을 먼저 찾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똑하고 잘 난 사람을 먼저 찾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대개 소명의 때가 찰때에 나타나는 징조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항복하는 그 때가 바로 소명의 때입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하나님의 일꾼으로 소명받은 분들을 보면 철저하게 실패를 맛본 사람들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함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을때에 그때 주님이 찾아오시고 그때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준비된 자를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지금 광야학교에 입학 중에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모세처럼 무명의 양치기로 이름없이 힘없이 고난 가운데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광야 중앙에서 처절하게 외로움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무력함을 깊이있게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못이루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영광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준비인 것입니다. 그 고난의 시간 그 고난의 현장을 원망하지 말고 나를 내려놓고 주를 붙들고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소명의 둘째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여기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40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그 무명의 시간 모세는 왕자로서의 모세가 아니고 유명한 사람으로서 모세가 아니고 별볼일없는 무명의 모세로 살아갔습니다. 모세를 알았던 사람들도 그를 잊어버렸고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는 그를 기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자였고 나름대로 지식과 신분도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저가는 삶을 산다고 할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무명의 시절 광야의 모세를 기억하시는 분이 잇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소명자는 먼저 잠잠히 참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나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을 해야지 내가 주님을 이용해서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도 그렇고 에수님도 바울도 무명의 시간을 대개 충분히 갖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준비의 시간이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때에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비하의 태도입니다. 80세의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1절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라고 합니다.
여기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불신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또한 이 말은 나이가 80살이요 무명의 양치기인 자신에 대한 자기 비하인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지나쳐서 자기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또 하나의 죄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처름에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런 자기 비하의 태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소멸하게 됩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성경적으로는 매우 유용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보다 더욱 무서운 죄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분석증후군’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 자신의 행동 자신의 모든 형편을 누가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 지나치게 죄책감을 갖고 분석하면서 결국 자기가 자기를 가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받을 줄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감사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6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은혜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내가 조건이 되고 내가 자격이 되고 내가 실력이 되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면 이미 그것은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을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전1장 29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오직 주님 만 자랑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길입니까?
바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객관적으로는 정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명의 광야의 양치기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소명을 다할 것인가? 그런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특별히 모세를 은혜 중에 부르신 하나님께서 모세가 순종할 때 두가지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는 형 아론이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였습니다. 형아론은 모세의 어눌한 입술을 대변하여 주었고 모세의 마른 지팡이는 80세의 힘없는 모세의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면서 어떻게 쓰임을 받습니까?
놀라운 기적의 지팡이가 됩니다. 이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놀라운 도구가 됩니다. 출4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 다 행하라”고 합니다. 여기 이적은 바로 모세가 지팡이를 갖고 나타낼 기적을 말합니다. 이제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기적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비로 마른 지팡이같이 보잘것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순종만 있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뜻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평범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순종하자 모세의 손에 들려졋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도구로서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존재 모세 일상적인 도구였던 모세의 지팡이가 순종했을때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시어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 합당한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도 세심한 준비 가운데 은혜를 주시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저를 부르시어 목회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동역자로 목자로 사용하십니다. 저를 사용하실 때 보면 저의 부족을 알고 주변에 좋은 일꾼들을 붙여주어서 목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저희 교회 장로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렇게 주변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모든 것을 장로님들이 알아서 해결하여 주십니다.
또 저의 소심한 성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중고등학교 시절 웅변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소심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면 오히려 힘이 솟고 말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여전히 약하고 소심하고 부족하지만 지금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마른 막대같은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도록 부르신 그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 도와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또 여러분 중에서 은혜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순종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두 번째는 은혜를 주시고 세 번째는 계시하십니다. 이 3번째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의 경우에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하십니까? 이 게시에도 3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있습니다.
우선은 평범한 삶의 장소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대개 우리는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하게 계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대개 평상의 일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십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양을 치다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때에도 회당에서 부르시지 않고 바닷가 일터에서 부르시고 세관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길을 가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평범한 삶의 환경 평범한 삶의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일을 할때에 일어납니다.
구체적으로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출3장 1절에 양무리를 열심히 치는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일을 할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날 것을 알고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인 평범한 일을 열심히 하던 중에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할때에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더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일도 중요하고 기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삶 속에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모세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 패턴을 보면 그 일상 속에서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본문의 모세를 보면 호렙산에 양을 치러 갔습니다.호렙산은 시내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왜 시내산도 있고 호렙산도 명명합니까? 일반적으로 해석은 호렙산은 산맥의 이름이고 시내산은 그 호렙산맥의 가장 높은 산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냥 시내산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가장 하이라이트 코스가 시내산등반입니다. 시내산 높이가 2285미터입니다. 밤 1시에 일어나서 자동차로 시내산 아래의 성캐더린 수도원까지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낙타를 타고 산을 오릅니다. 그 정상에 1시간정도 올라가서 좀 있다보면 새벽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산 정상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시내산 중턱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곳을 기념하여 교회를 지어놓았습니다.
이제 그 산중턱에 모세가 도착하여서 양무리를 칩니다. 지금도 그 수도원 주변을 보면 물이 있습니다. 아마 모세는 물이 있기에 그곳에 양을 풀어놓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때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떨기나무는 광야에서 제일 흔한 나무입니다. 떨기나무는 가시가 많은 나무입니다. 사막에서 흔한 이 나무는 생각보다 높고 큰 나무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가시나무 속 불가운데에 나타나셨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기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불붙는 떨기나무처럼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시나무가 불이 붙어서 타긴타는데 없어지지 않고 그 불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셔 나타나더라는것입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매일 보고 매일 대하는 평범한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셔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 평범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비범한 현상으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40년동안 이 장소에 아마도 수백번 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체험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실 때 평범한 삶가운데 비범한 나타나심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면서 계시하십니다.
5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말라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평범한 광야입니다. 너무나도 흔한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하십니다. 왜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모세에게 계시하기를 ‘네발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먼저 소명하시되 거룩함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심으로 거룩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가 쓰시는 소명자들을 향해서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로마서를 보십시오.1-11장이 교리이고 12장부터 우리의 행동의 결단의 내용들입니다. 롬12-16장에 보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그 기초가 롬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들릴 영적예배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받아 세상에서 소명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거룩이란 히브리어 는 ’자르다‘’나누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자신이 부르는 자기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따라 거룩하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명자들이 먼저 몸의 거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의의병기로 이제 사용되어져야 하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기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입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아무 음식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 입술로여전히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담대를 피우고 술을 먹고 그 입술로 함부로 유행가를 부르고 욕을 하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거룩한 손으로 사람들과 싸우고 죄짓는 곳에 그 손이 사용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그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 가서는 안될 곳에 가서 함부로 더럽히고 속되게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비록 좀 더럽게 살아왔지만 이제 소명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소명자로서 하나님이 먼저 요구하는 것은 먼저 신을 벗고 거룩을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곳에 나의 몸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 좋아하시는 곳에 내몸를 드리는 자가 소명자가 해야 할 결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소명자라고 한다면 나의 옛습관을 과감하게 결단하고 끊어야 합니다.
이시간도 우리 주님은 내가 비록 이전에 부정하고 더러웟을지라도 주님의 보혈의 공로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죄를 정결하게 씻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일1: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소명자는 무엇보다도 정결과 순결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혹시 내가 눈을 범죄하였자면 회개하시고 내 손을 더럽힌 일이 있자면 회개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그릇 작은 그릇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나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 목적을 갖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은혜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화합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명에 우리가 거룩함의 결단과 순종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일하시는 소명자 거룩의 도구 영광의 도구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춘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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