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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지식 (고전8:1-13)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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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지식  (고전8:1-13)


고린도같은 도시에서는 이교(異敎)의 생활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는 모두 각종 이교 신전에서 제물로 바쳤던 것들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6:12)"고 했고, 우상을 무시하는 자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4절). 우상 제물과 관련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에 대한 상당한 신앙 지식을 가진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무슨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 제물을 떳떳이 먹는 것입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둘째, 식물 먹는 것은 죄도 아니고 영적인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믿음이 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들어가서도 먹는 것입니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으면 어떻고, 제단 앞에서 먹으면 어떠냐? 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어디서 먹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셋째, 성례(성찬과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떤 마술적인 보호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찬을 받으면 귀신의 살을 먹어도 괜찮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 제물 같은 것은 성찬에 참여한다면 문제도 안되며, 뭘 먹든 무슨 일을 하든 괜찮다는 어떤 마술적 효과가 성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신앙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최고 기준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를 따져야지 네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신앙의 최고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따라서 자신의 신앙의 중요한 기준을 신앙 지식에 두지 말고 사랑에 둔 후에 그것이 남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함이 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문제, 즉 음식은 신령한 일과 무관한 것이므로 무엇을 먹거나 어디서 먹거나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우상의 제물 중에서 시장에서 산 것이나 개인 집에서 초청 받았을 때는 먹어도 좋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라고 해서 먹지 못할 것은 없지만, 만약 예수 믿는 성도가 우상을 섬기는 곳에 들어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제 삼자가 볼 때 분명히 그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이나 개인 집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곳이 아니라 먹고 교제하는 장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문제에 대한 답은 성찬이나 세례가 마술적인 보호 구실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했다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교훈이 고린도 전서 10장에 있습니다.

"(고전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고전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물로 세례 받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신 것을 성찬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멸망당했습니다. 이를 보건대 성례에 참여했다고 불순종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례에 참여했다고 우상숭배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을(레 19:26, 신 12:26, 23-25, 15:23 등) 오늘날에도 지켜 부정한 짐승 및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사실상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언함으로 음식물에 관한 율법적 금지 규례들을 파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막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히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더 이상 음식물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사도 베드로가 보았던 부정한 짐승의 환상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성구에서도 분명히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구약과 예루살렘 공회에서조차 피를 멀리하라고 금한 근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는 만큼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데 있으므로 그 정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음식물을 먹되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거나 자신이 음식물을 먹는 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게 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의 마음을 상케 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정당하다해도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하여 절제하므로 신앙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참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을 자기 믿음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자신은 좀 답답하고 덜 자유로울지 모르나 개개인의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성장과 성숙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특히 교회 생활에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늘 사랑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만을 최대한대로 고집할 때 교회는 쉽게 분열될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자신의 자유를 사랑의 원칙에서 스스로 제한할 때 교회는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른 교리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원하고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충심으로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자기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으로 기독교 윤리사(倫理史)에서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금하시지도 않은 행동들을 말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악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으로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행하라고 밝히지 않은 것, 그러므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판단과 신앙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에 관련 없는 주초(酒草) 문제로서 이는 각 개인의 책임감 있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에 맡겨진 것이므로 독선이나 독단에 치우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우며, 유대인들의 음식과 음료를 관장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우며, 율법적인 노예의 신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책임감에 의하여 조정이 되고 사랑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자유의 통제 수단이고 조건인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어진 환경에서 특정한 행위가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 행위가 "내가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잘못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나에게 이 행위를 금하는가? 만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절대적인 명령을 했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살인은 나쁜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답변은 반드시 "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행함으로 시험에 빠지거나 혹 죄를 지을 수도 있는가?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를 들 수 있습니다.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우리 몸을 실제로 절단하면서 죄를 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참뜻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는 모든 기회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금한 범죄 행위와 그 안에 죄는 없으나 죄를 범하게 하는 행위를 피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약한 형제를 자극해서 그가 실족 당하는 것을 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찬에 초대된 세 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을 갑, 을, 병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포도주 한 잔씩을 대접받았습니다. 갑은 하나님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성경은 술마시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 술은 유혹거리도 아니고 물론 포도주 자체는 죄도 아닙니다. 을의 경우엔 비록 포도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과거의 알코올 중독 경험의 예로 보아서 술마시는 것은 그에게 안전한 일이 못됩니다. 그러나 병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그는 어떤 순간이라도 술 한 잔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갑이 술을 마시면 병으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병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따라 마시게 됨으로 점점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될 소지가 있거나 혹은 갑에 대하여 독단적인 편견을 갖게 될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갑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가? 성경은 "아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갑이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는 이유는 포도주 마시는 것이 죄가 되어서가 아니며, 그것이 갑으로 하여금 취하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며, 정작 그것이 약한 형제인 병을 자극해서 그를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결정하려는 이들 세 가지 원리를 사용하는데는 각기 신자가 스스로 성경을 아는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양심을 비판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루터와 같이 "나는 성경의 내용에 매였고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각기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에 관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자유나 결정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자신이 결정한 모든 것에 대해서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며 마지막 날에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셋째 원리,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는 자들은 많은 것을 맡긴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성구를 보면 지식이 한 생명을 자라나게 하지 않고 한 생명을 밟아 버리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참으로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란 말은 바로 사랑 안에서란 말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예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틀렸다고 해서 그 순간에 잘라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세워질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이 사랑의 요소가 없을 때는 지식은 언제나 잘라 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교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우상을 가서 공격하는 것으로, "난 제사 안 지내, 난 주일엔 아무 것도 안 사먹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지식을 증명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사도 지내고 주일성수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와 어떻게 이야기하다가 신자라는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한 말씀 물어 봅시다." "예, 하시죠." "예수 믿는 사람 왜 그래요?" "왜요?" 한번은 어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넷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다음에는 차비 때문에 두 시간 동안이나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앙 지식은 교만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될" 만큼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에 대한 신앙적 율법적 지식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증거인 것을 깨달아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역사적인 산 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암흑의 대륙에 가서 그 평생을 헌신했던 대단한 신앙의 실천가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어떤 아이하고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싸움 도중에 이겼습니다. 그 아이를 눕혀 놓고 때려주는데, 그 깔린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같이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고기를 먹으면 너에게 지지 않을텐데." 이 말에 슈바이처가 충격을 받아서 그 다음부터 평생 고기를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원리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떤 가정에서 어린아이가 놀다가 잘못해서 방바닥에 두었던 유리컵을 깼습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너는 눈도 없느냐?" 며 심하게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 당신은 그걸 여태 치우지 않았소?" 라며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런 광경을 보고 시끄럽다며 며느리의 평소 게으름을 나무랐습니다. 깨진 컵조각에 발이 찔린 아이는 어른들이 화를 내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 저녁 그 가정에서는 유리컵 하나 때문에 심각한 불화가 생겼습니다. 한편 그 이웃집에서도 어린아이가 방바닥에 두었던 접시를 깨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꺼번에 아이에게로 달려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살폈습니다. 어머니는 얼른 깨진 접시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이 늙은 것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도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접시 하나 치우지 못했구나." 이 말에 며느리는 송구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게을러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떡을 맛있게 먹은 제가 당연히 치워야 했는데......." 이런 대화를 들은 아이는 "죄송합니다. 제가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이 두 가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율법에 대한 지식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므로 자신에게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 생활이 되시고, 가정과 교회에는 덕을 세우는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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